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으면서도 좁다. 그리고 음악 하는 사람들도 서로가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하면서 알고 보면 인간관계가 겹치는 경우가 있다. 머리로는 얼핏 그러려니 하고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막상 실제로 겪으면 신기하고 처음 보는 사람이 반갑게 느껴진달까?
"그러고 보니 친구에게 같이 작업을 한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예요"
친구로부터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눈앞의 이 사람도 그때 남은 좋은 기억들을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작곡가가 만나는 인디 아티스트들의 이야기, <인디 View>.
스물여섯 번째 주인공인 윤닭(of 오브로젝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Q. 본인 소개를 부탁합니다.
A. 윤닭 : 저는 ‘윤닭’이라는 싱어송라이터입니다. 아직 혼자서 활동을 한 작업물이 없어서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게 처음이에요. ‘오브로젝트’라는 팀으로 활동을 할 때는 오브로젝트의 윤닭이라고 소개를 했는데 이제 팀이 해체가 되면서 혼자 인사를 드리는 게 처음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소개를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아직 솔로로서의 작업물이 나오기 전이지만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프로듀싱팀 OUOW로 활동하는 윤닭이라고 소개하기로 했습니다.(웃음)
Q. 지난 프리즘 홀 공연 이후에 오랜만에 다시 뵙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을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요. 최근의 근황은 어떤가요?
A. 윤닭 :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요. 준비를 하는 동안 일들이 많이 생겨서 외부의 프로듀싱도 하면서 3주 동안 꽤 바빴어요. 싱글 앨범을 6월 중순에는 내는 게 목표였는데 딜레이가 됐어요. 이사를 한지도 한 달 정도가 돼서 정신없이 지냈어요. 항상 정신없는 와중에 할 일을 못 끝냈을 때는 바빠서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게으른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동안 게으르게 지낸 것 같아요.(웃음)
Q. 윤닭 님의 성장과정이 궁금해요. 지금까지의 일생을 짧게 들려주세요.
A. 윤닭 : 인천에서 태어나 계속 인천에서 살고 있어요. 어렸을 때 음악적인 꿈을 가지게 된 건 TV를 보면 가수들이 무대에서 공연을 하잖아요. 막연하게 그게 멋있다고 생각을 해서 하고 싶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제가 좀 골목대장이었거든요. 튀고 나서고 주목받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자라나면서 학교를 다니면서는 장기자랑이나 학예회가 있으면 꼭 나가서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해주는 반응들이 좋았어요. 그래서 TV에 나오는 가수에 대한 꿈을 꾼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조금 지나서 생각을 해보니까 가수가 아니라 그냥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피아노를 열심히 배우고 있긴 했었지만 음악적으로의 꿈보다는 막연하게 연예인이나 주목받는 사람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 때에 들어서 연예계 쪽의 일을 하고 싶은데 명확하게 뭘 하고 싶은지가 없었어요. 그 시기엔 주변에서 커서 뭘 할 건지 물어보면 명확하게 답을 하기 시작하는 시기잖아요. 그래서 내가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면서 지냈어요. 그러다 랩을 처음 듣게 되었는데 중학교 때 소울컴퍼니의 음악을 접했어요. 짝꿍이던 친구가 언더그라운드 씬의 음악을 들려줬고 처음 접한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TV에 나오는 사람들만 가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자기 얘기를 거침없이 풀어내는 게 멋있게 느껴졌고 메이저 씬의 진입장벽은 높다고 생각했는데 혼자서 해내고 똑같은 음악이라는 결과물을 내놓고 활동을 하는 게 좋았어요. 그래서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래퍼가 돼야겠다는 꿈을 가지게 됐어요. 그때부터 학교를 다녀오면 헤드폰에 달린 마이크를 연결해서 랩을 녹음하곤 했어요.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헤드폰 마이크로 녹음을 하면 팝 필터가 없어서 너무 음질이 안 좋은 거예요. 그래서 양말을 달아 놓고 녹음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웃음)
춤에도 한창 매력을 느껴서 추다가 고등학교 때는 랩을 잠시 내려놓고 댄스 학원을 다녔어요. 춤을 추고 랩을 하면서 래퍼, 가수가 돼야겠다는 꿈은 있었는데 자신감이 없어서 하고자 하는 걸 자꾸 바꿨던 것 같아요. 인문계 학교를 다니면서 야자를 해야 해서 주로 주말에 연습을 했었는데 2학년에 올라가면서 공부에 시간을 뺏기면 안 될 것 같아서 선생님에게 야자를 빼 달라고 얘기를 드렸어요. 물로 절대 안 빼주셔서(웃음) 저는 도망을 갔죠. 부모님에게 연락이 가서 혼나곤 했는데 결국엔 부모님이 학교를 찾아가서 얘기를 드리고 야자를 빼게 됐어요. 그때부터 공부를 조금 내려놓고 음악에 올인을 했어요. 댄스학원에서 짧게 레슨을 받고 학원비가 들어가는 것도 아까운 것 같아서 다른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때 당시에 백업댄서 팀이 많았어요. 그런 팀에서 연습생을 모집한다는 오디션 공고를 보고 돈을 들이지 않고 춤을 배우고 기회가 되면 실전 경험도 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댄서 팀에 들어갔어요. 5, 6개월 정도를 힘들게 연습하게 됐고 엄청 늘었어요.
댄스 팀을 하면서 조금 서러웠던 기억이 있는데 같이 하던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 친구들은 체격이 좋았고 저는 왜소한 편인데 댄서들이 방송에 서려면 뒤에서 눈에 보이려면 가수 분들보다 조금 더 아우라가 있어야 하는데 제가 체격이 작아서 실전 공연에 나가는 횟수가 친구들에 비해 적어지는 거예요. 친구들이 10번을 나가면 제가 1번을 나간 적도 있고 친구들이 해외에 콘서트를 하러 가면 저 혼자 발탁이 안돼서 연습실에 있곤 했어요. 춤이 내 길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팀을 나와서 다시 랩을 열심히 했고 그때부터 기획사 오디션들을 찾아다니고 데모를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어요.
2010년 10월쯤이었던 것 같은데 빅히트라는 회사에서 Hit it 오디션이라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방탄소년단의 멤버를 뽑는 오디션이 있었어요. 거기에 참가를 해서 본선까지 가서 8명이 결선을 했어요. 그 우승자가 연습생이 되는 거였는데 제가 4위를 했어요. 그때 지금의 슈가(민윤기 님)이라는 친구랑 같이 했었는데 제가 안 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재밌는 경험이었고 했거든요. 그때 출발선이 같았는데 TV에 나오고 지금은 워낙 잘 된 것을 보면서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같이 인터넷에서 얘기하던 친구가 그렇게 되니까 너무 신기했어요. 2011년에는 오디션을 다 찾아다녔는데 슈퍼스타 K 시즌3에 친형과 같이 나갔어요. 나름 슈퍼위크까지 갔었어요.(웃음)
방송을 보면 참가자들이 생활하는 거나 여러 가지 자료화면이 나가잖아요. 저희도 집에서 촬영도 하고 부모님 인터뷰도 하고 이것저것 엄청 촬영했어요. 저희가 형제니까 제작진에서도 그런 모습을 예쁘게 담고 싶어 하셨고 많이 밀어주셨어요. 그런데 저희가 잘하지 못해서 슈퍼위크에서 탈락하면서 심적인 타격이 컸어요. 다른 오디션을 떨어지면 그냥 다음에 더 잘하자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 오디션은 남들이 멍석을 많이 깔아줬는데 저희가 못한 거라서 기회를 날렸다는 자괴감에 빠졌어요. 그날 슈퍼위크가 끝나고 탈락자들을 서울로 가는 버스에 태워주는데 새벽에 서울에 도착해서 집에 가는 버스가 없어서 형이랑 같이 사우나에 갔었어요. 목욕을 하면서 서로 아무 말 없이 씻기만 했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서로의 속상함이 다 느껴지고 너무 피곤했었어요. 그걸 계기로 내가 아직 진짜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더 열심히 연습을 하기 시작했어요.
SBS의 케이팝스타라는 프로그램을 또 나갔는데 그때는 기타를 치는 형의 친구와 셋이 나갔어요. 저희가 예선을 봤는데 PD님이 좋아해 주시고 잘한다고 칭찬도 해주셔서 자신감에 차있는 상태였어요. 그때도 촬영도 많이 했었어요. 그렇게 본선을 갔는데 붙기는 했는데 심사평에서 혹평이 많았어요. 그래서 완전 멘붕이 왔어요. 결과적으로 셋 중에 친형만 쭉쭉 올라가고 저와 기타 치는 형은 중간에 탈락했어요. 그때는 어떤 것에 너무 모든 것을 걸고 투자를 하면 엎어졌을 때 내가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걸 느껴서 이후엔 하는 일마다 이것은 지나가는 인생 중의 하나로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제 생각엔 시즌2가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다시 댄스 학원도 다니면서 춤과 랩을 모두 1년 간 열심히 준비했어요. 시즌 2에서도 제작진 분들이 좋아해 주셨고 저도 다시 자신감이 붙었는데 1차에서 또 떨어지면서 완전 멘붕이 다시 왔어요. 그때는 진짜 저도 잘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했던 지나가는 일로 생각하자는 다짐도 무너져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스무 살을 맞이하면서는 내면을 정비하면서 조금씩 다시 오디션을 보면서 다시 도전을 시작했어요.
제가 계속 오디션을 떨어지면서 ‘왜 떨어지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강박증이 생겼어요. 내가 남들에게 1차를 붙었다는 얘기를 하는 순간 복이 나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남에게 말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어요. 1년 넘게 그런 것들에 시달리다가 결론적으로는 1년 더 지나고 연습생으로 회사를 들어가게 됐어요. 그런데 막상 연습생이 되고 나니까 여기서 날 알아서 해주겠지, 라는 생각에 발전을 안 했던 거예요. 계속 달리다가 목표하던 게 되고 나니까 원래 했던 것처럼 치열한 게 아니라 헤이진 거예요. 그러면서 여러 회사들의 연습생을 거쳤어요. 마지막으로 본 RBW의 오디션에 붙어서 형과 함께 회사에 들어갔고 대표님이 형제니까 같이 팀을 해보라고 해서 ‘오브로젝트’라는 팀이 탄생했어요.
열심히 활동을 하면서 버스킹도 하고 실제로 팬 분들도 마주하면서 신기했어요. 그때도 느낀 건데 당시의 저는 데뷔를 하면서 음원을 냈고 그럼 끝인 줄 알았어요. 시키는 대로 하면 자연스럽게 뭔가 될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발전을 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보냈어요. 두 번째 싱글을 낼 때까지 회사에서 시켜주는 레슨만 하고 음원 작업만 했어요. 그렇게 데뷔 후 2년 정도가 지나고 2017년이 돼서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 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는 가가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회사에 소속이 되어 있는데 서포트를 못 받는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하면서 회사에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생각한 것 같아요.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하는데 못 잡은 게 내 탓이란 걸 느껴서 편곡을 연습하고 작곡, 작사를 치열하게 하면서 한 달에 한 곡씩 발매를 했어요. 타이트하게 1년을 보냈어요. 그때 실력이 많이 늘었고 배운 게 많은 한해였어요.
결국엔 내가 갖춰진 상태가 아니고 매력이 없으면 아무리 회사에서 푸시를 해줘도 사람들이 좋아해 주지 않다는 걸 와 닿게 느껴서 내면에 있는 것들을 더 키우는 데 집중하게 됐어요. 목표도 가수나 부자가 되겠다는 물질적인 형태로 두기보다는 동사로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가수가 될 거야’라고 하면 앨범을 내는 순간 활동을 하는 거니까 그때부터는 딱히 발전을 하는 게 없잖아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목표를 세워서 편곡, 믹스, 작사, 작곡을 혼자 다 하는 음악을 잘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하고 가는 과정들을 목표로 삼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음원 성적이 좋지 않아도 음악을 잘하는 게 목표지 성적이 목표가 아니니까 타격을 받지 않고 회사가 우리에 대한 계획이 없는 것도 굳이 스트레스받지 않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보냈던 2017년이었어요.
그렇게 한 해가 지나니까 그동안의 내 삶들이 너무 타이트해서 내가 안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여유롭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2018년부터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니까 하는 일들을 살아가는 과정으로 두고 최선을 다하되 무게를 두지 말자는 마인드로 변했어요.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고요. 오브로젝트로서 콘서트도 많이 하고 EP 앨범도 냈어요.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했는데 아직도 부족하구나 하는 것도 또 느끼고 형이랑 팀을 하면서 프로듀싱을 맡고 있으니까 팀원인 형을 책임지고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역량이 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번아웃이 됐다가 이겨내고 했어요.
형에게 영장이 나왔고 회사의 계약도 끝나가고 있어서 군대를 다녀온 이후에 팀을 끌고 갈 에너지가 더는 없을 것 같았어요. 막연하게 재밌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이제 구체적인 플랜은 세우고 가야 30대와 40대가 안정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형과 얘기를 많이 했어요. 회사 내부적으로도 저희를 엄청나게 푸시를 해주는 입장도 아니어서 군대를 다녀온 이후에 생각 정리를 하고 활동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에 회사에 계약 해지를 얘기했어요. 특별히 저희를 붙잡을 이유가 없어서 자연스럽고 깔끔하게 해지가 되고 끝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6개월 정도가 걸려서 해지가 마무리되었어요, 그리고 형은 입대를 하고 저는 혼자서 뭘 할지 고민을 하고 앨범을 준비하면서 지냈고 그 시기에 우울증이 왔어요. 혼자서 열심히 앨범을 만들어보려고 하면서 열정도 샘솟기도 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가 음악을 시작해서 활동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는 게 알게 모르지 지치는 게 있었어요. 해야 하는 데 힘은 안 나니까 미루는 일이 많았어요.
어렸을 때 치열하게 살면서 지금 고생하는 걸 나중에 보상받아야겠다는 마인드가 있었고 뭔가를 얻으려면 당연히 뭔가를 포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누가 놀자고 하면 잘 놀지도 않았고 술자리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 있으면 속으로 항상 지금 이런 걸 할 때가 아닌데,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서울대를 가는 학생들은 밥 먹고 공부만 할 텐데 나는 그 사람들이 공부를 하는 만큼 음악을 하는 가를 비교하면서 타이트하게 생활을 했어요. 그래서 행복은 나중에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나중이 됐잖아요? 나중이 돼서 내 모습을 봤는데 제자리로 왔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 됐어요.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저는 괜찮은데 부모님도 늙어가는 게 보이고 다른 사람들도 나이를 먹는 걸 보면서 나중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살다가는 아무것도 없겠다는 걸 느껴서 우울증이 왔어요. 내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하고 살았어요. 이대로 살다가는 미래에도 똑같을 것 같아서 지금에 충실하고 주변 사람들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계획은 세우고 이 시간에 충실하고 단순하게 살자고 다짐하고 긍정적으로 살고 있어요.
Q. 본격적으로 음악 이야기를 시작해볼게요. 항상 시작인 데뷔곡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미스에스의 강민희 님이 피처링으로 지원한 [Best Friend]로 2014년에 데뷔했어요. 당시에 저도 카툰 형식의 아이디어를 사용한 뮤직비디오를 여러 번 봤었어요. 이 곡은 어떤 곡이고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던 곡인가요?
A. 윤닭 : [Best Friend]는 지금 너무 유명한 박우상 작곡가 형과 작업했어요. 회사에서 연결을 해준 작곡가가 우상이 형이었는데 처음 작업실에 찾아가서 저희가 만든 곡들을 들려드렸어요. 형이 새로 같이 만들어보자는 얘기를 해서 왔다 갔다를 여러 번 하면서 만들어진 곡이 [Best Friend]에요. 형이 주제를 [Best Friend]로 가보자고 했는데 저는 처음에 남녀 간의 이야기가 아니고 진짜로 내 친구들에 관한 얘기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가사를 써서 가져갔는데 사랑 얘기로 풀어야 한다고 얘기해주셔서 고쳐서 다시 작업을 했어요.
후렴 부분에 여자분의 피처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회사 하고도 상의를 했어요. 우상이 형이 처음엔 에일리 선배님을 생각하셔서 얘기를 하다가 그때 마침 브랜뉴 뮤직에 있던 민희 누나와 저희가 20살 때부터 친분이 있었거든요. 누나가 그 시기에 피처링을 많이 하고 있었고 버벌진트 선배님의 [시작이 좋아]라는 곡의 피처링으로 1위도 해서 당시의 핫한 보컬이었어요, 저희가 회사에 추천을 했고 민희 누나도 흔쾌히 하겠다고 해서 같이 하게 됐어요. 녹음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저와 형은 녹음이 처음이었는데 민희 누나가 한번 불러보겠다고 하고 노래를 시작하는데 그게 음원처럼 좋게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프로는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었어요.
Q. 데뷔 때부터 형제그룹이라서 꽤 이목을 모았어요. 원래 가족끼리 일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웃음) 그래서인지 항상 가족그룹은 주목의 대상이 되곤 했어요. 한스밴드나 량현량하도 그랬고요. 지금은 악동뮤지션도 같은 이유로 초반에 임팩트가 있었어요. 가족과 함께 일하는 기분은 어떤가요?
A. 윤닭 : 초기에는 안 좋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애초에 저희가 뭉친 게 아니라 회사에서 묶어준 팀이라서 맞춰야 할게 음악적으로도 있는데 원래 형제는 안 친한 형제가 대부분이잖아요.(웃음) 둘의 성격이 완전 반대라서 많이 싸웠어요. 절대 어우러질 수 없는 관계인데 처음 3년 동안은 집에서 같이 회사로 출근하는데도 지하철을 차면서 다른 칸에 탔을 정도였어요. 같은 집에서 나오는데 칸을 따로 타요.(웃음) 굳이 싸운 것도 아니고 사이도 좋은데 그랬어요. 특히 제가 그랬는데 정작 저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형은 서운해하고 그랬어요. 나중에 돌아보면서 느낀 건 형제라서 조금 더 사람들이 봐주는 시선도 특별하고 서로 간의 대화도 속 안의 깊은 얘기를 다 할 수 있었어요. 형은 싸울 때도 안에 있는 얘기를 다 하니까 속에 있는 것들이 나중에 더 잘 풀렸어요. 싸우는 것들이 대화로 바뀌고 이해가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형제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원래 하진 않지만 당연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느껴지고 형이 더 잘 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