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것이 것이 아니라 스마트한 것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된지 1년. 내 피지컬이 보이지 않아도 되는 메타버스 세계에서 놀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세상. 목소리가 필요없는 텍스트로 대화하고 인터넷 댓글로 의견을 펼치는 세상. 이런 세상을 덮친 위협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도 아니고, 기근도 아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였다. 어쩌면 재앙마저 시대상을 닮았을까. 전세계 그 누구도 제대로 예상하지도 준비하지도 못한 전염병 시대는 그렇게 무턱대고 시작됐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강구한 서바이벌 전략은 마스크 쓰기, 손씻기, 자체 면역력 관리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 정도였다. 그 중 가장 내게 큰 영향을 미친 건 사회적 거리두기였다. 타인을 만나지 말고 왠만하면 집에 있으라는 명령. 그런 어이없는 행정 명령 앞에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을 해봤다.
"삶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하고 기본적인 활동이 뭘까?"
먹는 것. 자는 것. 싸는 것. 씻는 것. 돈 버는 것. 그리고 최소한의 운동과 햇볕 쐬기.
그것이 처음 떠올린 필수 활동 리스트였다. 그리고 마스크 쓰기 계몽에만 꼬박 1년이 걸린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초반에는 외출을 정말 최소화했다. 산책 대신 뒷마당을 돌았고, 운동은 오래 전 사둔 자전거를 활용했다. 일은 온라인으로 했고, 교회고 친구고 간에 모든 만남을 멈췄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쇼핑이나 외출은 안한다쳐도 식료품 구매는 정기적으로 해야 했다.
물론 식료품 쇼핑은 필수활동으로 인정되서 마트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스크를 안쓰는 미국인들과 함께 장을 보는 건 얼마나 찝찝하고 불안한 일인지! 다행히 얼마 안되 식료품 배달이 가능해 졌다. 처음엔 미국에서 식료품 배달 서비스가 생긴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애용했다. 물론 식료품 주문도 쉽지는 않았다. 배달 슬랏이 정해져 있어서 원하는 날 배정이 다 차면 그 날은 허탕이다. 광클릭질과 화면고침을 반복하며 어렵게 주문에 성공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몇 번 배달을 받아보니 물건값이 매장을 방문할 때보다 더 비쌌다. 심하게는 10%씩 더 받기도 했다. 거기에 팁도 줘야 한다. 평소보다 돈을 훨씬 더 쓰는데 받는 물건은 더 줄었다.
그래서 팁이라도 줄여보고자 한 번에 주문을 많이하기 시작했다. 큰 맘 먹고 직접 장을 보러가도 마찬가지다. 제 가격에 물건을 사는 날이니까 또 한가득 사온다. 결국, 팬데믹 시즌에는 한 번 식료품 쇼핑을 하면 잔뜩 사게 된다.
한꺼번에 식료품을 사면... 식재료 관리가 한층 더 중요해 진다. 빨리 상하는 재료들은 빨리 먹어야 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렇다고 냉동식품이나 통조림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오래가는 재료, 그리고 여러가지로 요리하기 좋은 식재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새롭게 발견한 채소 일번은 바로 양배추. 양배추는 생으로 씹으면 맵싹한 맛이 나는데 씹다보면 달큰한 맛도 난다. 무엇보다 양배추는 훌륭한 샐러드용 야채다. 잘 시들지 않고 씻기도 좋다. 샐러드에 꼭 양상추나 야들야들한 채소가 들어갈 필요는 없다. 양상추나 스프링 믹스 채소들은 얇아서 씻기도 까다롭다. 생각해 보면, 옛날식 돈까스 집에 가면 늘 돈까스 옆에는 양배추 샐러드가 나왔다. 커다란 돈까스 옆에 얇게 채썰어진 양배추 샐러드. 주로 케쳡과 마요네즈가 섞인 소스가 빙빙 둘러져 있었는데 돈까스랑 참 잘어울렸다.
또 양배추를 얇게 채썬 후, 얇게 썬 양파, 당근, 펜넬, 아보카도, 샐러리, 그리고 삶은 렌틸콩을 첨가하면 고급스러운 샐러드도 가능하다. 물론 KFC에 가면 나오는 코울슬로 샐러드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양배추는 위에도 좋다. 배탈이 난 후, 몇 번 먹어봤는데 속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좋았다. 장이 금새 안정을 찾는 건 기분탓일까? 막 쪄낸 덕분이겠지만 부드럽고 따뜻해서 감촉도 좋고 마음도 달래주는 듯 하다. 별식도 가능하다. 아침 못먹고 출근한 날, 동료들과 회사 앞에서 사먹던 그 토스트! 거기에도 양배추가 있었다. 달걀 속에 치즈와 양배추, 그리고 당근이 송송 들어가 있던 아침식사용 토스트. 가끔 생각나면 일 년에 한 두 번 해먹는데 어설프게 만들어도 맛있다. 그렇다. 작년 1년 동안 나는 양배추 팬이 됐다.
오래가는 채소 중 하나는 로메인 상추(Romaine)다. 요리하기는 귀찮은데 몸보신은 하고 싶은날, 우리는 주로 고기를 구워먹는다. 그런데 한국장에 가지 못하면 상추나 깻잎이 없다. 상추가 있어도 며칠 지나면 금새 시들해진다. 그러면 먹기도 찝찝하고 맛도 없다. 그래서 고기쌈용 대용 채소를 찾았는데 바로 로메인 상추. 로메인 상추는 오래간다. 많이 오래간다~ 그리고 더 두껍고 아삭아삭하다. 샌드위치 만들 때도 넣을 수 있다. 샌드위치 사이에 상추를 넣을 순 없지만 로메인 상추는 많이 사용된다. 햄과도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빵이 없을 때도 유용하다. P.F.Chang 이라는 퓨전 중국집에 가면 레튜스 속에 양념 닭고기와 땅콩을 넣어서 나오는 메뉴가 있다. 그렇다, 닭고기와도 잘 어울린다. 게다가 빵없는 로메인상추와 닭고기 조합은 다이어트 용으로도 그럴싸하다.
우리 집은 아침에 빵이 있어야 한다. 식빵이나 모닝빵이 없으면, 팬케익을 굽고, 팬케익이 없으면 인도식 난이라도 있어야 한다. 늘 떨어지면 안되는 것이 식사용 빵이다. 그렇지만 방부제를 듬뿍 넣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그런 식빵은 안먹는다. 그런데 빵은 늘 있어야 하고... 자주 장을 보러갈 수는 없고.
그러다 우연히 어떤 기사에서 또띨라가 식빵보다 오래간다는 글을 봤다. 그래서 사 봤는데 진짜 더 오래간다. 왜 인지는 모르겠는데 (부디 방부제는 아니길) 식빵보다 유통기한이 긴 점도 마음에 들고,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치즈를 넣고 구우면 칙필레식 점심(또띨라 사이에 체다 치즈와 모짜렐라 치즈를 넣고 눌러 구운 것)도 가능하다. 우리집에서는 인기 메뉴다. 야채와 달걀 스크램블, 그 외 좋아하는 재료들을 넣고 돌돌말아 뷰리토로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얼려두었다가 데워 먹으면 바쁜 날에 든든하고 편리하다. 하루 삼시 세끼를 집에서 해먹어야 하는 일상에서는 식빵보다 백배 활용도가 좋다.
다시 국물을 미리 만들어 두는 건 주부 9단이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집에 갇혀있다 보니 하게 된다. 사실 치킨 스톡은 시제품이 많다. 굳이 바쁜 시간에 치킨 스톡, 그러니까 닭 육수까지 손수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런데, 닭을 한 마리 사면 우리 세 식구 먹기에 양이 너무 많다. 미국은 닭도 크다. 커다란 닭 한마리로 한 가지 요리를 해먹기는 너무 지루하다. 그래서 처음에 양념해서 오븐구이로 먹은 후(진실은, 주로 오븐구이 된 통닭을 사온다), 남은 닭 처리용으로 시작하게 됐다.
닭이랑, 중간 사이즈 양파 1개, 당근 2개, 샐러리 1대, 마늘 3알, 소금, 로즈마리나 타임 같은 허브, 그리고 통후추를 넣고 두 시간 정도 끓이면 완성이다. 물론, 센 불로 끓이다가 약불로 내려줘야 하는데 이것마저 신경쓰여서 인스턴트 팟에 넣고 끓일 때가 많다. 효과 만점이다. 유리병에 나눠서 얼려두면 정말 김장이라도 한 것 처럼 마음이 든든하다. 바쁘고 피곤한 날, 한 병 꺼내서 떡국떡이나 칼국수 면을 투하하면 금새 영양많은 한 끼 식사가 준비된다.
자주 장보러 나갈 수 없고, 한꺼번에 가득 장봐온 것들을 오래동안 잘 먹어 보려고 찾기 시작한 일인데, 뜻밖의 수확이 크다. 내일은 주말이니까 치킨스톡 꺼내서 닭개장이나 끓여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