03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by 써니사이드업

전쟁이 끝나고 폐허 위에 나라를 다시 세워야 했던 시절에 국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미국과 굳건한 동맹을 맺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국가 안보의 토대를 마련했죠. 많은 국민들이 전쟁 영웅처럼 보이던 그를 ‘국부’라 부르며 따랐던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952년에 전쟁 중이라는 명분으로 그는 헌법을 고쳐 자신의 임기를 연장했습니다. 국회에선 야당 의원들이 경찰에 끌려 나갔고, 결국 법안은 통과되고 말았죠. 그날 국회에서는 민주주의보다 권력이 먼저였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어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졌습니다. 재적 203명 중 136명이 찬성해 법적으로는 가결 요건인 2/3에 미치지 못했지만, 정부는 억지 계산으로 통과시켜 버렸던 거예요.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장기 집권 길이 열렸고,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고 말았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1960년 3월 15일, 네 번째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승리를 위해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어요. 투표용지가 바뀌고, 개표 도중 정전이 일어났으며, 경찰은 투표함을 실은 트럭을 몰래 옮겼습니다. 조작된 결과는 곧바로 드러났고,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어요. 마산의 거리를 시작으로 “민주주의를 돌려달라!”는 외침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4·19 혁명 1960년 (출처: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마산 시위는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에 맞서 돌과 목소리로 저항하는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고등학생이 실종되었고, 며칠 뒤 그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 파편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어요. 그 충격은 국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고, 학생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전국적인 항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끝내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려 했습니다. 발포 명령이 떨어지며 학생과 시민 186명이 목숨을 잃고, 6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분노의 물결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희생은 더 큰 연대를 낳았어요.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궐기했고, 교수들까지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 회복을 외쳤어요. 결국 4월 26일에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며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4·19 혁명은 한국 현대사 최초의 성공한 시민 혁명이었고, 그 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5.16 군사정변 직후의 박정희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그러나 혁명의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뒤이어 출범한 장면 정부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죠. 경제는 여전히 불안했고, 사회 곳곳에서 개혁은 지연되었습니다. 자유는 얻었지만, 안정된 민주주의 제도를 만들기엔 역량이 부족했던 거예요. 이 틈을 타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구국의 결단’을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새벽녘 군홧발 소리에 민주주의는 또다시 짓밟혔고, 군사독재의 시대가 열린거죠. 그리고 이것이 기나긴 군사독재의 시작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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