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보약
오랜만에 코흘리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어릴 적 별명을 기억해 내서 한바탕 웃음으로 날려버리며 우리가 그동안 삶이라는 학교에서 배운 지혜와 도량들을 한껏 발휘했다. 그러면서 어릴 적 겪었던 아픔과 부족에 대한 치유와 해방을 경험하며, 마치 인생 성적표를 받는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우리 속에서 얌체 같이 행동하는 아이는 첩의 딸이라 불렀다. 체면 불고하고 자기 잇속만 챙기며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지 않아서. 그래서인지 그 친구는 지금도 제일 젊어 보였고 여전히 자기 몸을 아꼈다. 그러다 내 차례가 되자 먼저 이실직고했다. 난 할메 딸이었다고. 할머니가 낳은 아이라 부실해서 추위를 잘 타서 항상 속옷을 두둑이 챙겨 입고 다녀 놀림거리였음에도 감기를 달고 살던 아이였다고.
어릴 적 우리들의 별명은 약간의 열등의식을 갖게 하는 것으로 치부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크게 내세울 것 없는 약점 내지 감추고 싶은 비밀 같은 것이었다. 아이들이 할메 딸이라 놀릴 때마다 난 속으로 얼마나 많은 분함과 눈물을 삼켜야 했는지 모른다. 우리 어머니가 제일 나이가 많은 것도 싫었고 그래서 일찍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마음 졸이며 베개 깃이 다 젖도록 울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일들이 어릴 적 나에게는 남모르는 고민거리였다. 그러나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인지라 이런 약점들을 승화시켜 도리어 자랑거리로 만드는 둔갑술을 익혔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밥만 축낸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삶을 이해하고 승화시켜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나이가 많아서 내가 얼마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지혜롭게 키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좀 마음이 따뜻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자 나의 뻔뻔(fun fun)함에 ‘늦둥이 많이 컸다.’고 놀렸다. 그러자 자신의 별명을 싫어하던 아이가 나섰다. 나는 거지 딸이라서 많이 먹고 뭐든지 잘 먹었다. 그래서 이렇게 튼튼하고 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고. 모두가 박장대소로 답했다, 넌 정말 위대하다고, 오늘도 제일 많이 먹었고 끝까지 먹었다고.
여기에 질세라 나선 친구는 아버지가 넝마주이라서 그의 딸이라는 말이 너무 싫고 창피했었지만 배운 제주가 그것뿐이어서 뭐든지 긁어모아서 부자가 되었다고. 땅도 긁어모으고 아파트도 끌어 모으고 돈도 주워 담았다고. 그뿐인가! 자식들도 줍고 불쌍한 남정네들도 여럿 품어 안았다고. 재혼해서 복합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을 이렇게 질펀하고 넉살 좋게 표현하다니! 가히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았다. 그 친구의 탁월한 쓸어 담기 능력 특히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 사람을 품어줄 줄 아는 능력에 경외심마저 생겼다
어릴 적 이 친구는 정말 어렵고 힘들게 살아서 친구들의 놀림감이었다. 그래서인지 일찌감치 세상사는 법을 터득해서 잡초보다 더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하며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난이 힘들긴 해도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게 했고 그래서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도왔는지 모른다. 이 친구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려운 고비마다 보여준 삶에 대한 배포와 너그러움은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면모를 지녔다. 나처럼 머리와 입으로 배우고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알고 손과 발로 익히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 품어주다 보니 거칠어진 손만큼 배짱과 마음 씀씀이도 컸다.
나이 들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이렇게 자신의 약점과 단점을 더는 부끄러워하며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단점이라 생각한 것도 장점일 수 있고, 뭔들 그리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학교는 출신이나 가방끈과는 상관없이 성실하게 삶을 사랑한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선물과 자유를 보상으로 돌려준다. 비록 그 보상이 남 보기에 번듯한 지상의 축복이라는 형태는 아닐지라도. 자신이 가진 부족함과 약점으로 보이는 것 속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일은 쉽진 않지만, 의미 있는 여정이다. 그래서 마침내 주어진 운명에 감사하며 그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냈을 때 그동안의 노고는 눈 녹듯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