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그 애 06화

6. 보호자는 어른이야

by 차태주

보편적으로 그렇듯 토요일은 일주일 중 가장 기분 좋은 날이다. 특히 방과 후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는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오후부터 내일 저녁까지 쭈욱 이어지는 자유시간을 뭘 하며 보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토요일엔 종종 엄마가 비디오를 빌려보라며 500원을 줬다. 만화영화는 200원, 어린이용 특촬물은 300원이면 한 편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러면 남겨놓은 용돈 100원을 더해 드래곤볼 같은 만화영화는 3개를, 후뢰시맨이나 우뢰매 같은 특촬물은 2개를 빌려보곤 했다. 우연한 기회로 터미네이터2를 보고 어른의 영화에 눈 뜨게 된 10살 때부터는, 주로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를 빌려봤다. 일반적인 영화는, 발매한 지 3년 이상 된 건 500원, 3년이 안 된 건 1,000원, 신작은 2,000원까지 하기도 했다. 닌자 거북이나 배트맨, 로보캅 같은 히어로물을 좋아했다. 이연걸이나 성룡이 나오는 무협영화도 더러 빌려봤었다.

그날은 읍내에서 비디오를 빌려 볼 계획이었다. 엄마가 주신 500원으로 신작은 보지 못했지만 발매한 지 3년 이상 된 영화들을 빌려보기 시작하던 그땐, 토요일이면 무슨 영화를 빌려볼지 상상하던 게 수업엔 도통 관심 없던 12살짜리 머심애의 오전 일과였다.

이번엔 천녀유혼이었다. TV에서 방영하던 걸 몇 번 본 적 있었지만, 일찍 자라는 엄마의 성화에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두 남녀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토요일마다 빌리러 갔었지만, 워낙 인기 있는 영화였던지라 대여점에 도착했을 땐 매번 누군가가 빌려 간 후였다.

학교를 나서면서 이번엔 꼭 천녀유혼을 빌려오리라 다짐한 터였다.

“비디오 빌리러 가야 돼”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 걷던 그 애가 돌아봤다.

“응? 비디오? 뭐 볼 건데?”

학교에서 나와 터미널로 가는 골목 갈림길에 다다랐을 때였다.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대여점이 나올 터였다.

“천녀유혼...”

“응? 잘 안 들려, 뭐라고?”

그 애가 한쪽 귀를 기울여 다가왔다.

천녀유혼이라고 말하면 네가 알아듣기나 할까. 그건 너 같은 꼬맹이들은 감히 이해할 수조차 없는 고차원적인 어른들만의 작품이야. 하지만 나는 다르지.

“천녀유혼”

이라고 말하니, 이윽고 그 애가 알겠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아아! 너 그런 거 좋아하는구나? 하하하, 알겠어, 그러자”

흠... 천녀유혼을 알고 있는 건가. 의외였지만 일단 한시가 급하니 대여점으로 앞장섰다.

선명비디오. 읍내에 두 곳 있는 비디오 대여점 중, 좀 더 크고 버스터미널과 가까운 곳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 종업원 누나를 찾았다.

그 애에게 손목을 잡힌 채 내가 이끄는 이상한 모양새였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저어... 안녕하세요”

저쪽에서 만화책들을 정리하던 누나가 돌아봤다.

“어머, 오늘 딱 왔네?”

그리곤 그림이 퍽 요사스런 나와 그 애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훑어보더니 곧 싱긋 웃었다.

“네가 가끔 토요일 이때쯤 오니까, 혹시 오늘 올까 싶어 빼놔봤어, 후흣, 너 주려고 빼놓은 거다”

누나가 내 머릴 가볍게 쓰다듬고 지나쳐, 카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마음씨 곱고 예쁜 누나. 스무 살이 좀 넘었을까. 서울말 쓰는 걸로 봐선 아마 서울 쪽 사람인 거 같은데, 왠지 시골 비디오 대여점에서 일하는 것이다. 무슨 사연인진 모르지만, 크면 꼭 그 누나 같은 여자랑 결혼하고 싶다고 여러 번 생각했었다.

“감사합니다”

카운터 밑 어딘가에서 비디오를 꺼내 건네는 누나에게 500원을 내밀며 꾸벅 인사했다.

“월요일에 꼭 갖다줘”

그 예쁜 미소로 인사를 건넨 후 다시 만화책 코너로 돌아가는 누나를 뒤에서 훔쳐보다, 곧 대여점을 나왔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무척이나 한적하다. 집들이 모여있는 마을까지 어린아이 걸음으로 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그 길은, 종종 마을을 드나드는 차들이 지나다니는 거 말곤 인가도 사람도 없었다. 가끔 길옆에 뜨문뜨문 펼쳐진 논이나 고추밭 또는 사과밭에서 일하시는 마을 어른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날은 참새들이 짹짹거리며 날아다니는 거 말곤 어떤 인적도 볼 수 없었다.

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넓이로 시멘트를 울퉁불퉁 깔아 포장한 마을 입구 길은 몇 년 뒤 마을 뒷길을 콘크리트로 포장하기 전까진 유일하게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까진 온통 흙길이었다는데 그 흔적이 남은 건지 바람이 불면 길가에 펼쳐진 황토의 고운 흙먼지가 안개처럼 날리곤 했다. 가을이면 그 길가엔 강아지풀과 코스모스가 흐드러졌고 이따금 하얗고 가녀린 민들레 씨앗이 할랑거리며 날아다니기도 했다.

마침 봄바람이 하늘하늘 일며 어느 정도 자랐을 길가의 새싹들이 싱그러운 냄새를 풍겨올 때, 앞서가던 그 애가 갑자기 뚝 멈춰 섰다. 그러곤 잠시 뜸 들이더니 곧 뒤돌아보는 것이다.

“그 언니, 되게 어른스럽더라”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언제부턴가 그 애가 말이 없었다. 어디서 들었을 법한, 이상하지만 낯익은 그 콧노래 소리도 뚝 끊겼다. 아까 비디오 대여점에서 나오고부터였던가, 버스에서도 그랬고 집으로 걸어가는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그냥 걷기만 하다 별안간 저러는 것이다.

“어?”

“그 언니, 어른이지?”

그리곤 이상하리만치 눈을 치켜뜬 채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당연한 거 아닌가. 너보다 열 살은 더 먹었을 건데.

“그.. 치?”

뭘 궁금해하는 건지 의도를 몰라 그 애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뭔가에 기분이 상한 거 같은데, 그 와중에도 잡은 내 손목은 놓지를 않고 있다. 어쨌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그저 빨리 집에 가서 마침내 빌리는 데 성공한 천녀유혼만 보면 된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마음껏 돌려봐야지.

그 애가 잠시 흐음 거리더니, 이윽고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조금 더 빨라져 약간 끌려가는 모양새가 됐다.

그러다 갑자기,

“아니 근데!”

갑자기 그 애가 뒤도는 바람에 어깨끼리 부딪쳤다. 우린 서로에게 밀려 각자 넘어지려 하다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서로 맞잡은 손 덕분일 것이다.

“아, 미안”

지금 빨리 가서 비디오 봐야 하는데 대체 왜 이러나 싶어 짜증이 났다.

“아니 근데에, 보호자가 버젓이 옆에 있는데 왜 머릴 마음대로 만지는 거야? 그 언니 되게 웃기다”

보호자? 그게 뭔진 모르지만, 지금 자기가 보호자라는 말인가.

“보호자가 뭔데?”

그러니 그 애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보호자는, 어른이야”

“어른?”

이해가 되지 않아 그 애 눈을 보고 있으니 왠지 비장한 눈빛으로 더 다가왔다.

“아이를 보호한다는 뜻이야, 어른이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거잖아?”

부담스러워 뒤로 조금 물러났다.

아주 조금은 이해됐지만, 여전히 왜 지금 이런 얘길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진 모르겠다.

잠시 생각하다 다시 그 애를 보며,

“그럼 그 누나도 보호자가?”

그러자 그 애 표정이 구겨졌다.

“그게 아니지이! 보호자는 아이를 옆에서 지켜주는 가까운 사람이야, 가족이나 친척같이 믿을 수 있는 사람, 그 언니는 너랑 가까운 사람이 아니잖아”

약간 화도 난 거 같았다.

그 누나도 딱히 못 믿을 사람은 아닌데. 어쨌든, 은근히 쏘아대는 그 애에게 더 반문했다간 얘기만 길어질 게 뻔했다.

“아... 그렇나?”

“그렇지이!”

그 애가 다그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여주며 그 애 눈치를 살폈다.

그럼에도 아직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자꾸 흐음 거리는 것이다. 손으로 턱까지 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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