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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 Lounge Jun 04. 2021

[직장인의 하루] 퇴사를 위해 점집을 전전했다

저 퇴사해도 될까요?

나이 마흔 넘어, 그것도 코로나 시국에 퇴사라니?

아이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들어갈 돈도 많은데 퇴사라니? 

집값은 천정부지 솟구치는데 전세 신세에 퇴사라니? 


수많은 물음표와 불확실성과 불안감 속에 퇴사를 하려니, 퇴사를 합리화시키고 나 자신을 설득해줄 장치가 많이 필요했다. 


물론 사주와 점을 맹신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현재 내 삶에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오랜 고민을 했고 그것이 "돈"은 아니라는 사실을 마주했다. 그렇게 십수 년을 근무한 회사를 떠나기로 굳은 결심을 했고, 가족과도 깊이 상의를 했으며 배우자의 동의도 얻었다. 다만, 지극히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판단 뒤, 혹여 내가 내다볼 수 없는 사주나 운세를 간과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뭔가 찝찝한 느낌이 싫었다. 마흔 갓 넘어 퇴사하는 건 내 팔자가 이미 정해놓은 것이라고 누가 말 좀 해줬으면 했다. 내 마음이, 모든 이들이 나의 퇴사에 완벽히 동의를 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1. 엄마 친구 미숙 이모 

엄마 친구 중에 미숙 이모라는 분이 있다. 수년 전 신내림을 받아 집에 작은 신당을 차리고 사주를 봐주는 일을 하시는 아주머니다. 답답한 일이 있을 때, 큰 결정을 앞두고 몇 번 조언을 구했던 터라 이번에도 미숙 이모를 찾았다. 회사를 그만두고자 한다는 나의 말을 들은 미숙 이모는 마치 나를 친조카처럼 생각하는 듯 요즘 세상 및 코로나 시국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이모... 저 사주 봐주세요. 시국 말고, 사주요....... 

여긴 안 되겠다, 나를 전혀 모르는 곳에 가야 해. 


2. 철학관 

어느 날 회사에 앉아있다가 나 이러다 죽겠다 싶은 마음에 회사 근처 철학관 검색을 했다. 몇 군데가 있군. 가장 평이 좋은 곳을 골라서 바로 예약을 했고 퇴근길에 철학관의 선생님 앞에 앉았다. 생년월일, 태어난 시로만 내 사주를 봐줄 줄 알았는데 관상도 보고 손금도 봐준다. 신뢰가 간다. 눈빛이 반짝이는 그 선생님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어쩌면 이미 답을 정해둔 답정너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기대했던 답이 나왔다. 

"퇴사해도 됩니다. 큰 일 안 생겨요. 어디서 뭘 해도 돈은 버실 거예요." 


2. 정통 사주 

생년월일, 태어난 시, 남편의 생년월일까지 넣고 나니 내 사주를 읊어준다. 내가 기대하던 답이 아니다. 그만두지 말고 조금 더 참고 일하라고 한다. 왜냐고 따지듯 물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하는 일이 돈을 더 많이 번단다. 물론, 사주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소득이 지금보다 줄어드는 것이 더 안 좋은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터, 나는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후한 급여와 극강의 스트레스를 선택할래, 적은 급여와 평안을 선택할래라고 한다면 나는 당연히 후자였다. 나에게 '평안'이란 '육아'를 뜻하기에. 


3. 전화로 상담하는 신점 

전화로 사주를 봐주는 곳에서 족집게라고 유명한 분과 전화 연결이 되었다. 인사를 하고 이름을 말하자, 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키가 크다, 점잖은 사람이다, 옷을 잘 입는 사람이다 라고 말한다. 이건 뭐지! 내가 키가 큰 건 사실이잖아. 내가 명랑 발랄하기보다는 조용한 편인 게 맞잖아. 솔직히 나 옷 못 입다는 말은 안 듣잖아. 이걸 어떻게 맞췄지? 심지어 생년월일도 안 줬는데? 그래서 신점인가? 뭔가 느낌적인 느낌으로 사주를 보는 건가? 이런 분이 말하는 거라면 믿을만할지도 몰라. 

다행히 내가 기대했던 답이 나왔다. 

"회사에 나가는 게 도살장 가는 것 같겠네, 이렇게 힘들면 쉬어야지" 


점집에 약 20만 원을 소비하고 나는 기어이 원하는 답을 얻어냈다. 천군만마가 따로 없었다. 이들이 모두 한 입으로 내가 회사를 떠나도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너 여기 그만두면 쫄딱 망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됐다. 그거면 됐다. 이제 사직서를 발송할 용기가 생겼다. 


"Letter of resig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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