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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t Seasons
by Sustain Life Nov 07. 2018

가을을 닮은 식탁

삼색 파프리카 초밥





  


  은연중 고백하였듯, 저는 가을보다는 여름을 찬미하는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단 하나도 겹치지 않는 채도의 초록 잎사귀, 미풍, 밤의 열기, 손대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과일과 야채, 그리고 또다시 불어오는 희미한 바람. 아직 더 나열할 수 있어요. 시간과 읽는 사람의 인내심만 주어진다면. 쓰다 보니 여전히 여름을 사랑하고 있군요.


 

 

  그러니까 다시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틀 전 마주한 가을의 세계는 왠지 아름다웠습니다. 아니, 정말로요. 강원도 영월을 향해 달리는 국도와 고속도로의 경계 부근이었고,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선회하는 바람은 나뭇잎을 춤추게 했어요. 일찌감치 잎사귀를 떨궈내 버린 앙상한 나뭇가지는 가을의 변주곡 속에 그대로 다채로운 풍경을 선사해 주었고요. 무엇보다 각자의 색을 끄집어낸 이 세계의 엽록체들, 온갖 색으로 물든 산세 틈에서 여름 속에 차마 보이지 않던 시커먼 계곡은 온갖 색을 머금고 더욱 깊어만 가고, 화폭 속에만 존재해 왔던 고대 산수화의 전설과 상상력이 불현듯 튀어나오는 듯했습니다.



  이토록 새롭게 맞이한 가을날의 여운은 왕실의 정원으로 발길을 이끌었습니다. 창덕궁 후원이요. 걸으며 종종 영감을 떠올릴 때도 있지만 이 공공연하게 비밀스러우며, 신령스러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스름 없이 자연과 어우러진 궁궐의 뒤뜰은 도시인들의 현대판 소도蘇塗, 잡념의 진공, 일상의 성역과도 같은 아우라를 넌지시 풍겨내고 있었습니다. 절대 뽐내지 않고요. 오후의 역광에 반사되어 나풀대는 어떤 나무의 반투명한 잎사귀는 레몬 크림색으로 빛났고 여느 단풍나무들은 적과 녹의 절정을 대조적으로 시신경을 자극시켰다 풀어주기를 반복했습니다. 빛나는 춤을 추며 생의 절정을 소진시키는 여느 단풍나무들과는 다르게 일찌감치 갈변한 마른 잎사귀를 바스락이는 고목나무들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길 뿐이었고요. 




쓰다 보니 길어졌어요. 원래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우연히 식탁에 올린 어떤 날의 밥상이 가을을 닮은 듯하여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버렸어요. 휴.



그러니까, 원래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와서요. 어쩌다 보니 밥상을 차리게 되었는데 그게 마침 가을의 색과 닮아 있더라는 거죠. 삼색 파프리카와 가을의 제철 식재료를 곁들인 알록달록하며 농후한 한 그릇이요.



사실, 파프리카는 자주 가는 마트 한 편 늘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까닭에 계절감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왼쪽 문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야채 가판대 바로 윗부분에요. 시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정도로 여름철 수확량이 많구나, 짐작할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추의 단풍과 함께 물들어 가는 식탁을 마주하니 파프리카가 새삼스레 가을과 어울리는 건 기분 탓일까요.



눈 대강으로 썰어 오븐에 구울 겁니다. 얄브리한 껍질을 벗겨내고 아삭한 식감은 부드럽게 변형되겠죠.



바로 이렇게요. 껍질은 검게 타도 속살은 더욱 짙게 빛나는군요. 아마도 달콤한 맛이 날 겁니다. 왜냐하면 코끝으로 벌써 달콤한 파프리카의 향이 맴돌고 있거든요.



파프리카 손질이 일단락되었다면 이번엔 밥을 맛있게 버무릴 차례예요. 아마도 심심할지도 모를 파프리카 초밥의 감칠맛을 끌어내기 위해 새우도 다지고 계란도 고슬고슬하게 부칩니다. 고소한 깨도 뿌리고요.



아! 파프리카를 굳이 올리지 않더라도 쓱싹 비벼 먹고 싶어 지는걸요!



솜씨는 없지만 어디선가 눈대중으로 익힌 초밥 장인의 제스처를 흉내 내어 봅니다. 주먹밥에 가깝지만요. 하하.  



흡사, 참치 뱃살과도 같은 붉은 파프리카 구이 한 조각을 밥 위에 얹어 봅니다.



아쉬운 마음에, 가을 속에서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버섯과 진주빛으로 속이 꽉 찬 연근도 계란물에 살짝 부쳐 냅니다. 이대로 도시락 통에 넣어 단풍놀이라도 갈까 봐요.



새삼스레 마음속으로 다가온 가을, 조금은 느긋해진 것 같지만 서두르는 마음은 여전하고.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 합니다. 반동 기질도 한결 같아요. 솔직한 것도요. 독서를 해야겠다 마음먹은 건 봄 무렵이었는데 책 한 권을 완독 하지 못한 건 좀 수치스럽네요. 아, 요가는 지속적으로 하고 있어요. 피아노 실력은 조금 향상된 것 같은데 조성진의 연주를 들으면 안분지족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돼요. 미셸과 꼬망은 여전히 귀엽고 새로 꾸린 스튜디오에서는 새로운 일들이 시작될 것만 같아요. 벌써 겨울이 온 것 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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