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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Oct 19. 2023

혼자 놀기

너무나 쉽고 몹시도 어려운 일, 혼자 있는다는 것

문득 시간 속에 던져지는 때가 있다. 

고의든 아니든, 자의든 아니면 어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든 간에 그럴 때를 간혹 겪는다.


혼자 있고 싶어,는 꽤나 낭만적이고 강렬한 욕망 같은 거지만 (상상으로) 실은 막상 혼자 있게 되면 마주치게 되는 건 당황스러움이다. 

더구나 갑자기, 혼자 있어야 할 때. 그것도 낯선 곳에서 혼자는 당혹스럽다. 겁을 먹게 된다고나 할까.


혼자 있는다는 것. 혼자 모르는 곳에 머물게 된다는 건 꽤나 그럴싸하지만, 실제 그렇진 않다. 나는 이걸 중년이 되고서야 알았다. 부산에서 공식적인 업무를 마치고 하루 혼자 놀기로 했을 때. 

그때는 작정하고 그랬는데도 그랬다. 너무나 많은 시간 앞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혼자 거리를 걷고 혼자 군것질을 하고 혼자 쇼핑을 하고 혼자 영화를 보았다. 혼자 돼지국밥을 먹었다. 그리고... 할일이 없었다. 

어느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를 때, 괜히 올라왔다 다시 내려가며 받은 전화. 저녁 먹자는 전화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바로 부산역으로 달려와 표를 반납하고 이내 출발하는 케이티엑스에 올랐을 때 들던 안도감. 

그때 알았지. 혼자서 뭘 해도 되고 뭘 하지 않아도 될 때. 적어도 나라는 사람은 그 거대한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는구나, 그런 생각.


오늘 제주에서 한나절을 혼자 보내야 했다. 동행하기로 한 지인이 급한 일이 있어 저녁 비행기로 합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혼자 버스를 타고 탑동으로 갔다. 

제주 버스는 전기버스라 토크가 좋은데, 그걸 감안하지 않고 마구 밟아대는구나 기사가. 그런 생각도 하며 관덕정에 내려 제주목관아, 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날아오르는 비둘기. 그런 걸 관찰하며 걷다 섰다 했다. 아라리오뮤지엄에 들어가 5층에서 지하까지 전시 중인 작가의 모든 작품을 꼼꼼히 바라봤다. 

백남준. 데이비드 호크니. 날리니 말디니까지. 모든 회화와 사진과 조각과 부조와 설치와 비디오들이 뒤섞여 뭘 봤는지 모를 지경이지만, 그래도 천천히 둘러봤다. 가능한 이해하려 해보고 사진도 공들여 찍으며.


그러고는 디앤디파트먼트. 살 것도 아니면서 프라이탁. 이솝 매장 구경. 그리고 에이비씨베이커리에 들어가 치즈바질빵을 사서 커피와 천천히 씹었다. 당근마켓에서 예약한 물건도 원격으로 받고(아들 시켜서) 세금도 카카이페이로 납부했다. 메일을 확인하고 SNS  피드에 글도 올리고... 

그러고 나니. 또 할일이 없네. 그래서 덕분에 이 글을 끼적인다. 블루투스 자판이 마침 내 앞에 있기 때문에.


동문시장에 갈 예정이지만 망설이고 있다. 가도 되고 안 가도 되고 선택권을 내가 쥐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든다. 시간은 지금 잘 가고 있는 건가. 시간을 버리고 순간을 소비하고 있는 중인가. 지인은 미안하다면서 혼자 자신과 친해지는 시간을 좀 가져보라 했다. 내가 나랑 친해지다니... 그 말이 신기하게 느껴져서, 제주북초등학교 담장길을 걸을 때 내 그림자를 보며 생각했다. 나와 친해진다는 것. 그 말이 정답게 느껴졌다.


빵을 느긋하게 씹고 커피를 천천히 들이키고 한자한자 타이핑을 하며 글을 쓴다. 전화를 다정하게 받고 날카로운 항의문자(세입자의)에 걱정하는 답신을 보냈다. 애고 불편하셨겠어요. 얼른 수리받으시고 영수증 청구하면 돈을 보낼게요. 평소 같으면 어림 없을 친절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 카페에 꽂힌 수백 권의 책 제목을 천천히 훝고 몇 권을 들춰보고, 지금 책장을 등에 지고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 너머 건물과 흐린 하늘, 그리고 슬쩍 보이는 수평선을 본다. 


지금 찰랑이는 제주바다가 코앞이다. 지금이다. 어느 때도 아닌 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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