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어느 때까지는 리스트가 계속 길어졌다. 두루마리처럼 돌돌 말아야 할 만큼.
지 발에 지가 걸려 철퍼덕 자빠진 직후엔 매 시간 하나씩 떠올랐다. 화가 나고 부끄러워 내 뺨을 내가 쳤다. 시간이 지나고는 하루에 한 개쯤 늘더니 차츰 한 달, 몇 달에 한 개가 불어나다가 멈췄다. 목록이 그쯤에서 그친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런 것들이 적혔다. 잘못한 결정, 미숙한 판단, 장고 끝에 둔 악수, 성급한 착수, 허접한 마무리, 나로 인해 다친 사람, 나를 믿었다가 실망한 사람 이름 같은 것들. 리스트는 잠복해 있다가 몸이 약해지면 공격했고 어중간하게 술을 마신 날 고개를 쳐들었다. 새벽 기습이 제일 무서운데, 낮에도, 심지어 아침에 괴롭히기도 했다. 그예 굴복한 정신은 내 지난날은 온통 잘못으로 점철돼 있다는 반성문을 매일 썼다. 자부(自負)의 시절 같은 건 기억 저어 멀리로 날려갔다.
얼마 전, 대책회의 개설 2주년 모임을 가졌다. 내 생일도 안 챙기는 사람이 그런데 감흥이 있을 리 없지만, 기념일 같은데 유난한 사람들은 어디나 있다. 그들의 기대를 충족해 주는 것도 배려다. 사람이 모이면 소속감, 결속감을 다질 이벤트도 필요하고. 마침 독서 모임 하나가 토요일에 있어서 날짜 조금 당겨하기로 했다.
그날, 나는 해 바뀌고 제일 많이 웃었다. 입 근처 잔근육과 목으로 웃는 게 아니라 복근으로 웃었다. 이렇게 웃은 게 얼마만일까 계속 생각하면서.
조금씩 취해가며 스무 명 가까이 모인 사람들을 카메라로 훑듯 바라보았다. 술집의 분리된 별채 작은 방에서 테이블을 가까이 모은다고 모았어도 조금씩 거리가 있었고 떨어져 있었다. 그 테이블 하나하나에 넷씩, 여섯씩 끼여 앉아 물개 박수를 치며 웃는 사람들, 분홍색 얼굴과 톤 높인 목소리로 농담을 하고 호응을 하는 이들.
하길 잘했다.
내가, 이걸, 만들길 잘했다.
마음이 부풀었다.
회사에서 마닐라 박스 공장까지는 삼십 분이 넘게 걸린다. 용달로 받아도 되는데도 아홉 시쯤 차를 몰고 가기로 했다. 드라이브 삼아 음악이라도 크게 듣고 싶었다.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고 블루투스 연결을 하고 딮 하우스 뮤직을 크게 틀었다. 장조의 멜로디가 묵직한 비트에 실리면 가슴께가 간질간질하고 아련한 기분이 된다. 네비를 켜고 앞산 터널로 향했다. 한 곡, 두 곡, 비트에 마음도 동조돼 기분이 고조된다. 고개를 까딱까딱, 손가락으로 핸들을 툭툭, 박자에 맞춰.
터널을 빠져나가자 시야가 탁 트이는 넓은 도로가 펼쳐진다. 눈이 시원하다. 마음도 쭉 펴진다. 세 번째 대책회의 오프라인 거점을 약속한 그제 미팅 생각이 났다. 대책회의를 어찌어찌 알고 그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했었다. 장소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진 않지만, 시너지가 클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든 만남이었다. 고개만 까딱 숙이며 인사하며 들어갈 때와는 달리 헤어지며 굳게 마주 쥔 서로의 손아귀힘을 느끼며 예감이 확신 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운전하는데 마음이 동동 뜬다. 숙고할 일은 남았겠지만, 오랜만에 든 이런 기분은 충분히 음미해도 좋다. 이젠 뭐든 유예하지 않으려 한다. 언제 또 느껴볼지 기약도 없는데, 만끽하자. 뭐라도 되겠지.
물건을 다 싣고 박스 업체 사장과 묵례를 했다. 공장을 빠져나와 한적한 갓길에 차를 세웠다. 볼륨은 조금 줄이며 창문을 내리고 담배를 물었다.
가슴 터질 듯 뿌듯했던 순간, 한껏 행복했던 순간, 크게 소리치고 싶던 희열의 순간, 성공이 손에 잡힐 듯했던 성취의 순간, 고마운 사람 때문에 눈물이 맺혔던 순간이 고운 깃털처럼 머릿속을 폴폴 떠다니기 시작했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심장이 콩콩 뛰고, 들숨에 사레들린 듯 호흡이 가빠졌다. 몰린 피가 얼굴을 조여와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들썩이면 깃털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빨지도 않은 담배의 긴 회색재가 툭 떨어졌다.
내가 나여서 좋았던 때가 아스라이 기억났다. 너 아직 거기, 그 아래 어디 묻혀 있었구나. 사라지지 않고. 쓸려가지 않고.
그동안도 내가 가끔 밝을 때가 있었다, 주로 좋은 사람들과 술자리에서였다. 예쁜 조명처럼 내가 반짝였다. 자리가 끝나면 여지없이 조명은 꺼지고 나는 또 두루마리 리스트로 두드려 맞았다.
담배를 끄고 시동을 걸면서 알았다.
내가 나여서 뿌듯했던 때를 되찾은 느낌에 마음이 환해졌다는 걸.
조명등의 반짝임이 아니라 해가 만든 여명 같은 환함이란 걸.
대책회의가 만든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