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시대 체제에 변화가 필요하다.
중세 시대에는 정보와 지식이 왕과 귀족,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일반 시민들은 글을 읽을 수도 없었고, 세상의 소식을 알 수 있는 통로도 제한적이었다. 정보를 독점한 소수의 특권층은 이를 기반으로 절대 권력을 유지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지배를 받았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이 권력 구조를 뒤흔들었다. 책이 대량으로 인쇄되면서 지식이 시민들에게 퍼져나갔다. 시민들은 책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접했고,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루소나 볼테르 같은 계몽 사상가들의 글이 널리 읽히면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생각이 퍼져나갔다.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이는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이 되었다.
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며 신문, 라디오, TV와 같은 대중매체가 등장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많은 시민들이 비슷한 정보를 공유했다는 점이다. 저녁 뉴스를 보고, 아침 신문을 읽으며, 시민들은 공통의 사실을 바탕으로 토론하고 합의를 이뤄낼 수 있었다. 이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정보는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에 따라 맞춤형으로 제공된다. 각자가 자신만의 정보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완전히 다른 정보를 보고, 다른 '사실'을 믿게 되면서 민주적 합의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처럼 정보의 확산은 권력 구조와 정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왔다.
AI는 정보의 생산, 처리, 전달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AI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게 했다. 의사만 알던 의학 지식, 변호사만 이해하던 법률 지식이 이제는 AI를 통해 일반 시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전문가들의 정보 독점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AI는 새로운 형태의 정보 격차도 만들어내고 있다. AI를 잘 다루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능력 차이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AI 툴을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뒤처지게 된다. 이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 불균형을 만들어낼 수 있다.
AI는 개인화를 한 단계 더 진화시키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추천하는 수준을 넘어, 각 개인의 지식수준과 관심사에 맞춰 정보를 재구성하고 설명해 준다. 이는 정보 이해도를 높이는 장점이 있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사실과 이해 기반이 점점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왕과 귀족들이 정보를 독점하던 봉건 왕정 시대를 지나, 대중이 정보의 주인이 되는 산업화 민주주의 시대를 지나, 개인이 정보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AI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모든 사람이 다른 채널을 보고 다른 정보를 접하는 유튜브가 그 세상의 아주 작은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유튜브가 개인화되고 파편화되고 편향된 정보를 통해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너무 잘 체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정치 시스템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정보 공유와 의사결정 시스템이 필요하다. 모든 시민이 AI의 도움을 받아 전문적인 정보를 이해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며,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과거에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AI의 도움으로 누구나 빠르게 전문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의사는 AI로 더 정확한 진단을, 변호사는 더 꼼꼼한 판례 검토를, 연구원은 더 광범위한 자료 분석을 할 수 있게 됐다. 개인의 능력이 AI와의 협력을 통해 증폭되면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와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이제 시민들은 AI의 도움으로 복잡한 정책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다. '탄소 배출권 거래제'나 '양적 완화 정책' 같은 전문적인 정책도 AI가 쉽게 설명해 주고, 그 영향을 분석해 준다. 정치인들의 공약이 실현 가능한지,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도 AI와 함께 검증할 수 있다. 더 이상 전문성 부족을 이유로 시민들의 직접 참여를 제한할 수 없다. 정치는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에서 모든 시민의 이성적 참여가 이루어지는 공론장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소통할 수 있다. 실시간 번역 AI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메타버스는 물리적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다. 전 세계 전문가들이 하나의 프로젝트에서 실시간으로 협업하고,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아이디어를 교환한다. 이런 초연결성은 새로운 형태의 조직과 협력 방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한 도시의 정책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공유되고, 다른 도시들의 경험이 즉시 반영된다. 기후 변화나 팬데믹 같은 글로벌 이슈에 대해 전 세계 시민들이 동시에 토론하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정당 같은 전통적인 정치 매개체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대신 온라인 커뮤니티와 초국가적 시민 네트워크의 영향력이 커진다. 정치는 더 이상 국경에 갇히지 않는다.
AI의 발전은 모든 것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신제품 개발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새로운 기술의 도입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ChatGPT는 출시 2달 만에 1억 명의 사용자를 확보했다. 이전에는 수년이 걸리던 일들이 이제는 수개월 만에 이루어진다. 이런 가속화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책의 실행과 평가가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새로운 정책이 시행되면 그 효과가 즉시 측정되고, 문제점이 발견되면 바로 수정된다. 4년마다 하는 선거나 몇 달씩 걸리는 입법 과정으로는 급변하는 사회 문제에 대응할 수 없다. 실시간 여론 수렴, AI 기반 정책 시뮬레이션, 신속한 의사결정 체계가 필요하다. 정치는 더 이상 느리고 무거운 과정이 아닌, 빠르고 유연한 문제해결 시스템이 될 것이다.
산업화 시대의 유산인 현재의 민주주의는 AI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증강된 시민들의 전문성을 무시한 채 단순 투표권만 주고, 초연결된 세상에서 여전히 지역 중심의 대표제를 고집하며, 가속화되는 변화 속도에 느린 의사결정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는 마치 스마트폰 시대에 우편물로 소통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도전 앞에서 'Digital Synergy Governance(DSG)'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안하려고 한다. DSG는 AI와 인간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실시간 연결된 커뮤니티의 집단지성을 활용하며, 빠른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미래형 거버넌스 시스템이다. 2025년에 이론적 토대를 다지고 런칭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