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따스한 온실 벗어나기 (윽)
2019년 1월, 대기업 SI계열사에서 디자이너로서 첫 회사생활을 시작해 3년 2개월간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이제는 정들었던 첫 회사를 떠나 초기 스타트업 회사에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이직하게 되었네요. 3년간 회사생활을 되돌아보기 위해 `퇴사 부검` 형식을 빌려 기록해보려 합니다.
퇴사 부검인데 회사는 모르는,, 나 혼자 하는 3년 회고 글 시작합니다.
1. 왜 떠나는지?
<사용자를 고려한 디자인 X -> 클라이언트를 위한 디자인 O>
프로젝트는 많고, 고객은 존재하는데 그 고객이 실제 유저가 아니라 대부분 임원이었어요. uxui 디자이너는 사용자를 위해 서비스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사용자는 고객사 임원이 되었습니다. (SI업체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UX 디자이너 혹은 기획자라면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회사 내에서는 아무도 그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어요. 이번 프로젝트만 잘 끝나면 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진짜 사용자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은 많고, 언제나 다음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사용자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고 기획하여도 고과에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퇴사 소식을 들은 팀장님께서는 아직 이직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실제 프로젝트를 이끌고 진짜 디자이너로서 역량을 펼치고자 한다면 5~6년 차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그전에는 선배들 서포트를 하거나 작은 프로젝트를 하면서 실력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팀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지금 퇴사 결정을 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연차가 되어 `이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면 저는 영원히 지금 회사에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회사에서 배운 것
<IT 기술은 넓고 다양하다>
저 개인의 성장과는 무관하게 회사는 나름 시장에서 선방하며 커갔습니다. 덕분에 저도 각종 IT분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회사의 주력 기술 분야는 클라우드, AI빅데이터, 스마트팩토리, 블록체인, IoT, 스마트시티 등입니다. (한 개가 더 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홈페이지에서 사라짐;;) 1~2년 차 햇병아리 디자이너가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최신 기술을 옆에 둘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3년간 제가 했던 프로젝트 개수는 수십 개에, 도메인도 다양했습니다. (B2C 모바일, 물류 시스템 개선, B2B 사이트 개선, 그룹 공통 챗봇 제작, 출입 단말기 UI, 제안 영상, 사내 시스템, 행사 포스터, 사내 벤처, 등등)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분이 현재 회사의 장점이자 퇴사하게 된 가장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네요.
<대기업 복지는 참으로 달달하다>
대기업 복지는 참 달달합니다. 현금성 복지(연봉, PS, PI, 복지 포인트, 각종 호텔 및 리조트 할인,,) 이외에도 대출 혜택, 자유로운 휴가 사용 등 다양한 혜택들이 존재합니다. 최근에는 선임 호칭 변경 시 100만 원 상당의 선물을 주는 제도까지 생겼습니다.
거기에 저희 팀은 사내에서도 다들 오고 싶어 하는 조직으로 꼽힐 정도로 정말 좋은 팀 문화를 가진 팀입니다. 서로 힘들 때 도와주고, 누구 하나 모난 사람 없으며 팀장-팀원 간 관계도 좋은 몇 안 되는 극강의 행복한 팀이기도 합니다.
퇴사를 결정한 지금 시점 후 2달 안에 각종 선물과 PS, PI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건 좀 심각하게 많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돈 잘 주고 사람 좋고 일 괜찮은 회사를 나간다고 했을 때 다들 좋은 회사를 왜 나가냐며 이해가 안 된다는 말도 많이 들었네요. 첫 회사생활을 너무 달콤하게 시작해 앞으로가 걱정되기도 합니다ㅎㅎ
3. 회사에 아쉬운 점
아쉽지만, 지금 회사에서 대리급 디자이너가 되어 주니어 레벨을 벗어나기를 기다리기에는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주 이하의 자투리 프로젝트들을 시키지 않았다면?
주니어 디자이너들의 개인 성장에 대해 조금 더 신경 써주었다면?
디자이너 개인이 쌓고 싶은 포트폴리오와 일치한 업무가 배정되었다면?
4. 그래서 어디로 갈 것인지?
그래서 제가 이직하게 될 회사는, 설립 1년 차 에이지테크 스타트업입니다. 현재는 치매를 예방하고 조기 진단하는 앱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현재 회사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남겨보려 합니다.
감사하게도 몇몇 회사로부터 오퍼도 오고 면접 절차를 진행하면서 어디가 나에게 최적의 선택이 될 것인지 고민이 정말 많이 되더라고요. A 회사는 이 점이 좋고, B 회사는 저런 점이 좋은 것 같고…. 그러다 어느 날은 다 때려치우고 지금 회사에서 따습게 PS 받으면서 지낼까?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직 기준표"를 만들어 다른 여러 회사와 비교를 한 것이 결정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직 기준표는 이직 선택 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러 가지 기준을 가지고 점수를 매긴 표인데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항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요도에 따라 만점 기준도 다르게 책정하였습니다.
개인 성장 (1-7)
회사 성공 (1-6)
돈 (1-5)
흥미 (1-5)
권한 (1-5)
5. 다음 회사에서 하게 될 것 & 하고 싶은 것
지금 제 명함에는 UX/UI 디자이너라고 적혀있는데, 앞으로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라고 쓰인 명함을 들고 다닐 예정입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UX를 넘어 프로덕트 자체에 대해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회사에서 저에게 바라는 점이기도 하지만, 제가 저 자신에게 강력하게 원하는 모습이기도 하네요. `다음 회사에서 하게 될 것`이라기 보단, `다음 회사에서 꼭 이루고 싶은 것`에 더 가까운 리스트를 적어보았습니다.
데이터기반의 UX디자인 (A/B테스트, 사용성 테스트, 사용자 인터뷰 등)
사용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가치를 제공할 것
끊임없이 문제의식 갖기 = 언제나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
그래서,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성공한 서비스 만들기
여기 까지 내 맘대로 퇴사 부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저는 새 회사로 출근하기 전 여유를 조금 즐기려고 생각 중입니다. 언제 다시 올 여유일지 모르니 여행도 가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