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라서

by 최선화

딸이라서

어릴 적 내 고민은 내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다. 성별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나를 만든 조물주에게 항변할 일인데도 그 피해자인 내가 스스로 고민했다는 사실이 억울하다.

대대로 딸부잣집에 넷째로 태어난 딸, 딸인 줄 알았다면 아예 낳지도 않았을 딸로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나마 늦둥이 막내였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집의 모든 관심은 외아들인 오빠에게 집중되었다. 명백한 그리고 은근한 차별이 일상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중 제일 치사한 일은 먹는 것에 대한 차별로 어린 나로서는 도저히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집 밥상을 보면 집안에서의 순위가 정확히 매겨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사랑채와 안방에서 각각 독상을 받았다.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머슴들은 마루에서 각각 두레상을 받았다. 게다가 산촌에서는 귀한 생선이 상에 오르는 날이면 접시에 담긴 모양만 보아도 누구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모양새도 단정하고 가장 맛있는 중간 부분은 할아버지, 그다음은 아버지, 오빠 순으로 내려오다 보면 내 것은 작고 가느다란 꼬리 부분이었다.

나는 내 것과 오빠 것을 비교하며 내가 작고 약한 것은 살도 없는 생선 꼬리만 먹기 때문이라며 바꿔 달라고 했다. 그러면 아버지가 나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그꼴을 못 보는 오빠는 할아버지가 불렀다. 그래도 내 성에 차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기둥을 붙잡고 서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온 가족이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나 혼자 우두커니 서서 배고픔과 외로움을 참다못해 눈물을 흘리며 버텼다. 보다 못한 어른들이 모두 나서 나를 먹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며 애원하면 그때야 비로소 슬그머니 먹었다.

이런 집안의 차별을 뚫고 자라나기 위해서 나는 온갖 생존투쟁을 벌였다. 무슨 짓을 해도 오빠를 능가할 수 없는 집안의 질서 앞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택한 비장의 무기는 아프다고 드러눕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노산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병치레가 잦았고 큰 병도 여러 번 앓았다.

어린 내가 아파 누우면 우리 집 1번은 나로, 모두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보살펴주었다. 그래서 정말 아픈 경우보다는 꾀병을 자주 부렸다. 이런 일이 도를 넘자 엄마의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어느 날 또 무슨 불만으로 아프다며 드러눕자, 엄마는 아픈 사람은 꼼짝 말고 누워 지내야 한다며 나를 혼자 남겨두고 방문을 닫아버리며 아예 나오지 못하게 했다. 대낮에 혼자서 방안에 누워만 있으려니 갑갑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이제는 다 나았다며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어릴 적 큰 병으로 내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고 상태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걱정하며 내가 관심의 초점이 되자, 오빠가 내 옆에 드러누웠다. 나도 아프다, 왜 제만 매번 아프냐, 나도 아프고 싶다고 해서 혼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집안의 성차별적 태도는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번진 뿌리 깊은 문화였다. 그래서 실상은 내가 성장 과정에서 큰 차별을 받고 억압받은 것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딸을 대하는 태도 자체로 인해 늘 차별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중 가장 기분 나빴던 것은 사소한 차별 대접보다는 여성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태도였다. 그래서 말끝마다 ‘저게 아들이었어야 하는데’라고 사족을 다는 할아버지의 태도가 정말 싫었다. 할아버지가 그러시면 난 속으로 ‘그래, 내가 여자라서 못할 게 뭐가 있는데’라고 되뇌었지만 입도 벙긋 못하는 것이 우리 집 질서였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어릴 적부터 여자로 살아남아 인정받고 당당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아온 것 같다.

다행히 보수적 가치관의 보루였던 할아버지가 내가 10살 적 돌아가시자, 나는 별로 슬피 울지도 않았다. 큰이모가 나에게 ‘너는 때를 잘 타고났다. 이제 네 할아버지 돌아가셨으니 얼마든지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살게 되었네, 네가 복덩이다.’라며 기뻐하셨다.

우리 가족이 할아버지의 죽음을 환영했다기보다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이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할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서 토지를 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하셨다. 부모님도 훨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딸들도 자신이 원하는 사회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우선주의와 우월주의라는 형태의 가부장제는 아직도 우리 집안과 사회 전반에 그뿌리가 퍼져있다.

초등학교 시절 지나가다 우연히 벽에 붙은 포스트를 보자 딱 내 마음에 들었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 어쩜 그리도 내 맘에 쏙 드는지, 공책 뒤에다 베껴놓고 내가 차별 받았다고 생각되면 읽으며 스스로 위로했다.

어느 날 대학에서 선배 교수님이 나를 보며 무슨 이야기 끝에 ‘최교수야 뭐, 일당 백이지...시시한 남자들 백을 붙여도 안 될 걸...’이라고 했다. ‘나는 어릴 적 열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라고 해서 모두 웃어넘겼다.

그러나 그 말은 칭찬이기보다는 묘한 남성들의 열등의식과 비아냥 그러면서 여성을 엉뚱하게 눌러 깔아뭉개려는 폭력과 억압이 느껴졌다. 그래서 속으로 말했다, 밟히면 밟힐수록 강해지는 질경이 같은 여성의 그리고 인간의 생명력을 누가 감히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 이제는 이미 성을 따지는 것이 법적으로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성차별뿐만 아니라 약자에 대한 모든 차별이 사라져야 할 때가 되었다. 소모적인 착취와 힘겨루기보다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용함으로써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본래 생명이 우리 모두에게 준 사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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