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대충 쓰는 글
대략 서너 시간 전이었다. 오래간만에 하체 운동을 열심히 한 덕에 땀범벅이 된 채로 욕실에 들어섰다. 정신이 들 정도로 찬 물로 지친 몸을 식히고 있자니, 머릿속에 스멀스멀 여러 개의 글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왜 이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샤워를 하거나 집을 치우는 등 일상적인 상황에서 갑자기 유레카처럼 좋은 아이디어가 솟아나는 일. 오늘이 딱 그러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글감도 제법 괜찮았고, 이걸 어떻게 멋들어지게 표현하고 펼쳐낼지도 절로 떠오른다. 적당한 운동 덕분에 뇌가 쌩쌩하게 돌아가는 게 느껴진다.
좋았어, 오늘의 브런치 글은 이거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글이 나올지도 몰라. 이러다가 구독자가 늘어나는 거 아냐?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괜히 샴푸를 너무 꼼꼼히 씻으면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도 같이 씻겨 내려갈 것 같다는 바보 같은 생각도 해본다. 이걸 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함에, 미친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중얼중얼거리며 써야 할 글들을 다시 상기했다. 샤워를 마친 후 머리도 대강 말리면서 얼른 글 쓸 생각만 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밤을 새울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로 글 쓸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신랑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조용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마침 환히 열린 거실 창문 너머로 아직 짝을 찾지 못한 매미들이 구슬프게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기하게 예전에는 시끄럽기만 했던 매미 소리가 이번엔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간접등 하나만 킨 채 천천히 노트북을 열었다. 어두운 집안 한가운데에서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매미소리를 들으며 글을 쓴다라. 반딧불을 등불로, 풀벌레 노랫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아 책을 읽고 공부하던 조선 시대의 선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적당한 와인 한 잔만 더 있었다면 딱이었을 텐데! 괜히 작가가 된 기분에 취하면서 나는 브런치에 접속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하얀 화면이 나온다. 손가락을 가볍게 푼 뒤 키보드 위에 얹는 그 순간,
아. 귀찮다. 그냥 잘까?
아까 전까지 머릿속에서 반짝이던 글감들이 열정과 함께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귀찮다'는 생각만이 내 몸과 마음을 강력하게 지배하기 시작했다.
사족이지만 난 일단은 최대한 AI나 외부의 도움을 최소화 한 상태로 직접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타, 비문, 띄어쓰기 교정 등에서만 AI를 활용하려고 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AI에게 글감을 던져준 뒤 대강 아무렇게나 좋은 글 좀 내보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만큼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싫었다.
우스운 일이다. 원고지 위에 직접 펜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타자기처럼 일일이 종이 위치를 교정해 줄 필요더 없다. 그저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만 놀리면 되는 것이고, 이건 눈 감고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내 브런치가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곳도 아닌, 약간 정제되고 정리된 일기를 올리는 개인적인 공간임을 생각하면, 글의 질이 좋을 필요도 없으니 부담 가질 이유도 없다. 그냥 나 편한 대로 거칠게 써도 그만이다. 그런데 왜 이리도 귀찮은 것인지.
바로 일주일 전 글에서 나는 열정은 넘치지만 행동은 안 하는 상황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 글을 다시 읽어보니 나란 사람이 선천적으로 게으른 사람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고 적은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내가 현실을 피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난 정말로 뼛속까지 나무늘보인 게으름뱅이일지도 몰라.
결국 나는 글을 한 자도 쓰지 못한 채 몇 시간 동안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만 했다. 그러다 보니 벌써 시간은 새벽 2시를 넘어 곧 있으면 세 시를 바라보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냉수 한 잔을 마시고, 고개를 양옆으로 거칠게 흔들고,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노트북을 바라보았으나!! 그렇다, 여전히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머릿속에 희미하게 단어들이 부유하고 있지만 그걸 손가락으로 옮겨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잠들려고 하면, 다시 한번 자주 겪어온 찝찝함과 자기혐오에 빠질 것 같으니,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노랫소리처럼 들리던 매미 울음소리가 슬슬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바람마저 멈추니 갑자기 집 안이 습하게 여겨진다. 운치 있던 간접등의 주황색 빛이 너무 눈에 부시다. 눈앞에서 깜박이는 커서의 움직임이 두려워진다.
왜, 왜, 왜 나는 여기서 이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거지? 뭐가 문제인거지? 이봐 OOO (작가의 이름) 정신 차려, 눈 뜨라고!!
보통 만화를 보면 주인공이 어쩔 줄을 몰라할 때, 갑자기 섬광이 머리를 스치는 연출이 나오면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술술술 일이 풀린다. 그리고 나의 경우, 기발하다고 볼 순 없지만, 나름 이 난감함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지금의 이 글이다. 글을 쓰는 게 너무 귀찮아서 쓰기 싫다는 내용을 글로 쓰는 것. 비록 요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못 쓰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덕분에 오늘도, 어떻게든, 무조건 브런치에 일주일에 한 편은 글을 올리겠다는 작은 소정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찾아와서 갑자기 사라진, 아름답고 의미 있는 각종 글감들을 현실에 구현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다시 하체 운동을 해서 몸을 힘들게 만들고 찬물 샤워를 하다 보면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저나 글 쓰는 건 왜 귀찮은 것일까? 그렇게나 하고 싶고 바라던 일인데, 막상 하려고 하면 선뜻 손이 안 움직인단 말이야... 정말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