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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 정 Mar 13. 2019

지금 내게 편지를 쓰세요.

순간을 놓치면 이제는 쓰기 어려울지도 몰라요, 어떤 이유든



  평소에 주변 문구점을 가거나 아트박스와 같은 큰 팬시점을 가게되면 사는 것과 상관없이 편지지 앞에서 한참 서성거린다. 서점에서 책을 읽고 만지는 것 다음으로 좋아하는게 편지지를 구경하는 일이었다. 딱히 답장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비뚤어진 글씨들이 가득 채워지는게 신기하고 즐겁기 때문이다. 책 속의 이야기에 빠지는 것만큼 편지를 쓴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만의비밀스럽고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가까워지는 관계를 나는 좋아한다. 행동보다는 말이편하고, 말보다는 쓰는 것이 더 편했던 나의 표현 방법 중 하나였다.

  퇴근이 빠른 편인 나는 귀가하면서 늘 우편함을 확인한다. 각종 명세서, 광고지 외에는 올 것이 없음을 알면서도 꼼꼼히 살핀다. 혹시라도 올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어제는 빈 우편함을지나오면서 생각했다. 최근엔 편지를 쓰지 않았는데 무엇을 기다린 것일까.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로 귀엽고 간편하게 쓸 수 있는 이모티콘이 편지를 대신하면서 아마 잊힌 것 같다. 마치 우편함을 괜히 들춰보는 것처럼 핸드폰의 연락처를 뒤적거리며 편하게 전화를 걸을 사람 없구나, 하며 잠시 스스로 애잔한 순간들이 많아진 것처럼.



  “네 편지는 재밌어. 글씨도 또박또박하고, 읽기도 좋아!”



  답장 대신 사람들이 편지에 대한 칭찬을 할 때마다 가려지지 않는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 다음 편지를 또 쓸 이유가 생김과 동시에 책장 구석에 편지지를 새로사서 채우는 습관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가 좁아지고 생활이 바빠지면서 습관도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스물 때는 오늘은 누구에게 쓸까 고민 아닌 고민을 하며 일기처럼 편지를 정성껏 쓰는 것에 몰두했다면, 서른이 된 지금은 책장에서 다른 것을 찾다가 편지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쓸 일이 없음에 조금 슬퍼하게되었다. 

  오늘은 문득, 책장에눈이 오래 머물렀다. 누군가를 위해서 펜을 들고 고민했던 순간에 내 모습을 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문장이 흐트러지거나 엉망이 될까 손에 힘을가득 주고 글씨를 더 예쁘게 쓰기 위해 노력했던, 우스꽝스러웠던 혹은 행복했던 순간을 더 적을 수 있어서기뻐했던 자신을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발신인도 수신인도모두 내가 되기로 했다. 




연 정 에게.


  스무 살이 되었다고 들떴던 네가 아직도 생생하다.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중고등학교 생활을 벗어나 완전하지 않지만 적당한 자유를 얻었던 그때엔 하고 싶어했던 것들을다 해보고 말 거라고 속으로 얼마나 다짐했는지. 그래도 알아, 네눈이 되게 불안했지. 본인의 기준에서 썩 좋지 못한 학교를 입학했고,별 생각없이 점수로 맞춰 과를 선택할지를 몰랐을 테니까. 그리고, 더 아파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들에 대해서.

  왜 스스로를 꽁꽁 묶어 두면서 채찍질을 해왔던 걸까, 엄마도 너를 그렇게 몰아 부치지도 않았고 친구들도 감히 너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아마 계속 병원에 다녀야 하는 너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아. 남들보다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다는 건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모자란 만큼 다른 것으로 채워야하는 부담감이 알게 모르게 생긴 거겠지. 다행인 건 매일을 잘 견뎌주고 있다는 거야.


  얼굴이 못 생겼다고 주변에서 구박받던 나의 얼굴을 스스로도 싫어해서거울조차 보지 못했던 나에게 미안해. 계단을 조금만 올라도 금방 숨이 차오르는데 숨소리가 크다고 말하는다른 사람들을 위해 눈치를 봤던 나에게 미안해. 오늘은 너무 슬퍼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던 순간이찾아와도 ‘괜찮아’라고 바보같이 웃었던 나에게 미안해. 사랑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잘 모르고 스스로를 남 앞에서 낮춰왔던 나에게 미안해.

그보다 제일 고마운 건 지금까지도 잘 웃어주고 너를 걱정하는사람들에게 더 건강해진 모습을 보이려 매일을 노력해주고 있다는 거야. 연 정아, 내일부터는 네가 너를 지금보다 더 많이 아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감정에 좀더 솔직하게 표현해. 한 편으로는 좀 안타깝더라. 누군가를좋아하면서 눈치를 너무 많이 봐서 마음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보다 네가 버려지지 않을 것에 대한 생각이 앞서 있다는 것. 관계를 잃을 때의 슬픔이 얼마나 아픈지 감히 말할 수도 없으면서 애써 덤덤한 척을 하며 속 쓰리게 울음을 참아왔다는것. 더 좋아하게 될까봐 갑자기 그 상황을 도망치는 것. 지금처럼이렇게 너를 위해 쓰는 편지가 어색해서 창피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꾸짖는 것. 올해부터는 안 그러기로맘 먹어봐. 인간의 감정은 숨기기가 어려운 본능적인 건데 자꾸 컨트롤을 하고 억누르니까 엇나갈 거야. 때로는 적당한 게 좋지, 아직 너가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서른이 된 연 정아, 곧다가올 봄과 네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에는 사진을 많이 찍자. 어딘가 어색하고 얼굴이 삐뚤삐뚤한 것 같아도웃고 있는 거면 다 가지고 있자. 내가 종종 핸드폰으로 찍은 셀카를 보다가 놀란 게 있는데, 정말 행복해서 웃고 있는 모습이 엄청 예쁘진 않아도 사진 자체는 꽤 괜찮더라.


  아직도 쓰지 못한 말이 남아있는데 더 쓰지는 않을게. 또 쓸 수 있는 날을 상상하면서, 이 첫 번째 편지를 마칠게. 안녕!



ㅡ 연 정이가. 




※ 스스로에게 쓰는 편지는 '로맨스는 별책부록'이라는 드라마가 영감을 주었습니다.






가끔은 드라마 한 장면이 나를 움직이게 하기도 한다.

그것이 기회가 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배움이 되기도 한다.

그 장면은 정말 이야기 속 조각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주인공에 숨겨진 작가의 생각이었을까.

이왕이면 후자이었음 좋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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