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영 May 28. 2015

그 남자 그 여자

밥이 뭐길래


난, 정말 별거 없었어. 결혼이란 게 뭔가 새로운 출발이란 생각은 했지만 무슨 커다란 희망을 가졌다거나 거창한 목표를 세웠다거나 그런 게 없었어. 처자식 부양하고 본가랑 처가에 때 되면 도리 하고 그 정도쯤 생각했던 것 같아. 학생이 아닌 직장인이 되었다는 것 말고는 솔직히 별반 달라진 것도 없었어. 직장 동료들이랑 어울리고, 친구 녀석들 자주 만나서 술 마시고 당구도 치고, 집 밖에서의 생활은 결혼하기 전이랑 크게 변화가 없었어. 오히려 일찍 결혼한 셈이라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 나쁘지 않았어. 남들도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어. 

  

가만있어봐라.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나 됐지? 큰 애가 열다섯 살이니까 16년 됐구나. 난 그때, 그러니까 뱃속에 큰 아이와 함께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 무지 혼란스러웠어. 결혼하는 게 엄마가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날 갑자기 진짜 어른이 된 거였지. 어른은 어른인데 남편이 챙겨줘야 하는, 남편에게 기대서 살아야 하는, 이상한 어른이 된 거였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하고 아이를 키우고 저축도 해야 하는, 내조의 여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지. 오로지 남편과 아이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내가 되어버린 거였어. 바로 그날이. 

  

다 그렇게 살지 않아? 내 주변엔 다들 그렇게 살던데. 요즘에야 맞벌이도 흔하지만 그땐 마누라 일 시키면 못나 보이고 그랬어. 당신도 그랬잖아. 현모양처가 꿈이라면서 회사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 키우면서 살림하고 싶댔잖아. 그리고 결혼이 뭐야. 퇴근하고 집에 오면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놓고 기다리는 마누라가 있는 거, 그 맛 아니야. 그 맛에 밖에 나가서 더러운 꼴 당해도 참고 일하는 거 아닌가. 난 그랬어. 당신이 애 둘 낳더니 나 몰라라 할 줄 몰랐지. 무슨 나무꾼과 선녀도 아닌데 틈만 나면 훨훨 날아갈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맞아. 내 꿈이 현모양처였지. 그게 뭔지도 모르고 글쎄 왜 그런 꿈을 꿨을까. 순수의 시대였어. 당신, 애 안 낳아봤지. 당신, 애 안 키워봤지. 난 말이야. 아이 낳고 키우고 그러면서 완전 다시 태어났어. 서서히, 천천히. 큰 아이 백일잔치하고 돌잔치하면서, 둘째 백일잔치하고 돌잔치하면서, 나는 완전 다시 태어났다니까. 현모양처, 그게 사람 잡는 거란 걸 알았지. 그게 말이야. 내가 할 짓이 아니더라구. 무슨 도인이나 수도승이나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구선 어떻게 그렇게 살아. 난 못 살아. 그래서 관뒀지. 깨끗하게 손 털었어. 난 싫었거든. 

    

사람이 어떻게 좋은 거만 하고 사니? 참고 살아야지. 힘들어도 참아야지. 나라고 뭐 좋아서 이러구 사는 줄 알아? 나도 다 참고 참으면서 산다구. 남의 돈 벌기가 쉬운 줄 아냐구. 더러워도 참고 치사해도 참고 아니꼬워도 참고.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잖아. 난 밖에서 일하는 거 참고 살고, 당신은 집안 살림하는 거 참고 살고, 그게 맞는 거 아니야. 난 하는데 당신은 왜 안 한다고 하냐구. 그것도 당당하게 큰소리치면서. 그래, 좋아. 내가 백 번 양보한다고 치자. 아니, 밥은 챙겨줘야 하잖아. 내가 돈 벌어다주고 밥도 못 얻어먹어야 되냐구. 

    

당신 하는 일이 오후에 출근하고 자정이 되어서야 귀가하잖아. 아이들하곤 사이클이 달라서 한동안은 나도 아무 때나 먹고 아무 때나 자고 그랬었지. 근데 그것도 지쳤어. 재미없어. 나도 살아야지. 난 뭐야. 내 사이클은 뭐냐구. 난 정말이지 식구들이 각자 자기 밥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 먹으면 소원이 없겠어. 왜 맨날 나만 보면 밥, 밥, 밥이냐구. 애들이 하는 소리도 듣기 싫은데 당신까지 그 소릴 하면 난 정말 다 관두고 싶어 져. 살아야 하니까 먹어야겠지만 먹는 거 챙기다가 돌아가시겠다구. 나야말로 누가 내 밥 좀 챙겨주면 좋겠다구. 

    

또 먹는 얘기해서 뭐한데. 밥은 그냥 단순히 밥이 아니야. 우린 식구잖아. 식구가 뭐야. 엄마가 뭐야. 애들한테라도 해줄 건 해줘야지. 애들한테까지 밥 챙겨먹으라는 건 너무 심하잖아. 밥이 뭐야? 밥은 마음이야. 관심이고 배려고 사랑이라구. 당신이 그걸 안 하면 누가 하겠어. 내가? 물론 나도 할 수는 있지. 하지만 그건 차원이 다른 얘기야. 뭐 어쩌다가 한두 번 그럴 수야 있겠지만 그건 아니지. 집에서 밥까지 해먹으면서 밖에 나가서 일을 하라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나의 일이 있는 거고 이건 당연히 당신이 해야 할 일이야. 

    

밥이 마음이고 관심이고 배려고 사랑이라고? 정말 미치겠네. 아니 그걸 왜 나한테만 바라냐구. 그렇게 위대하고 좋은 거면 나눠서 하면 좋잖아. 아, 잘됐네. 그동안 내가 했으니까 이젠 당신이 좀 해봐. 당신이 사랑 나누면서 행복을 찾아보라구. 왜, 싫어? 나한텐 좋은 거라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애들 사랑은 내가 챙길게. 그러니까 당신 사랑은 당신이 챙겨. 내 사랑 챙겨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그건 걱정 말구. 원래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거랬어. 난 내가 알아서 나 사랑할 테니까 당신은 당신 사랑 챙겨줘. 그게 맞겠다. 그치?

  

작가의 이전글 사랑후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