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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Sep 12. 2022

2인 1 묘 가구 홍콩 생활 시작

어쩌다 홍콩

어쩌다 보니 이젠 홍콩이다. 자카르타로 이사는 어쩌다 취업이 되면서 갑작스레 결정됐지만, 홍콩으로 이주는 펑씨와 함께 미리 차근차근 준비했다.


2인 1 묘 가구의 홍콩 이주는 펑씨 -> 피비 (우리 고양이) -> 나 이렇게 차례로 이뤄졌다. 사람이 움직이는 것보다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든 것은 우리 고양이 피비의 이주였다. 홍콩은 광견병 관리가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엄격한 것으로 악명 높은 도시라 한국에서 출발하는 개고양이들은 무려 4개월이나 홍콩 정부가 지정한 시설에서 격리해야 한다. 네이버 검색 결과, 중국 본토로 먼저 아이들을 보낸 뒤 육로를 통해 홍콩으로 건너가는 어둠의 경로도 있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적법한 절차를 따르기로 했다. 피비를 위험한 상황에 내몰 수 없다. 신림동 길냥이 출신 삭막한 서울에서도 살아남은 우리 피비는 할 수 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정부 격리 시설에 대기가 길어지면서 지난해에 대기 신청을 걸어둔 뒤 한참을 기다렸다가 6월에서야 겨우 피비 혼자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맴찢..) 피비가 홍콩으로 떠나는 날 반차를 쓰고 인천공항으로 갔다. 펑씨가 홍콩으로 떠날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피비가 케이지에 실려 화물칸으로 넘어갈 땐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 정부 격리 시설이 우리가 사는 집 근처에 있어서 펑씨가 거의 매일 방문했다는 것 2) 시설이 생각보다 좋다는 것 3) 씩씩한 피비가 잘 견뎌주고 있다는 것이다.


피비보다 앞서 홍콩으로 간 것은 펑씨였다. 펑씨는 먼저 홍콩에 취업해 3월쯤 먼저 떠나 기반을 닦았다. 나는 한국에 회사 일을 끝내고 박사 과정이 시작하는 8월 말쯤 날짜를 빡빡하게 맞춰 홍콩으로 완전히 이주했다. 때마침 휴가를 쓰고 한국에 와서 나와 같이 짐을 싸준 펑씨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도 서울에서 짐을 싸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우리가 홍콩으로 가는 시기에 홍콩 정부가 7일이던 의무 호텔 격리를 3일로 줄이고 4일은 자가 격리로 전환하는 바람에 호텔 격리 비용이 생각보다 줄어들었다.  


공식 격리가 해제되자마자 나는 피비가 있는 격리 시설로 갔다. 3개월 만의 상봉. 내가 자카르타에   우리는 최대 4-5개월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피비는 그때마다 나를 알아봤다. 어떨  곧바로 알아봐 주었고, 어떨   시간이 걸린  천천히 곁을 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비가 나를 바로 알아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홍콩행 대한항공 비행기 화물칸을 혼자 타고 다른  고양이들과 씩씩하게 여행한 피비! 인간의 시간으론 4개월이지만, 고양이 시간으로 2년이 훨씬 넘는 시간을  견뎌주고 있는 용감한 고양이 피비!  주고 똥치우러 피비 방에 들어가는 격리 시설 스텝들을 하악질을 해서  쫓아내는 겁쟁이 고양이 피비!


기분이 좋으면 배를 보여주는 피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땐 높은 곳으로 간다!


내 예상대로 피비는 나를 바로 알아봐 주었다. '왜 이제 왔냐'며 나를 혼냈다가 내 옆으로 와서 배를 보여주고 내 몸에 문지르며 다시 영역 표시를 했다. 밥도 잘 먹는 모양인지 어떤 날엔 내 앞에서 똥을 네 덩이나 싸기도 했다. 고양이는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면 다 적응한 거라고 했는데 피비는 오래전에 홍콩 생활에 적응한 듯했다. 피비를 보면서 나도 홍콩에서 새 삶을 개척할 용기를 얻었다. 다섯 살짜리 신림동 출신 K-냥이도 해냈으니 집사도 힘을 내 홍콩 생활에 적응해야겠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새로운 시작이 무섭고 두렵다. 영국에 갈 때 제일 용감했고, 자카르타로 이사 갈 땐 망설였고, 홍콩으로 올 땐 더 걱정이 많아졌다. 성조가 9개인 광둥어를 배울 생각을 하면 더 가슴이 쪼그라든다. 그래도 용기를 줘서 고마워 내 고양이, 피비야!  


서울 집에서 짐 싸면서 챙겨 온 피비 친구 물고기!


  

하몽?


홍콩 센트럴 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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