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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삶을 전원에서]

{아웃사이더의 종착역}


누구나 처음은 미약하고 소득이 별로 없는 이유를 찾아 반성하고 아파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능숙한 기술자 없고 시작부터 유명해진다면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할 여지가 매우 높다. 사다리를 올라가는 일은 한쪽 발이 땅에서 가까워야 하며 또 견고한 이유가 뒷받침될 때 높이 오르는 길이 다져질 것이다. 필자 스스로 고개 넘어가는 길이다 보니 깨닫는 일이 새삼 새로운 것들로 느끼는 요즈음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젊은 날을 지나 장년의 분주함 그리고 닥쳐오는 노년의 길에서 새로운 도전이란 말은 너무나 버거운 일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일이 곧 노년의 마지막과 연결되는 줄에 이어졌기 때문이다. 젊어서의 일이 이어진 삶의 일이고 또 늙어서도 그런 일이 마침표를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방향 전환의 일은 매우 희소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이유는 타당한 일이 아닐까?

사실 필자의 글쓰기 그리고 전원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이 지금도 유효하기에 아직도 왕성한 진행은 하고 있지만, 아직도 더욱 많은 것을 써야 하기에 전원을 가서라도 줄기차게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에 사실 마음은 조급증이다.


사실 다소 늦은 글쓰기이지만 은퇴와 더불어 전원에서 다시 글로 길을 넓히는 일이 하나의 생활이 될지언정 글과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신을 하지만 사람 앞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간의 일인지라 그 속도를 따라잡을지는 글쎄올시다.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일이 숫자로만 것이 자랑은 아니기에 나를 시험하는 일로 하루하루 재미로 살아가려 노력하려 한다. 타인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고독을 위무(慰撫) 하기 위해 글과 맞붙어 살고 있기 마련이다.


세상의 진행은 모두 이유가 내재해 있다는 점이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고 결과가 원인을 만들 합리가 되지만 필자는 나를 스스로 위촉하는 성적으로 인해 나서기보다는 오히려 나 스스로에 혹사를 가함에서 즐거움을 갖는 성격이기에 누구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시를 그리고 또  칼럼, 시평 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쓰려고 한다.


사는 일에 가정법이란 불필요한 것이지만 그런 생각은 결국 오늘을 합리로 이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만 오늘을 위안하는 일은 곧 현재에 만족을 갖고 살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떻든 나는 많은 글을 요즈음 왕성한 필력으로 그리는 중이다.

물론 전원으로 간다는 다소의 기쁨도 있지만 사실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는 실험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2022년도 12월에 안성을 떠나 이천으로 나의 삶의 보금자리를 옮긴다는 마음이 평소답지 않게 흥분은 되지만 전원 속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급적이면 타인에게 베풀면서 버거운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 필력을 시험하려 하는 것이다.


이제 좌고우면 할 시간도 없으며 특별히 성을 쌓을 일이 없기에 신명을 발휘하는 글에 내 삶을 투척하는 일도 어쩌면 행운일 시 분명한 것 같다.

내가 내일에 자긍심을 갖고 하는 일이기에 다작은 못되지만 위안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렇다 온종일 책상 앞에서 글을 짜내는 일이 달리 보면 웃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2023년이 얼마의 글이 써질지 추리하는 내 머리에는 신화의 그물을 치고 싶어 진다.          

여전히 앞으로 가는 보행은 건강하기에 더욱 왕성해질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제는 초조의 마음을 안 가지려 한다. 지금까지 직장이나 모임에서 등등 남보다 더 치열성으로 앞서 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초조를 달고 살았다.

이제 욕심을 부린다면 추하고 덫에 걸린다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체념의 순간도 빨라야 하며 망각의 일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조짐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부족에 만족을 아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왜 그런가 하니 갈증 현상은 더 많은 에너지의 공급을 위해 노력하고 겸손하고 고개 숙이는 삶의 동력을 갖는 이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말수를 줄이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앞으로 나의 삶이 전부가 아닐까 하면서 가는 것은 순식간이고 다가오는 것 또한 그렇거늘 이 중심에 선 존재자의 자세는 더없이 중요한 몫을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종국에는 자기의 현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적정의 수위를 유지하면서 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에 만족을 가질 줄 아는 일이야말로 만족을 채울 줄 아는 지혜라는 뜻이다.

돌아보면 젊은 날의 패기 있고 사치스러운 지난날들의 기억이다. 무조건 남의 말에 끼어 내 말이 옳다.라는 주장이 얼마나 상대방을 곤란하게 느꼈을지는?

이제 전원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서 고독의 목록을 이겨야 한다는 숙제가 한 가지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무작정 독파한 독서가 내 삶의 모두를 위로하는 목록일 것이기에 이제는 글을 쓰는 일이 주된 시간의 소일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결국은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의 처지에 소화제와 같은 구실을 다함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저녁을 먹고 서재로 올라와 다시 글 줄기를 이어가는 내 일상은 어쩌면 배고픔을 기다리는 일과 별반 다름이 없을 것 같을 때 허기는 일상적인 명제로 남는 것이 글과 배고픔은 어쩌면 전원에 가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보면서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흔들리는 갈대”의 숙명을 타고난 존재라 했듯이 이성의 불을 켜고 곧게 산다는 명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기 수련 혹은 중심 잡기라는 숙제를 처리하는 신념이 우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련을 시련이라 느끼지 않으며 지속으로 다가오는 현실을 수용하면서 이를 극복하는 일은 방심할 수 없는 나의 발견이라 생각하며 그 발견이 있다면 바람이 오면 바람을 따르고 물이 차면 비우는 일이 우선이고 때 묻은 일은 한사코 거부하는 생리적 몸짓에서 내 삶의 그림자가 흔들릴 때면 집 앞에 연못에 떠 있는 마음을 잡아주는 연꽃에 마음을 묻으면서 살리라고 다짐하면서 이 밤에 달빛이 보고 싶은 충동조차 아름답다.


2022. 10. 30.


금요 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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