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작 숫자 세 개로 만들어진 버스 번호인데, 그걸 잘못 볼 줄이야. 아니 잘못 봤다고 하기엔 억울하다. 아! 버스다! 하는 순간에 내 눈에는 그 버스가 분명히 325번이었으니까. 정신없이 올라탄 버스 안은 아늑하고 따뜻했다. 몰려오는 안도감과 온기에 바짝 얼었던 몸과 마음이 다 녹았다. 몇 정거장을 더 가다가 빈자리가 나서 냉큼 자리에 앉았다. 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자리에 앉아서 뽀득- 소리를 내며 김이 서린 창문을 닦고 창 밖을 봤다. 뛰어가는 게 더 빠르겠는데, 싶은 정도로 버스는 천천히 가고 있었고 도로는 엉금엉금 기어가거나 기어가지도 못하는 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택시를 탔더라면 3-40분 만에 도착할 숙소였는데, 이 속도라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 까마득했다. 그래도 못 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괜찮아, 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꾸 눈이 감겨서 도착할 때까지 눈이라도 붙여야겠다, 싶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버스 안의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그때 알게 되었다. 내가 탄 버스가 325번이 아니라는 것을. 하, 나란 사람이란. 가운데 숫자 2만 같을 뿐, 앞과 뒤는 다른 숫자였다. 하, 신기루. 오아시스를 쫓아 간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나지 못했을 때 이런 기분일까. 아, 이 모든 게 리얼이라니. 예능이었다면 레전드 에피소드가 됐을 텐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차라리 공항이었다면 공항 안에서 노숙이라도 했겠지만, 이제 내가 남겨지게 될 곳은 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재해의 현장 한가운데일 뿐이었으니까. 머리를 빠르게 굴리면서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지금이 21세기, 손 안의 인터넷 5G 스마트폰이 상용화된 시대인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다행히 버스는 원래 가야 하는 함덕 방향으로 가는 버스이긴 했다. 우선은 갈 수 있는 만큼이라도 가야 했다. 다른 버스를 또 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 도로는 마비 그 자체였다. 모든 차가 비상 깜빡이를 켜고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고, 경찰 아저씨들이 야광 조끼를 입고 차 사이사이를 다니며 제설제를 뿌리고 있었다. 도로 위에서 차가 미끄러지는 사고도 이미 2건이나 목격했다. 내가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걸까, 싶은 중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야, 숙소 도착했나?” 아, 그래. 원래라면 이미 숙소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사실 엄마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컥해서 눈물이 왈칵 날 뻔했지만, 나는 눈물을 꾹 눌렀다. 나는 7살도, 17살도 아니고 27살이니까. 고집을 부려서 굳이 굳이 대설주의보가 내린 제주도에 온 27살이니까. 하지만 침울한 목소리는 눌러지지 않았다. “아니.. 아직 버스. 숙소 가고 있는 길인데, 도로가 좀 얼어서 꽤 걸리네.” 엄마는 헐, 하고 대답했다. “야 택시 타고 가지. 짐 들고 버스를 탔노.” 나도 그러고 싶었어, 엄마. 택시를 안 탄게 아니고 못 탄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대책 없는 상황을 굳이 설명해서 엄마를 더 걱정시킬 필요는 없었다. “버스가 금방 와가지고 그냥 이거 탔지 뭐, 택시는 줄도 길더라!” 금방 온 버스는 거짓말이었고, 긴 택시 줄은 사실이었다. “그래, 카면 얼른 가서 밥 먹고 해라. 맛있는 거 먹고!” 엄마는 다행히 별다른 잔소리 없이 전화를 끊어줬다. 엄마랑 전화를 마치고는 왠지 더 시무룩해졌다. 아주 오랜만에 엄마가 보고 싶었다. 머리가 다시 온통 ‘어떡하지’로 채워졌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아마 ‘어떡하지’가 아닐까.
두 정거장쯤 겨우 더 갔을까. 그 마저도 평소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버스가 멈추더니 기사님이 갑자기 차에서 내리셨다. 사람들이 웅성댔다. 잠시 후 기사님이 버스로 올라타시더니,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했다. “저.. 이거 차가 안 되겠어요! 여기 언덕이라 차가 못 나가요, 이거. 전기차라 힘을 못 써. 내려서 다른 버스 타시는 게 낫겠는데?” 아. 말도 안 돼. 다른 버스라니. 다른 버스가 오기는 하나요..? 하는 한탄을 속으로 외치면서 눈알을 굴리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여자는 한숨을 쉬더니,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 버스 멈춰서 못 가는데 데리러 와줘.” 하면서. 제주도민이 늘 부러웠지만, 이렇게나 서럽게 부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어느 때보다 더 큰 ‘어떡하지’였다. 기사님의 말에 훌쩍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제주도민 같았다. 꽉 찼던 버스에 이제 겨우 5-6명의 사람만이 남았다. 그들은 모두 나와 같은 처지인 것 같았다. 누구는 캐리어와 함께였고, 누구는 큰 짐가방을 안고 있었다. 나와 같은 재난 동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가만히 있었다. 어느새 자리에 앉은 기사님이 백미러로 보이는 우리에게 말했다. “아니 그러고 있으면 다들 어떡해. 좀 있음 버스도 안 다니는 시간인데. 내려가지고 쩌어기- 걸어서 저 언덕 넘어가면 차가 아직 있을 거니까 얼른 가봐요, 응?” 어느새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택시도 없는데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나의 재난 동지들 중 내가 가장 먼저 용기를 냈다. ‘어떡하지’의 마음은 여전했지만, 일단 내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지도를 찾았다. 20분 정도를 걸어가면,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어딘지 모를 제주의 한 동네를 누비며 걷고 걸었다. 장화를 신고 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지도만 쳐다보며 걷던 중에 한 골목에서 내복 차림에 패딩 점퍼를 걸치고 눈사람을 만드는 남매를 마주쳤다. 깔깔거리면서 눈사람을 토닥이는 아이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이 서러운 밤이 여기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는 그저 오랜만에 눈이 많이 온 낭만적인 밤일 뿐일 테니까. 성냥팔이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어딘지 모를 이곳에서 춥고 배고프고 고생스러웠다. 나만 빼고 이 동네의 모든 사람이 따뜻한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평온한 저녁을 보내고 있겠지.
그렇게 어딘지 모를 제주의 한 동네를 누비며 걷고 걸었다.
다행히 걷고 걸어 다시 함덕의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이번에는 버스 번호도 재차 확인했다. 아까 전의 버스에 있었던 재난 동지의 얼굴도 봤다. 어디서 탔는지, 그는 이미 버스에 타 있었다. 반가워서 하이파이브라도 할 뻔했다. 이제 진짜 숙소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드디어, 끝끝내, 다행히. 이제야 노래라도 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와 처음 만났던 날, 그 애가 오혁과 카더가든의 라이브가 진짜 최고라며 알려준 노래.
<Bushwick>
"그래, 그땐 난 생각 없이 갔었지. 요즘 그때의 생각이 나. 다른 시간 속의 많은 모습, 코 끝의 남은 느낌도. And we fly to the bushwick. And we fly to the brooklyn. it’s the time to travel around the world. And we naver go back to home.”
생각 없이 갔던 여름 제주, 뜻밖에 만난 멋진 사람들,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처럼 마음껏 여행하던 시간. 그 노래는 우리의 여름, 제주 그 자체였다. 나는 여름이 그리울 때마다, 제주가 고플 때마다, 일상이 지겨워 숨이 막힐 때마다, <Bushwick>을 듣곤 했다. 그러면 잠시나마 그 해 여름 제주에서의 기분일 수 있었다. 이제 폭설이 온 제주에서 오롯이 혼자인 내 모습이 이 노래가 가진 향수에 더해지고 있었다. 이제 <Bushwick>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 되려나. 김이 서린 창 밖으로는 검고 흰 풍경이 있었다. 왠지 웃음이 났다. 하루가 참 길고 길었다. 솔직히 내가 좀 불쌍했다. 아니, 꽤 불쌍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오로지 그 애를 보고 싶어서 혼자 제주에 올 마음을 먹게 됐다. 그리고 진짜로 와버렸다. 진짜로 제주에 혼자 왔지만 그 애를 만나지 못했다. 꿈꿨던 그 애와의 설레는 저녁은커녕, 춥고 배고프고 막막한 유랑을 하게 됐다. 아, 불쌍한 나. 이 고생을 겪으며 혼자 덩그러니 까아만 창 밖을 보며 이 노래를 듣고 있는 내가 짠하고 자랑스러웠다. 이 연말에 이 고생을 겪게 한 제주가 미워질 만도 한데, 이상하게 더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웃음이 났다. 처량한 처지로 대책 없는 여행을 하고 있는 내가 어이없게도 꽤 마음에 들었다. 도착해서 회를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잊지 못할 27살의 마지막 날을 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