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전국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미래수업을 하며 1만여 명이 넘는 청소년들을 만났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2016년, 서울 S중 남학생들과 함께 한 시간일 것이다.
처음으로 맡은 두 달 간의 장기 수업이었고, 처음으로 맡은 남자 중학교였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생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수업이기도 하니까.
세종으로 내려간 연구원이 주로 정책연구 분야에서 미래연구를 활용해왔다면
새로 들어간 민간 미래연구소에서는 교육분야와 미래연구를 접목시키고 싶어 했다.
이러한 비전은 나를 설레게 했는데 미래연구가 청소년 교육에 큰 시너지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연구원에 있는 동안 20~50대를 대상으로 미래워크숍을 진행하며 10대를 위한 미래워크숍이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박사님과 함께 고등학생 대상 미래워크숍을 몇 번 진행하면서 그에 대한 가능성을 꾸준히 보고 있었고, 횟수나 규모를 늘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세종으로 내려간 박사님과 처음 만난 곳도 제1회 청소년 미래워크숍이었고 그걸 계기로 미래연구 분야를 알게 되었으니 청소년 대상 미래수업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다.
그렇게 새로운 연구소에서 교육 관련 사업을 준비했고 그 결과 서울에 있는 초중학교에서 8주간의 미래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내가 담당한 학교가 S중이었던 것이다.
정식 수업시간에 진행해야 하는 만큼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걱정보다는 설렘이 컸다. 이 재미있는 수업을 함께 나눌 수 있다니, 기쁘지 아니한가.
내가 맡은 학생들은 20명 정도였는데 각 반에서 자원하여 온 1학년들이었다. 같은 반끼리 모인 게 아니다 보니 서먹한 분위기가 흘렀다. 서먹한 남학생 무리에 서먹한 30대 여자 선생님이 함께했으니 돌아보면 정말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저 신났고, 서먹함도 소중했고, 의욕이 넘쳤다.
학생들이 모두 호의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분명 까칠했던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 그땐 왜 그게 힘들지 않았을까?
14살 아이들과 마주한 순간 나는 나의 14살이 떠올랐다.대단한 반항아는 아니었지만 결코 교사를 존중하지 않았던 중학생 시절의 나. 그리고 그 이유가 교사 개인이 미워서라기 보다는 나의 사적인 문제와 세상 전체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어른이 된 지금은 알고 있다. 다시 말해 나에게는 '교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중학생'이란 당연한 것이었고, 때문에 마음을 열어주는 학생들이 너무 신기하고 고마웠다. 되바라진 중학생 시절을 보냈던 것이 20년 후 커리어의 지혜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서먹하고 나름대로 호의적인 남자 중학생들과 미래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공통 커리큘럼이 짜여 있었지만각각 개성이 넘치는 학생들에게 맞춤 피드백을 해주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애초에 미래수업 자체가 토론과 의견 나눔이 중심인 만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아이디어를 수용해야 하는데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학생들마다 반응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똑같이 수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표현 방식이나 속도가 천차만별이었달까?
끝을 열어두고 수업을 한다는 것은 강사에게 많은 순발력을 요구한다. 돌아보면 퍼실리테이터의 기본 역량을 익히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들과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거기에 의미있는 결과물까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가르치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서 미래에 대해 다양하게 고민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2시간 수업이 끝나면 배가 너무 고파 보조 선생님과 커피 한 잔에 케이크 한 조각을 꼭 먹어야 했지만.
당시 수업의 부제는 '미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였는데 여권 형식의 워크북이 제작되어 교재로 쓰였다. 학생들의 결과도 확인하고 잃어버리는 것도 방지하기 위해 매번 워크북을 걷었는데, 집으로 가져가 학생 개개인에게 쪽지 형식의 편지를 남겼다. 꽤 품이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학생들은 그에 대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성장드라마였다면 좀 달랐겠지만, 내가 서 있는 곳은 현실이었고 S중 학생들도 평범한 현실의 남자 중학생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업을 재미있어하는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래는 정답이 없다는 것. 때문에 작은 의견도 의미가 있다는 것. 타인을 존중하는 범위 안에서는 무엇이든 발언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유로운 수업방식에 점차 익숙해 갔다.
동시에 다양하게 자기표현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툴도 마련되어 있었다. 글쓰기, 그림그리기, 콜라주, 역할극 등 스스로에게 편한 방식을 선택하여 생각과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 커리큘럼은 이것 저것 만들기 좋아하는 14살들에게 재미있는 놀이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맘껏 떠드는 걸 허용하는 수업이었다. 그것 하나 만으로도 학생들은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 같았다. 침묵. 공포 분위기. 권위에 눌려 무기력한 학생들. 내가 겪었던 중학교 시절과는 정 반대의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꼭 도달해야 하는 목표를 버리고, 학생들이 미래와 재미있게 놀도록 해주는 것. 나였다면 재미있어했을까? 반항적이었던 14살 소녀를 떠올리며 수업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현실 남자 중학생들은 특별히 아름다운 존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결코 아름답지 않은 존재도 아니다. 분명한 건 어른들보다는 훨씬 열려 있다는 것이었고, 나는 그들을 애정 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한 건 'S중의 남학생들'이라기보다는 중학생이 가진 말랑말랑한 가능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들과 나, 모두에게 향했다. 나를 바라보는 14살 소년들의 모습을 통해 14살의 나를 발견하곤 했으니까.
8주, 8번의 수업을 마치고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었다. 성장드라마였다면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많이 웃었다. 자주 엎드려 있고 수업에 소극적이었던 H가 멀리서부터 짐을 들어주겠다며 달려온 날이었고, 매 수업마다 눈을 반짝이며 참여하던 K가 감사 편지를 준 날이며, 워크북 사이에 힙합 가사를 고이 접어 넣고 읽어 주기를 바랐던 Y는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며 아빠의 DSLR 카메라를 가져온 날이었으니까. 재미있고 유쾌했다. 과자를 먹으며 지난 수업의 사진들을 공유하는 시간. 어느덧 아이들도 수업의 마지막 날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하기 전, 기타를 꺼냈다.
팬도 아니고, 내가 싱어송라이터라는 것도 모르는 남자 중학생들 앞에서 무슨 용기로 노래를 부르려고 했을까? 마이크도 없는, 서먹한 교실에서, 누구도 모르는 노래를 말이다.
시작 전 이런 말을 했다.
나도 내가 이런 어른이 될지 몰랐다고. 그런데 되고 나니 나름 재미있더라고. 미래연구를 하며 중학생을 만나는 것도, 노래를 만들어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것도, 떨리지만 재미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14살의 난 꿈이 없었고, 그럼에도 망하지는 않았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린 나도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