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에
전북에서 가장 큰 소방서의 행정직 직무 인턴을 하고 있다. 소방서 내근직 보조로 일하는 데에 있어 책임을 지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그토록 이 유니폼을 입는 것을 꿈꾸며 책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인데 말이다. 그렇기에 소방 관련 학도로서 이렇게 소방공무원의 모습을 가깝게 볼 수 있는 게 참 좋은 기회라 여긴다.
그리고 가장 감사한 것은 이런 미래로는 살고 싶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
이것이 가장 좋은 신호라 여긴다.
이것은 내 길이 아니라 여기는 것에 깔끔하게 포기할 줄 아는 것, 그로부터 선택과 집중을 할 줄 알게 된 것, 더 나아가 나는 나를 위해 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각자 위치에서 일하는 모두를 존경하지만, 그보다 깊은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는 분들은 아무래도 소방시설관리사를 취득한 분들이다. 주임(소방위) 급들 중 30~40명 정도가 있는 작은 사무실에 두 분이나 소방시설 관리사를 취득하셨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8월 인사이동으로 인해 운 좋게 관리사 자격증을 갖고 계신 분 옆에 자리를 앉게 되었다. 소방 관련 학과를 다니기에 소방시설관리사가 되는 길이 신혼여행에서 아내 대신 화재안전기준을 안고 잤다는 둥 얼마나 쉽지 않은지 들었고 실제 준비하는 이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기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관리사를 취득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공무원일을 하고 계시는지. 또 주변의 서포트는 어땠는지 그 균형은 어떻게 맞췄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이 물음이 끝나자마자 하,, 참 할 말이 많은데,, 로 말씀을 시작해 주셨다.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연차가 쌓이는 것은 뒤로하고 가족 때문이라는 점이 혼자의 몸이 아니기에 함부로 결정할 수도 없고, 전북은 포화상태라는 점. 내가 부양해야 하고 내가 기둥으로 있는데 내 선택으로 인해 내 가족이 손가락을 빨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끔찍할까. 지금의 내가 이렇게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한편으론 감사했고 이 시가를 그냥 보낼 수 없을을 실감했다.
지금 너는 인생의 황금기잖아. 원하는 게 있으면 다른 것 다 포기하고 몰입해야지, 선택과 집중을 해야지.
"관리사를 10년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어, 그런데 그런 분들은 주식을 하시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하셔, 그분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다 포기하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난 두 번은 시험 안 봐, 첫 번째 준비할 때의 시간이 버려지게 되잖아, 그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 일이야.." 그 아깝다는 말 뒤의 짙은 씁쓸함이 느껴졌다. "후회 남지 않게 공부하고 돌려보면 본인이 얼마나 공부한 지 알잖아, 그 정도에 만족하나 못하냐 그것은 본인이 알고 있지" 현재 내가 국가기술 자격증 3차 준비를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 해 주신 것임을 알고 해 주신 말씀이라 그런지 진부한 이야기임에도 가슴에 묵직하게 팍팍 눈을 통해 전해졌다. 정작 나는 기출 변형처럼 시험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것에 제대로 집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이 내 마음에 떠오르기는 했지만.
나는 어디에 하루 10~12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인가?
어떤 것에 그렇게 고도의 집중과 몰입 상태로 빠져해 볼 수 있겠는가?
1년 전체를?
그 물음에 바로 요가가 떠올랐다. 진정한 아쉬탕기 처럼 매일 정화(크리야) 하고 아쉬탕가 시리즈를 하고 명상을 하는 삶. 인도에서의 강사과정을 진행할 때의 삶처럼 다시 스케줄을 내서 살아 볼 수 있을까? 분명 쉽지 않음이 느껴지지만, 또 가슴이 떨리는 일이다. 이렇게 답을 바로 할 수 있다는 것에도 참 기쁘고.
20대가 참 큰 성장폭을 만들어내는 시점이 아니었는가 하고 돌아본다. 고작 만나보거나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의 폭이 고작 1~2년 차이나는 선배 정도의 수준에서 교복을 벗고 나이 차이가 많으면 10년이 나는 사람도 만나고, 동아리나 대 내외 활동으로 네트워크의 반경이 중고교 시점과는 비교 불가한 폭으로서 넓어지는 시점. 주변 또래들 혹 이전까지 맺어왔던 인간관계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하는 뚜렷한 성장 포인트. 이 반짝이는 시기를 누군가는 큰 폭의 성장으로 또 누군가는 큰 폭의 하락으로 가져갈 수 있기에 어른들이 그렇게 대학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았다. 이제는 그랬던 그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또다시 본인과는 큰 격차의 사람들과 그룹에 들어갈 수 있는 시점인 20대 후반이 찾아왔다. 그렇다면 지금 서른을 코 앞에 둔 나는 이 뚜렷한 시점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대부분은 흐름에 타 있지만 주변의 몇몇은 혹은 건너 건너엔 극단적인 결정을 한 친구에 대해 소식을 전해 듣기도 하고 그만큼 이제는 극한의 점프 성장을 한 사람들이 생기기도 하는 시점.
내 앞에 도약대가 있다 뜀틀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도약대뿐. 여기서 나는 보이지 않는 앞이 두려워 고꾸라질 것인가, 혹은 그 도약대를 일단 있는 힘껏 뛰어오를 것인가.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사람의 유한한 기억 보따리 속 인생에서 나를 기쁘게 만들고 더 좋은 추억으로 채울 수 있던 것들의 기저에는 ‘과감함’ 이 있었다. 또한 내 인생에 언제나 짙은 아쉬움을 동반한 후회를 남겨준 것은 과감함의 부재였다.
지금 내 과감함은 어디에 있을까, 파랑새처럼 앞에 두고도 몰라보거나 일부로 시선을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 급류 위에 올라 타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 없음을 안다. 늦췄다가는 저 앞의 폭포 같은 낭떠러지가 나타날 것을 알기에. 이 급류 위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싫어서 피터팬은 네버랜드에서 시간이 똑딱똑딱 가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던 것일까? 그것 또한 동감한다. 내가 주인공인 성장물이라면, 장르를 선택해 골라 잡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뻔하면서 , 게임이라면 그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성장하려고 할 것이면서. 왜 실제 주인공인 내 삶 속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은 걸까. 게으름일까? 젊은 노인이 되어있는 것인가?
당신이 작성하는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있다.
손에 무엇을 쥐어 줄 것인가?
무슨 임무를 줄 것인가?
나는 이제 뭘 쥐어 줄 것인지, 무슨 임무를 줄 것인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