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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Life Jun 19. 2021

내가 훔친 여름

장보현의 일상 이상 x 29cm WEEKLY ESSAY




미풍을 타고 흩날리는 은은한 라일락 향기는 봄의 종말을 암시한다. 처마 끝을 타고 떨어지는 빛의 각도는 미세하게 날카로워졌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은 새벽녘에 접어들었다. 고양이 미셸은 확연히 달라진 사물의 온도를 가장 먼저 알아챘다. 평소 잠을 청하던 침대 가장자리를 벗어나 드넓은 안채의 소파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모든 게 초록으로 빛나는 시절 속에 발갛게 흐드러진 여름이 고개를 치켜올리려 한다. 태양이 무자비한 뙤약볕을 내뿜기 전, 서둘러 옥상 정원에 올라 한껏 부풀어 오른 풍경과 대기의 질감과 그 싱그러운 향내를 감각한다. 따사로운 봄볕에 귀엽게 돋아난 신록은 오뉴월 호시절을 타고 넓은 잎사귀를 드리우고서 온갖 채도의 초록으로 빛난다. 나의 작은 숲은 아침노을에 반사되어 수줍은 다홍빛을 머금고 미풍에 나부낀 청량한 속삭임을 튕겨낸다. 간밤 내린 빗줄기에 통통하게 물이 오른 허브를 줄기 째 뜯는다. 잎사귀에 손이 닿을 때마다 짙은 여름의 향기가 증폭된다. 비로소 여름이 와닿는다. 이것이 여름일까? 





벌겋게 물든 새벽빛이 순식간에 걷히고 투명에 가까운 아침 햇살이 유유히 마당을 선회한다. 고양이들은 조각난 빛을 따라 자리를 옮기며 몸단장에 여념 없다. 볕으로 샤워를 즐기는 고양이 털 뭉치 사이로 여름의 향기가 스민다. 나는 미셸의 몸뚱이에 코를 파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무향 무취의 태양의 잔상이 폐부에 닿으며 여름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 또한 여름일까?       



볕은 어느덧 안채를 비춘다. 사방으로 쏟아지는 여름의 빛은 그 어느 시절보다 차고 넘친다. 창가에 비친 담벼락은 서서히 춤을 추기 시작한다. 담장을 휘감은 능소화 덩굴이 바람에 나부끼는 형상이다. 한데 엉킨 덩굴은 하루가 다르게 담벼락을 초록 물결로 에워싸는 중이다. 머지않아 여름의 세계가 장마 전선에 포위될 무렵이면, 능소화나무는 장맛비에 푹 젖은 적황색 꽃봉오리를 툭툭 떨어트릴 것이다. 




하루가 분주한 여름의 태양은 금세 자리를 옮긴다. 달아나는 빛을 쫓아 부엌으로 향한다. 식탁 위로 오후의 빛이 스민다. 화창한 여름날 무방비 상태로 내리쬐는 태양광이다. 여름의 말간 얼굴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뙤약볕의 열기에 이 여름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토록 복되고 나른한 시간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순간을 흘려보내는 게 못내 아쉽다. 나는 여름을 훔치기로 한다. 




김승옥의 1967년 작, <내가 훔친 여름>은 그 제목만큼이나 소설 속 문장 또한 빛을 발한다. 여름을 훔친다는 것이 큰 의미는 없다. 단지 피서지에서 만난 젊은 여인과의 정사를 '여름을 훔친다'는 은유로 빗댄 것이다. 나는 작가의 문장에 영감을 받아 훔치고 싶은 여름의 심상을 머릿속에 그리곤 했다. 내가 훔친 여름이란, 습한 대기 중을 떠도는 온갖 세태의 향기 속에서 레몬즙처럼 기름진 땀방울을 인내하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훔친 여름을 식탁 위에 펼쳐 맛볼 작정이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후끈 달아오르는 무더위에
자연스레 청량한 음료를 찾는다. 





천연색으로 빛나는 묵직한 유리컵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물을 따라 붓는다. 탱탱한 레몬 과육을 절반으로 도려내 차가운 얼음물 속에 담근다. 이른 아침 옥상 정원에서 따낸 허브 잎사귀도 띄운다. 습도계는 70%에 웃돌고 있다. 포화 상태 직전의 여름의 알갱이들이 유리컵 표면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얼음 조각이 녹을수록 여름의 입자가 증식을 거듭한다. 서로 엉겨 붙은 물방울은 매끈한 유리컵을 타고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오후 햇살에 투과된 투명한 유리 그림자는 굴곡진 형상으로 일렁인다. 손바닥에 물이 묻건 개의치 않고, 차가운 유리컵을 한 손에 움켜쥔다. 매끈한 질감과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컵 속으로 나의 여름을 붙잡았다. 유리컵에 담긴 청량한 여름 한 컵을 들이켠다.




식탁 귀퉁이에는 시절을 다투며 열매를 맺은 여름의 과일로 가득 쌓여 있다. 탐스러운 총천연색 피사체가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정물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참외는 샛노란 붓 터치로 빚어진 듯하다.



어디선가 날아든 하루살이가 어느새 달콤한 향기 주변을 맴돌고 있다. 햇볕에 붉게 그을린 토마토를 한 입 베어 문다. 농축된 토마토의 진한 향이 입안 한가득 퍼진다. 태양의 맛일까? 여름의 속살처럼 검붉은 과즙을 내뿜는 체리를 입속에 오물거리며 여름의 공감각을 채워 나간다.



사뭇 진지하게 여름의 형상을 담기 위해 캔버스를 펼친다.



매끈한 백색 도자기 가장자리에 푸른 안료가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춘다. 풍요로운 여름을 맞아 기쁨의 세레나데로 아침을 여는 새들의 아름다운 지저귐이 둥근 접시 위로 이리 튕기고 저리 튕겨 나간다.




브리 치즈와 체리는 서로 맞닿아 있을 뿐인데 환상적인 페어링을 뽐낸다. 온습한 상온에 놓인 브리 치즈는 그 차제만으로 완벽한 텍스처를 드러낸다. 매끈한 올리브 나뭇결 손잡이의 귀여운 커터로 치즈를 듬성 조각내자 부드러운 크림이 흘러내린다. 씨앗을 파낸 체리 생 과육을 녹진한 치즈와 곁들여 여름을 맛본다. 염장 식품은 여름의 지혜로운 먹거리다. 조각난 달콤한 참외 위로 짠 내 나는 프로슈토를 얹는다. 아삭한 과육 사이로 소금에 절인 육향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다. 올리브 절임은 입이 심심해질 때마다 캔디를 털어 넣듯 가볍게 즐긴다. 짠맛을 누그러뜨리려 담백한 리코타 치즈에 눈을 돌린다. 순백의 유청을 고소한 스낵 거리에 듬뿍 펴 바르고, 횡단면으로 자른 토마토 사이 듬성듬성 올린다. 여름의 햇살을 듬뿍 머금은 바질을 조각내 그릇 위로 무심코 떨군다. 허브 잎사귀가 손끝에 스치자, 부엌은 온통 푸른 여름의 향기로 물들어 간다. 서서히 여백을 드러내는 접시 위엔 섬유질에 휩싸인 체리와 올리브 씨앗, 기름진 치즈 자욱이 얼기설기 묻은 버터나이프와 치즈 커터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것이 여름일까? 그래 이것이 여름이다. 비치 파라솔, 눈부신 백사장, 검푸르고 부드러운 파도, 빨간 수영복, 풍만한 아가씨의 웃는 얼굴, 하얗고 가지런한 이빨, 짧기 때문에 유쾌한 자유 _ (김승옥, 내가 훔친 여름)      



이것은 나의 여름이 아니다. 나의 여름은 일 년 중 반을 미적지근하게 흘려보낸 자괴감에 문득 휩싸이는 나날들, 결말을 가늠할 수 없이 쌓여만 가는 원고와의 씨름, 땀방울에 찌든 벌거벗은 자화상과의 조우, 권태로운 낮잠과 차가운 커피의 유혹, 세차게 지붕을 두드리는 장맛비와의 전쟁, 어느샌가 음습한 구석을 파고든 곰팡내와 실랑이. 장마가 물러난 뒤 도처에 울려 퍼지는 청량한 속삭임, 비로소 드리운 화사한 여름의 세계, 서머타임처럼 복되고 나른한 시간 속에서 언제고 반복되는 평온한 나의 일상과 이상, 이것이 나의 여름이다. 하지를 향해 기다랗게 드리운 태양의 꼬리는 나의 여름을, 내가 훔친 여름을 절정 속으로 파묻고 있다.






https://post.29cm.co.kr/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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