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단편극장 9
* 세기말 PC통신과 인터넷 초창기 동성애자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한 오래 묵혀둔 단편소설을 공개합니다. 당시의 공기와 낯선 설렘을 함께 느껴보세요.
수민은, 갑자기 을지로에 볼 일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극장 근처를 지나게 되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필이면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영화 「감각의 제국」을 상영할 줄이야.
혹시라도 극장 입구에서 아는 게이를 마주친다면, 수민은 이렇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도 알잖아. 내가 그 극장에 죽치고 앉아 있는 늙은 게이들한테 관심 없는 거. 하지만「감각의 제국」은 시네필이라면 꼭 봐야 하잖아. 많고 많은 동시상영관 중에 하필 이 극장에서 할 건 뭐람.”
게이 극장에 드나든 지도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수민은 4천 원짜리 표를 살 때마다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누군가에게 해명하듯 중얼거렸다. ‘그 사건’ 이후 생긴 습관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극장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마주친 게이 친구가, 마치 디스패치 기자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너 극장 다니니?”
순간 수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질문은 단순히 “영화 보러 갔어?” 혹은 “영화는 어땠어?” 같은 소박한 물음이 아니었다.
그 말에는 “세상에, 너 거기서 늙은 퇴물들이랑 그런 짓을 하고 왔구나!”라는 혐오가 담겨 있었고, “알고 보니 넌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일회성 섹스만 찾는 사람이었구나”라는 비아냥이 겹쳐 있었다. 수민의 친구들 사이에서 ‘게이 극장’은, 이성애자 남성들에게 청량리 588이 지저분하게 회자되는 것과 비슷한 이미지였다.
그때 수민은 이렇게 둘러댔다.
“그냥 궁금해서 한 번 들어가 본 거야. 워낙 유명하잖아. 한 시간쯤 앉아 있었는데, 별 재미도 없더라. 왜 가는지 모르겠어. 대부분 늙은이더라구. 젊은 애들도 다 발랑 까진 애들뿐이고. 기분만 나빴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자, 그는 “원래 그런 곳인 거 몰랐니? 쓸데없는 호기심 부리다간 이상한 사람 만나서 에이즈 걸릴 수 있어. 거기 다니는 사람들은 다 닳고 닳았으니까 다시는 가지 마.”라고 말했다. 그는 종로 2가에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같이 가자고 청했다.
수민은 “그냥 구경만 했어. 다시 갈 일은 없을 거야.”라며 맞장구를 치고 기꺼이 그를 따라나섰고, 모임에서 자신이 경험한 ‘첫 극장 체험담’을 농담 섞어 떠벌였다.
극장 안에서 눈이 맞아 함께 밖으로 나온 남자가 자신을 기다리다가, 수민이 친구와 크게 웃으며 극장 사람들을 조롱하는 걸 듣고는 말없이 사라져 버린 일은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날 이후, 수민은 극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주위를 살피고,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 꺼낼 ‘변명 거리’를 미리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날도 수민은 여느 때처럼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냥 「감각의 제국」을 보러 온 것뿐이야.’
주문을 외며 계단을 올라 휴게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실망했다. 휴게실엔 고작 두 사람만 앉아 있었다.
하나는 60대 노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긋지긋한 극장 죽도리 안 씨’였다. 둘은 시시덕거리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게이 극장의 휴게실 풍경은 극장 안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였다. 휴게실이 한산하면 극장 안도 썰렁할 확률이 높았다.
애초에 이곳은 영화를 보기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좌우에 사람이 없는 좌석에 앉아있으면 이윽고 누군가 옆자리로 온다. 슬쩍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고, 마음에 들면 그대로 앉아있다가 허벅지로 오는 상대의 손을 반기거나 먼저 상대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면 된다. 싫으면 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기거나 허벅지로 오는 상대의 손을 매너 있게 밀어내면 끝. 아무도 옆 자리에 오지 않거나 거절당했을 때는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휴게실로 나가거나 극장 뒷벽에 기대섰다. 그곳은 또 그곳대로 은밀한 접촉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였다. 휴게실이 텅 비었다는 건, 극장 안에도 ‘수민을 위해 남겨진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쳇, 오늘 뽕 따기는 글렀군.’
휴게실에 안 씨가 있다는 사실도 마이너스였다. 그는 수민이 극장에 올 때마다 매번 마주치는 인물로, 극장 안에서 수민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몇 안 되는 중년 게이 중 하나다.
잠시 과거를 회상해 보자.
따지는 것 많고 뭐만 했다 하면 뒷말이 재빨리 도는 통신 게이 모임에 아주 질려버린 수민은, 아무도 모르게 성욕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야한 소문이 도는 이 극장을 찾았다. 한 사람과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추구하는 수민의 친구들은 절대로 가지 않는 곳으로,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없다는 사실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수민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불편하고 낯설었다. 급히 상영관으로 들어갔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조명이 어두워 다들 실루엣만 보이는 공간임에도 무대 위에 홀딱 벗겨진 채 서 있는 기분이었다.
재빨리 빈자리를 찾아 앉은 수민의 옆으로,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끙 소리를 내며 붙어 앉았다.
그때 수민은 처음으로 '공공장소에서' 다른 게이와 성적인 접촉을 했다.
문제는 그 남자가 안 씨였다는 것이다.
만약 옆자리에 누가 앉았는지 확인할 여유만 있었다면, 그를 첫 경험의 상대로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텐데. 낯선 손길이 사타구니를 더듬는 순간 그냥 몸이 얼어붙었고,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짜릿한 쾌감으로 뒤엉킨 몸은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안 씨는 경험이 많았다. 수민의 반응을 읽고 능숙하게 행동했다. 극장 초보를 실컷 달아오르게 만든 그는 수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우리 나갈까?”
여관에서 가서 제대로 2차전을 하자는 말이었다. 그제야 수민은 옆에 앉아 있던 이의 얼굴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남자는 대머리에 뚱뚱했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번들거리는 피지와 땀이 고여 있었다. 씨익 웃는 입에서는 썩어가는 듯한 누런 치아가 드러났고, 역겨운 냄새가 풍겨 나왔다.
수민은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안 씨의 손안에 있던 성기가 채 바지 속으로 들어가기 전이었다.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다행히 이성은 남아 있었다. 그는 서둘러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어 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이런 데 다시 오면 인간이 아니다.”
불행히도 다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욕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결국 수민은 대책을 마련했다.
‘이제부터는 얼굴부터 확인하고 움직이자.’
물론 현실은 늘 예상을 배신했다. 아무리 주의 깊게 살펴도 극장의 흐릿한 조명은 판단을 흐트러뜨렸다. 극장의 어둠 속에 실루엣을 숨기면 누구나 조금은 멋져 보였다. 실제로 밖에서 다시 보면, 극장에서 받았던 인상과 전혀 딴판인 경우가 많았다. 안에선 분명 이목구비 또렷했는데, 밖에선 피카소가 다녀갔나 싶달까?
그럴 때마다 수민은 후회했고, 다시는 극장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이 오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극장 죽도리 안 씨는 언젠가 자기 이름 석 자를 말해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때 마침 스피커에서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터지는 바람에, 수민은 그의 성씨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 후에도 안 씨는 수민이 극장에 나타날 때마다 꼭 아는 척을 하며 집적거렸다. 수민이 이상형이라나?
처음 몇 번은 나이 많은 사람을 무시하기 미안해서 ―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첫 남자’였기 때문인지도 ―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냥 자리를 옮겨 피해버리는 쪽이 훨씬 편했다. 그럴 때마다 안 씨 얼굴에 스치던 실망의 기색에 살짝 죄책감을 느끼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싫어도 너무 싫어!
사실 게이 극장에는 이런 불문율이 있었다.
'한 번 거절한 사람은 귀찮게 따라붙지 않는다.'
죽도리인 주제에 안 씨는 자꾸 룰을 어겼다. 수민이 진짜 이상형이어서겠지. 그래서 더 싫었다.
오늘도 역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수민은 고개를 재빨리 돌리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우려한 대로, 극장 안은 썰렁했다. 평일이라지만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머릿수를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극장의 ‘핫존’이라 할 수 있는 뒷자리에도 서너 명이 벽에 몸을 기댄 채 다리 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냥 영화나 보고 가자.’
맥이 탁 풀렸다. 수민은 체념한 듯 입구 가까이에 있는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감각의 제국」의 동시 상영작은 이름조차 처음 듣는 싸구려 국산 에로물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수민의 시선에, 양복 차림에 서류가방을 든 30대 초반 남자의 실루엣이 잡혔다. 그는 극장을 한 바퀴 훑어보고는 넋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수민과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며 수민 옆자리에 앉았다.
‘좋아, 이제 좀 흥미로워지겠는걸.’
“평일 낮이어서 그런가 사람이 정말 없네요.”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한국 영화가 끝나고 휴식 시간이 찾아왔을 때, 수민은 옆자리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미 영화 상영 도중 야릇한 터치를 나눈 뒤였다. 평소 같았으면 손잡고 밖으로 나가 2차전을 치렀을 텐데, 남자 역시 시네필 감성을 가지고 있는지 「감각의 제국」을 보고 싶어 했다. 둘은 다음 상영작이 시작될 때까지 서로의 허벅지를 찰싹 붙인 채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직장인 같은데, 이 시간에 어떻게 왔어요?"
“원래는 퇴근하고 가끔 오는데, 오늘은 근처에서 볼 일이 일찍 끝나서 그냥 들렀어.”
그 말을 듣자 수민은 설명하기 어려운 안도감을 느꼈다.
“하긴 이 시간에 극장에 있으면 백수겠죠. 일 하는 사람들이 올 시간이 아니잖아요. 나야 방학이라 시간이 널널하지만.”
“죽도리만 있는 시간이긴 하지. 원래 평일 낮은 물이 별로라 안 오는데, 딱 취향인 영화를 해서… "
"앗, 저도 그래요. 사실 「감각의 제국」 아니었으면 안 왔어요."
"오늘 어쩐지 오고 싶더라니, 다 너를 만나려고 그랬나 봐.”
그 말을 듣고 수민은 어쩐지 오늘의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어른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되는 걸까? 수민이 또래만 바글거리는 통신모임보다 극장을 더 선호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나이 차가 나는 어른 남자를 좋아해서였다. 물론 안 씨 같은 중늙은이가 아니라 서른 정도 되는, 자신의 위치를 열정적으로 찾아가는 샐러리맨이 좋았다.
이윽고 극장이 다시 어두워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아이 씨발! 손 치우라고 했잖아!”
스크린에 감독 이름이 뜨자마자, 좌석 뒤쪽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수민과 남자는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한 실루엣이 누군가의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고 있었다.
“호모 아니라니까 왜 자꾸 따라붙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젊었다. 멱살 잡힌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인물 ― 지긋지긋한 죽도리 안 씨였다.
‘결국 사고를 치는군.’
수민은 혀를 찼다.
게이 극장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소동이다. ‘신호‘(보통 허벅지를 부딪치는 방식)를 보냈는데 상대가 이성애자 남자면 저런 일이 벌어지곤 했다.
처음 목도했을 때는 수민도 큰 충격을 받았다. 흥분한 일반 남자는 상대의 뺨을 때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온갖 더러운 말들을 쏟아낸 후에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때도 수많은 게이들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왜 게이도 아닌 놈이 이런 데 와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외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여기며 귀를 쫑긋거리며 드잡이를 구경할 뿐이다.
그날 수민의 가슴엔 이유를 알 수 없는 굴욕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남의 싸움에 끼어드는 성격도 아니었고, 왠지 이런 극장에선 자존심이나 정의감 같은 ‘고급스러운 감정’이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이후 몇 번이고 비슷한 일이 반복됐고 어느새 수민도 덤덤해졌다. ‘저 양반 오늘 일진이 사납네’ 하고 속으로 웃으며 곧바로 영화나 남자에게 집중했다.
‘오죽 못났으면 저런 일을 당하고 살까. 쯧.’
그렇게 수민은 게이 극장만의 작은 소란에 익숙해졌다.
뒤쪽에서 벌어진 소동은 점점 커져갔다. 무시하려 했지만 수민의 신경은 이미 옆자리 남자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사건의 주인공이 안 씨여서다.
“나잇살이나 처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젊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안 씨를 몰아붙였다. 얼마 되지 않는 관람객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봤지만, 언제나처럼 누구 하나 나서서 젊은 남자를 말리지 않았다. 안 씨는 어쩔 줄 몰라하며 연신 사죄의 말을 늘어놓으며 멱살을 풀려 노력했다. 극장 죽도리로 살면서도, 이런 일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상대는 그런 사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계속 고함을 질러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영화의 효과음과 뒤섞여 정확한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영화 보러 왔다가 느닷없이 당한 충격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소리를 질러댄 남자는 결국 밖으로 나가버렸고, 안 씨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수민은 마음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뭐가 그렇게 이해가 안 돼?”
남자는 처음 소리가 났을 때 힐끔 한 번 쳐다보고는 곧 고개를 돌려 영화에만 몰두했었다. 아마도 수민처럼 이런 일들을 너무 자주 겪은 나머지,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것 같았다.
“딱 보면 게이인지 아닌지 알 수 있잖아요. 눈만 마주쳐도, 표정만 봐도 느낌이 오잖아요. 이런 데 오는 일반 남자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사람한테 들러붙는 게이도 이해 못 하겠어요.”
수민의 말투엔 분노와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정확히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였다.
“그걸 어떻게 알아? 얼굴에 ‘나는 일반입니다’라고 써붙이고 다니나?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지.”
“나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상대 반응이 이상하면 금방 물러나야지, 계속 들이대고. 정말 바보 같아.”
수민은 안 씨에게 달려가 따귀라도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대 남자는 분명하게 “아저씨, 저리 가세요”라는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진드기처럼 들러붙는 버릇이 몸에 밴 안 씨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일반 남자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수민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 나갈까?”
옆자리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요? 영화 아직 다 안 봤는데.”
“영화 볼 기분이 싹 달아났어. 그냥 나가고 싶네.”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영화야 나중에 비디오로 보면 되지. 오늘 극장 분위기가 영 별로라.”
“아까 봉변당한 사람… 사실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수민은 갑자기 안 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일어나면, 안 씨가 자신을 볼 지도 몰랐다. 그 난장판을 보고도 가만히 있다가 태연하게 남자와 극장을 나서는 모습을 안 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수민은 괜히 신경 쓰였다.
남자는 수민이 안 씨와 아는 사이라는 데 관심을 보였다.
“죽도리처럼 여기서 살다시피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남자가 안 씨를 비난한 것도 아닌데 수민은 무심결에 그의 편을 들었다.
“자꾸 따라다녀서 귀찮을 뿐이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저런 일을 당하다니… 좀 불쌍하네요.”
남자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런 일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살면 극장 못 다녀. 기분이 찜찜하면 빨리 나가서 잊어버리는 게 나아. 네가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가자.”
수민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뒤통수에 안 씨의 시선이 꽂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안 씨는 수민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찝찝함을 떨쳐내려고 수민은 서둘러 상영관을 나섰다.
휴게실로 나오자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수민은 한쪽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그는 생각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마흔은 훨씬 넘어 보였고, 양복도 싸구려 재질의 후줄근한 데다가, 가방도 전형적인 길거리 영업맨의 것이었다.
수민은 극장에 온 것을 또다시 후회하기 시작했다.
추석이 벌써 꽤 지났네요.
추석 특집 단편은 이걸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