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이라는 안경, 그리고 거리두기

2026 All-Day-Project (087/365)

by Jamin

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050: 내 가설이 예뻐 보이는 이유 에 이어서



지난 글에서는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이 유독 자주 보이는 현상인 '빈도 환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세운 가설이 유독 예뻐 보여서 온 세상이 그 증거로 가득 차 보이는 그런 현상 말이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은 비단 '내 자식이 예뻐 보이는 마음'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혹은 처한 상황에 따라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하죠.


"내 가설이 맞을 리가 없어", "이건 너무 뻔한 생각 아닐까?"라며 지레짐작하고 나타나는 긍정적인 시그널조차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외면해버리는 부정적 편향 역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또 다른 형태의 환상입니다.


결국 빈도 환상이든 부정적 편향이든, 문제의 본질은 가설이 '내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다는 데 있습니다. 가설이 내 뇌의 뉴런 사이에 얽혀 있는 동안, 그것은 온갖 감정과 주관적 해석이라는 필터에 오염됩니다. PM으로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오염된 가설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눈앞에 '물질화'하는 것입니다.



가설의 외재화: 내 생각을 타인의 것으로 만들기



가설을 세운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작업입니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정의하는 순간, 우리 뇌는 그것을 '자아'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거든요. 내가 세운 가설이 공격받으면 내가 공격받는 것 같고, 내 가설이 틀리면 내 능력이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런 감정적 동기화에서 벗어나려면 가설을 '외재화'해야 합니다. 머릿속에만 있던 모호한 확신이나 의구심을 글로 적어 내려가는 순간, 가설은 더 이상 내 자아의 일부가 아닌, 책상 위에 놓인 하나의 '오브젝트'가 됩니다. 종이 위에 혹은 옵시디언의 빈 페이지에 적힌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주관의 영역에 있던 생각을 객관의 영역으로 옮겨놓으면, 내가 쓴 글이지만 마치 3인칭의 관점에서 타인의 제안서를 검토하듯 냉철한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객관성이라는 안경을 쓸 수 있습니다.


예뻐 보여도, 미워 보여도 '그냥' 가설일 뿐


가설을 물질화하여 바라보면 두 가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첫째, 지나치게 예뻐 보였던 가설의 '빈틈'이 보입니다. 머릿속에서는 완벽했던 논리 구조가 글로 옮겨 놓으니 의외로 빈약한 근거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사용자는 이 기능을 원할 거야"라고 적어놓고 나면,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빈약한 데이터에 의존하고 있었는지 직면하게 됩니다.


둘째, 지레짐작으로 깎아내렸던 가설의 '가능성'이 보입니다. "이건 안 될 거야"라고 생각했던 아이디어도 글로 적어 구체적인 검증 지표를 설정하다 보면, 의외로 해볼 법한 시도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단순한 버튼 위치 변경 가설이라도 예상 클릭률과 임팩트를 숫자로 적다 보면, 막연한 불안감이 합리적인 기대치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죠. 감정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작은 기회들이 논리적인 문장 사이에서 고개를 듭니다.


결국 가설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빌려 쓰는 '가설적인 안경'일 뿐입니다. 안경이 너무 장밋빛이라서 세상을 왜곡해도 문제지만, 너무 어두워서 앞을 보지 못하게 해도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필요할 때 언제든 그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둘 수 있는 용기입니다.


가설을 쓰세요, 그리고 멀어지세요


가설을 세우는 열정은 PM의 엔진이지만, 그 가설을 객관적으로 밀어내는 냉정함은 PM의 핸들입니다. 가설을 세웠다면 반드시 글로 쓰세요. 그리고 그 글로부터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두세요. 글을 쓴 직후 바로 검증에 들어가지 말고, 하룻밤 정도 묵혀두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읽어보는 냉각기를 가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내가 쓴 가설을 마치 모르는 사람이 쓴 글을 비판하는 편집자의 마음으로 읽어보세요. "이 주장을 뒷받침할 데이터는 충분한가?", "반대되는 데이터가 나온다면 나는 기꺼이 이 문장을 지울 준비가 되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가설을 다듬어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훌륭한 검증의 시작입니다.


좋은 제품은 정답을 맞히는 PM의 확신이 아니라, 오답을 걸러내는 PM의 집요한 의심과 거리두기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여러분의 가설을 머릿속에서 해방시켜 주세요. 그래야만 비로소 진짜 고객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팀의 언어가 팀의 세계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