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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래도 칭찬이 고픈 40대

by 퇴근후작가

《내일도 불안할 예정입니다만》

- 불안한 나를 고치지 않기로 한, 아주 개인적인 결정의 기록

Part 3. 화실에서, 나를 그리다 — 온전히 내가 된다


3-5. 그래도 칭찬이 고픈 40대


작업에 탄력이 붙은 어느 날이었다.

컬러링 중이던 작품은 점점 완성도를 더해갔고,

후속 시안도 마음에 들어 배경 작업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래서 또, 무리했다.

50호 캔버스를 화실에서 집으로 들고 와

퇴근 후 깊은 밤까지 집업실(집 + 작업실)에 앉아 정신없이 배경 밑작업을 이어갔다.


이번엔 반짝거리는 구슬 패턴을 넣고 싶었다.

그림 속 세계가 더 생생해지기를 바라며

원형 스티커 1,200개를 하나하나 손으로 붙이고,

다시 하나하나 떼어내는 고된 작업을 감행했다.


111.jpg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그 시간들.

하지만 그 밤, 딸아이가 내 옆에 와 조용히 스티커를 붙여주기 시작했고,

남편도 손톱이 까매지도록 마스킹 제거를 도와주었다.

덕분에 캔버스 위에 구슬영역이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피곤함보다 뿌듯함이 먼저 얼굴에 번졌다.


물론 대가는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어지럼증.

몸이 보내는 분명한 경고였다.

‘멈춰야 한다’는 신호를 나는 또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회사일, 가사, 육아, 그리고 그림.

비축해야 할 에너지는 늘 바닥을 향해 간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그림은 나에게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감각을 확인하게 해주는 유일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멈추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어렵다.

오늘 하루를 잃었지만, 어젯밤의 몰입으로 일주일은 번 셈이다.

이 어지럼증도 곧 지나갈 것이다.


며칠 뒤, 새벽까지 밤을 새워 완성한 배경 밑작업을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그 과정이 너무도 뿌듯했던 나는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다.

나름 잘 나왔기에 경상도 남자인 선생님께 폭풍 칭찬을 받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원을 더 작게 했어야지~ 이건 배경으로는 좀 큰 것 같은데? 다시 할 수 있나?”


“… 저 어제 퇴근하고 새벽까지 한 건데요…”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는 와중에 선생님은 매우 건조하게 말했다.


“그럼 5~6시간 걸린 거네? 그 정도 밑작업한 거 가지고 뭘 그래.”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 호들갑 떨지 말라는 말투에 서운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나는 퇴근 후 밤을 새워도,

다음 날 아침 9시엔 다시 회사에 앉아 있어야 하는 직장인이다.


내게는 그 5~6시간이, 퇴근 후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은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난 그림으로 판단되어야 하는 작가지망생이었다.


그날 이후, 기분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밤잠도 설쳤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즘 들어 선생님은 내 그림에 칭찬보다 지적을 많이 하신다.

잣대도 부쩍 엄격해지셨다.


내가 그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이제 나는 단순히 ‘그림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개인전을 준비하는 ‘작가 지망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나를 프로의 시선으로 바라보신다.

그러니 웬만한 노력엔 반응하지 않으신다.

그림이 여전히 취미였다면, 아마 “잘했네” 한 마디쯤은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는, 그림으로 무언가를 ‘해내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생님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다.

내가 직장인이든, 주부든, 그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사정일 뿐. 작품의 완성도에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또 다짐한다.

“그래, 내가 더 잘하는 수밖에 없지.”


선생님이 늘 하시는 말씀처럼

“연필선 하나, 붓질 하나. 작가는 다 의도가 있어야 한다. 그냥 하는 건 없다.”

작가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고 막막하지만 멈추지 않고 해 나가야 한다.

조금 더 고민하고, 조금 더 애써서, 어제보다 단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서.


그래도 선생님 정말 가끔은, 칭찬 한 번쯤 해주세요.

그게 제가 다음 붓을 드는 힘이 되어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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