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의 풍경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IMF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수많은 기업이 무너지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일상이 되었죠. 이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일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사회 전체에 깔려 있었습니다. 부모 세대는 실제로 그 길을 걸었고, 자녀 세대도 그 길을 따를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위기 이후, 그 사다리는 점점 흔들리더니 끝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거치며 양극화의 그림자는 더 짙어졌습니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정부가 돈을 풀었지만, 그 돈은 공장이나 기술 개발로 가지 않고 대부분 부동산과 주식 같은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었죠. 가진 사람들은 더 큰 부를 쌓았고, 자산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 뒤처졌습니다. 집값은 끝없이 치솟았고, 한 번 기회를 놓친 사람들은 다시는 집을 살 수 없는 구조가 고착되어 버렸습니다.
서울은 이 격차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도시였습니다. 강남은 ‘성공의 공간’으로 굳건히 자리 잡으며 값비싼 아파트 단지가 늘어났지만, 강북과 외곽은 상대적으로 정체된 채 남았죠. 화려한 고급 아파트 단지 안에는 부유층이 모여들었고, 그 바깥에는 반지하, 고시원, 노후 임대주택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지도 위에 색으로 표시하면 도시의 계급이 그대로 드러났고, 사람들은 점점 비슷한 처지끼리 모여 사는 ‘주거의 분리’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차이는 아이들의 삶에도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어떤 동네는 아이들로 붐비고 학교와 학원가가 빽빽했지만, 다른 동네는 학생 수가 줄어 학교가 통폐합될 위기에 놓였어요. 교육은 격차를 메우기는커녕 오히려 벌려 놓는 역할을 했습니다. 강남 8 학군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사교육, 입시 정보, 대학 진학률에서 앞서 나갔습니다. 반면 다른 지역은 낙후된 교육 환경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예전에는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해서 집을 마련하는’ 삶의 경로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출발선부터 막혀 버렸습니다. 취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설령 취직을 하더라도 안정적인 정규직 자리는 줄어들고 있죠. 집은 너무 비싸서 청년들에게는 그림의 떡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결과 많은 청년들은 계층 이동이라는 말이 더 이상 현실 같지 않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눈앞에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0년대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치로 더 뚜렷해졌지요. 2023년 기준 상위 20%는 전체 자산의 약 66%를 차지한 반면, 하위 20%는 고작 1% 남짓을 보유하는 데 그쳤습니다. 서울 집값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두 배 이상 뛰었지만, 청년 세대의 실질소득은 제자리였어요. 이제 부동산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가장 큰 축이 되었고, 한국 사회는 ‘사는 곳이 곧 계급을 말해주는 사회’로 변모했습니다.
양극화는 단순히 가난과 부유함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기회의 차이, 일상의 질 차이, 미래에 대한 기대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같은 도시, 같은 시간 속을 살아가지만, 서로 전혀 다른 풍경을 걷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가 된 것이죠. 누군가는 카페와 고급 주거 단지에서 여유를 누리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생계와 월세 걱정 속에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결국 ‘성장’이라는 말은 어느새 한쪽으로만 무겁게 기울어 버렸습니다. 한국 사회는 이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구조를 다시 짜야할 지점에 서 있습니다. 무너진 사다리를 다시 세우지 않는 한, 이 사회는 더 큰 단절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양극화는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의 기반을 위협하는 문제로 자리 잡은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