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Proejct (249/365)
복싱을 하면서 배운 것들 002 : 카운트
지난 글에서 저는 파트너와 함께하는 스파링을 통해 진정한 성장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로의 리듬을 읽고, 상대의 성장을 위해 나의 속도를 조절하는 '스캐폴딩'의 기술이야말로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값진 가르침이었습니다.
하지만 링 위에서의 배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파트너십을 통해 성장하는 법을 배웠다면, 그 다음 질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스파링이 너무 버거워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측 불가능한 펀치에 정신없이 흔들리고, 피할 수 없는 공격에 무릎 꿇게 되는 순간 말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매던 중, 영화 '카운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제 머릿속에는 두 가지 교훈이 맴돌았습니다. 하나는 영화가 제게 직접적으로 던진 강력한 메시지였고, 다른 하나는 그 메시지에서 파생된 '버틴다'는 것에 대한 저 자신만의 성찰이었습니다.
영화 '카운트'의 핵심 메시지는 '다시 일어설 기회'에 대한 것이지만, 저는 그 이전에 '버티는 것'의 가치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복싱의 한 라운드는 단 3분입니다. 누군가에겐 짧은 시간이지만, 링 위에서 상대의 주먹을 받아내는 선수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일 겁니다. 체력은 바닥나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오릅니다. 그때 가장 쉬운 선택은 '가드를 내리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노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게 중요한 화두를 던졌습니다.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3분이라는 시간을 꽉 채우고 내려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코 가드를 내리지 않는 것' 이 아닐까.
이 생각은 직장인으로서의 제 모습을 날카롭게 관통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프로젝트, 해결하기 어려운 클라이언트의 요구, 번아웃 직전까지 몰리는 격무의 순간들. 그 모든 것이 저에게는 '3분의 라운드'였습니다. 화려한 KO승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때로는 그저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 끈기의 가치를 되새겼습니다.
가드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맷집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기본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 최소한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지키며 계속 방어하고 기회를 모색하는 것. 가장 힘든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버텨냈던 경험이야말로, 다음 라운드로 나아갈 수 있는 단단한 근육이 되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버텨도, 가드를 올려도 쓰러지는 순간은 찾아옵니다. 얘기치 못한 실수, 감당하기 힘든 실패에 그대로 캔버스 위로 나동그라집니다. 바로 이때, 영화는 우리에게 가장 따뜻하고 강력한 위로를 건넵니다. 영화 속 시헌(진선규 분) 코치의 대사가 귓가에 울립니다.
"다운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 다시 일어나라고 '카운트'를 10초씩이나 주거든."
이 대사 앞에서 저는 한동안 말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실패를 종종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망쳤을 때, 프로젝트가 좌초되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하지만 링의 규칙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다운은 패배가 아니라고. 그것은 잠시 숨을 고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하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주어진 '10초의 기회'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일터와 삶 역시 이 '10초의 법칙'을 허락합니다. 실패에 대한 자책과 좌절의 시간을 넘어, 복기와 성찰을 통해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저를 또 다른 질문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다면 동료가 쓰러졌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한 후배가 큰 실수를 저질러 팀 전체가 어려움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당황했고, 후배는 죄책감에 고개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링 위에서 다운된 선수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두 가지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냉정하게 그의 실패를 카운트하는 '심판'이 될 수도 있었고, 링 밖에서 괜찮다고 소리치며 일어서는 법을 알려주는 '코너맨(세컨드)'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지난날 스캐폴딩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저는, 기꺼이 코너맨이 되기로 했습니다. "괜찮아. 실수할 수 있어." "지금부터 10초 동안, 우리가 뭘 놓쳤는지 같이 생각해보자." "일어나서 같이 다음 라운드 준비하면 돼."
좋은 팀이란 각자가 서로의 '코너맨'이 되어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동료가 지쳐 가드를 내리려 할 때 함께 어깨를 부축해주고, 실패에 쓰러졌을 때 "아직 10초 남았어!"라고 외쳐주는 사람. 그런 동료가 곁에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힘든 라운드도 버텨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링 위의 싸움은 두 가지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가드를 내리지 않고 3분을 버텨내는 인내의 시간, 그리고 설령 쓰러지더라도 주어진 10초 안에 다시 일어서는 회복의 시간. 이 두 가지가 모여 우리를 더 단단한 선수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다음 라운드의 공이 울리기 전, 잠시 숨을 고릅니다. 우리는 또다시 링 위에 오를 것이고, 때로는 비틀거리고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계속 방어하며 버텨낼 힘이 있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10초의 시간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