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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Sep 03. 2024

가이드, 은평

“그만하죠. 그쪽한테 줄 관심은 조금도 없는 것 같은데.”


기성이 창가 앞에 서서, 연신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가현을 보며 말했다.


“너무 귀엽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에요. 고양이.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게 저런 주황빛을 감고 있는 종들이고.”


‘똑똑똑.’


가현은 마지막으로 한 번,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고양이에게 인사를 건넨 후, 몸을 돌렸다.


“빨리 올라가죠, 이제. 근데, 찾던 건물이 여기인 건 확실해요?”


기성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가며 물었다.


“아니요. 일단은 저도 이곳이 초행인지라. 지도상으로는 여기라고 나왔어요. 확실히, 떠올리고 있던 이미지보단 낡아 보이긴 하지만요.”


가현이 위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위험하진 않겠죠? 저는 화를 풀려고 여행을 온 거지, 화를 당하려고 온 건 아니라서요.”


“사내새끼가 무슨 겁을 그리 내요. 냉큼 올라와요.”


가현은 먼저 계단 위로 걸음을 내려놓으며,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서 있는 기성을 향해 말했다.


“난 오늘 죽을 거야.”


지옥 길이라도 오르는 것처럼 기성은 후다닥 발을 올리며 가현의 뒤를 따랐다. 가현이 기성을 억지로 끌다시피 데려온 장소는 빌라에 가까운 한 건물이었다. 건물의 내부는 남루했다. 보통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살 만한 곳은 못 돼 보였다. 그 같은 느낌은 특히 계단 옆 창가에서 두드러졌다. 청소를 안 한 지가 적어도 3년은 된 듯한 모래와 먼지, 거미줄 자국…, 더럽다고 여기기에 충분하다 싶은 것들은 모조리 매달려 있었다.


“가이드란 사람이 이런 곳에 살 정도로 궁핍할 리가 없지 않아요? 이런 곳은 저 같은 사람이나 살 곳인데. 아, 다리 아파.”


뒤따라 올라오던 기성이 길게 다리를 앞으로 내밀며, 앞서 있는 가현을 향해 투덜댔다. 그에 가현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말했다.


“겨우 6층 올라가면서 뭘 그리 앓아요? 우린 몰래 온 손님처럼 초대받지 않은 존재들이라고요. 제발 좀 조용히, 그리고 입 다물고 따라와 줘요.”


“캐리어 안 보여요? 저에겐 그쪽이 맡긴 짐이 있어요. 아주 무겁다고요.”


그리고 그때, 기성에게서 반 둘레 정도 앞선 상태로 계단을 오르고 있던 가현의 걸음 소리가 멈추었다. 들리지 않는 발소리에 기성이 난간 옆으로 고개를 빼 들며 가현이 서 있는 곳을 향해 소리쳤다.


“왜 그래요? 뭐라도 찾았어요?”


건물 전체가 울릴 만큼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가현은 난폭한 어조로 기성을 다그쳤다.


“쉿! 쉿! 제발 조용히!!”


가현은 귓구멍을 문에 대고 있었다. 그를 본 기성은 가쁜 숨을 숨겨, 살포시 가현의 옆에 몸을 안착시켰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들이 그를 소리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들려요?”


문에 귀를 대고 있던 가현이 기성을 향해 물었다.


‘…칙, 치직, 치지직.’


미세한 잡음. 확실히 안쪽에서 어떤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소리의 크기가 너무나 작고도 미약해서 뭐라 단정하기는 어려웠지만, 가정에서 들릴 소리가 아니란 사실 하나만큼은 누구의 귀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지는 소리인데?”


가현을 따라서 문에 귀를 붙이고 있던 기성은 말했다.


“어디 땜질하는 소리 같은데요.”


그에 가현이 양손을 딱! 하고 부딪치며 기성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그거요! 저도 그걸 생각 중이었어요. 공방 같은 걸까요?”


“음. 건물 상태를 놓고 말하면 작업실의 용도로 세워져 있는 것 같긴 해요. 오히려 그게 맞지.”


“어? 소리가 커져요. 아니, 소리가 가까워져요. 꼭 문 앞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들린달까…”


나지막이 말을 뱉어낸 가현,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기성. 그 둘의 동공이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크게 뜨여졌다.


“헉.”


가현이 깜짝 놀라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이드라는 사람은 6층. 여긴 5층. 우리가 여기 온 의의는 그 사람한테 선빵을 날리는 데에 있잖아요? 이 집 사정 따위 전혀 알 필요도 없고.”


그에 기성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참나. 그쪽도 사실 겁먹고 있었잖아.”


그때, 소리가 났다. 굵은 쇠 막대 하나가 구멍에서 빠지는 소리. 쇳소리는 둔탁했고, 갈림이 있었으며, 친절하지 않았다. 가현은 기성의 팔을 붙잡았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은 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둘 앞에 제일 먼저 나타난 건 환한 빛이었다. 백색의 환한 빛은 안쪽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 기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정수리까지 올려 있는 보호안경,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각종 공구, 작업복 차림. 남자는 머리꼭지가 문 상단에 닿을 만큼이나 키가 컸는데, 머리를 짧게 쳐 놓은 탓에 머리카락이 눌리고 있지는 않았다. 몸통의 너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못해도 일반인 치수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묘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보기 싫고 좋고를 떠나, 선과 악을 불균형하게 휘저어 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기성의 뒤에 숨어 있던 가현이 앞으로 나오며 남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인사를 해 오는 가현과 그녀 옆에 가만히 있는 기성을 번갈아 바라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스무 번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에 버티고 서 있던 남자가 입을 뗐다.


“노인이 보내서 온 거요? 올 사람은 다 온 거로 아는데.”


평범한 목소리였다.


“노인이요? 아뇨, 저희는 그쪽과는 관련이 없어요. 6층에 사는 사람을 만나러 온 건데, 위로 올라가다가 무슨 소리가 들리기에 잠시 듣고 있던 것뿐이에요.”


“은…”


남자가 말하려는 순간, 가현이 그의 뒤편을 보더니 동그래진 눈과 함께 큰 목소리로 감탄을 뱉어냈다.


“우와, 저건 뭐예요? 전시회에 쓸 액자인가요? 너무 예쁘다.”


가현은 남자의 살집을 비집고 들어갈 듯한 걸음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가현이 남자의 곁으로 걸음을 내딛으려 하자, 기성은 그녀의 등을 붙잡았다.


“무척이나 근사한 액자이지. 부수기가 아까울 만큼.”


“부숴요? 액자를요? 저 정도 크기면 비용도 꽤 들었을 것 같은데. 전시가 끝나서 폐기하는 건가요?”


가현의 액자에 대한 물음이 계속됐다. 기성은 남자의 눈을 피해 가현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세게 꼬집었지만, 소용없는 행위였다.


“아니, 본래 그런 용도로 만든 물건이야. 그리고, 아직은 미완성이지.”


남자가 뒤의 액자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가현의 질문에 답했다. 그리고 그는 가현에게 질문을 건넸다.


“근데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거지? 왜 6층에 있는 보스를 만나려 하는 거야?”


“보스? 당신 보스 이름이 혹시 은평이에요?”


가현이 물었다.


“그래.”


“나는 그 사람 보스의, 보스의, 보스의, 외동딸이에요. 이름을 아실까 모르겠네.”


“어? 그럼 혹시…”


여기서 남자 얼굴 위의 회전이 멈추기 시작했고,


“그래요.”


여기서 완전히 회전을 멈추었다.


“아…, 아이고, 이런, 죄송합니다. 실물을 처음 뵙는 탓에 아가씨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마냥 천장에 붙어 있을 것 같던 남자가 머리를 한참 내리며 말했다.


“지금 위에 당신 보스 있어요?”


“네, 계십니다. 보스는 항상 오후 때나 집을 나서시거든요.”


기성의 인내는 거기까지였다. 남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기성은 가현의 목덜미를 콱 붙잡고 뒤로 당겼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기성은 남자에게 고갤 숙여 인사하고는 문을 닫았다.


“아! 정말! 왜 그래요? 뭐가 문젠데?”


가현이 문이 닫히자마자, 기성을 향해 칭얼대며 말을 토해냈다. 그리고 기성은 가현을 끌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기성은 문이 열렸던 곳을 쳐다보았다. 남자를 넣고, 문을 닫음과 동시에 그 앞을 가로막아 놓은 캐리어. 기성은 바퀴가 움직이지 않는지 확인했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기성은 가현에게 말을 건넸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내가, 아니 우리가 지금 여기 뭐 하러 왔는데. 당신 뒤밟는 인간을 덮치려고 온 거잖아요.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르고, 어떤 상황이 닥칠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저런 말단으로 보이는 사람한테까지 자기 신분을 노출할 수가 있어요. 내 말이 틀려요?”


그리고 기성은 몸에 들어간 힘을 유지했다. 꼭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가현은 기성의 화에 변명하지 않았다. 가현은 그대로 물러났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이 벌인 잘못을 고스란히 인정했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한 게 맞아요. 화내지 말아요.”


풀죽은 채 대답한 가현은 조심스레 기성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 주위를 토닥거렸다. 기성은 말했다.


“앞장서요.”


5층은 조용히 지나갔다. 그리고 도착한 6층.


“전혀 몰라요? 나이, 얼굴, 기타 등등.”


기성은 긴장한 듯 보이는 가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네. 여기 주소조차도 정말 천운에 가깝게 얻어 낸 거라서요.”


“최악의 경우라도 그쪽은 한 집안의 아가씨인데 총을 꺼내어 얼굴에 겨누진 않겠죠. 문제는 내 쪽이지.”


“걱정 마요. 총을 꺼내더라도 내가 그쪽 앞에 서 줄 테니까.”


가현은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


‘삑, 삑.’


투박한 생김새만큼이나 거칠고 억센 소리였다. 아무 소리가 없자, 가현은 손을 뻗어 다시 벨을 눌렀다.


‘삑, 삑.’


그리고 안에서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며 피어난 소리 같았다. 발소리가 차분하지 못했고, 속도가 몹시 빨랐다. 안에 있는 사람이 마치 자신의 성격을 미리 내보이는 것 같았다. 울리던 소리는 이내 잦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성과 가현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그때, 호탕한 남자의 목소리가 문의 너머에서부터 둘에게로 날아들어 왔다.


“누구세요?”


6층의 남자는 5층 사내와는 달리 주저 없이 문을 열지 않았다.


“은평이라는 사람을 찾아서 왔는데, 여기가 혹시 그 사람댁이 맞을까요?”


문은 가현이 말을 하는 도중에 열렸다. 잠금을 푸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잠가 놓지도 않은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나온 남자는 얼굴을 보일 새도 없이 곧장 허리를 굽혀 인사부터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저는 이번 여행의 안내를 맡게 된 가이드, 은평이라고 합니다.”


은평의 말은 총알 같았다. 그는 굽힌 허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생긴 것이 무척이나 샤프했고, 걸쳐 있는 옷맵시 역시 단정했다. 5층 사내와는 풍기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가현과 비슷한 나이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분위기 역시 엇비슷한 느낌이 없지 않아 존재했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지니고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가현은 자신에게 인사를 내민 은평이 허리를 올려 완전히 꼿꼿이 선 걸 본 후에야, 그에게로 말을 건넸다.


“본인이에요?”


“네, 본인입니다. 어유, 제가 먼저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어찌 이리 누추한 곳에 손수 방문하셨습니까?”


“방금은 놀라서 늦었지만, 원래는 제가 먼저 건네고 싶었거든요. 인사를.”


그리고 가현은 은평의 위아래를 한 번 훑고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는 걸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


“아하, 그러셨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먹을 걸 준비해 드릴까요? 그게 아니면…”


말을 하던 은평은 그제야 가현의 뒤에 서 있는 기성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듯한 눈망울을 보였다. 한 번에 현관을 열지 않은 조심성만큼이나 기성을 훑는 은평의 시선이 매서웠다.


“옆에 계신 분은?”


은평이 가현에게로 고개를 돌려 조심스레 질문했다.


“아, 이 사람? 당신이랑 같은 직종이야. 지역이 다르긴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기성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랄.’


“아! 그래요? 그럼 이따가 저와 함께 쌓여 있는 회포들을 같이 좀 풀어냅시다. 아니면, 절 좀 풀어 주세요. 이게 참, 입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들 하는데, 실상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셨구나.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가현과 기성은 서로를 한 번 힐끔 바라본 다음, 뒤로 물러난 은평을 따라 그의 집 현관으로 천천히 발을 내려놓았다. 은평의 집에 들어섰을 때, 그 둘의 눈을 가장 먼저 의심케 만든 것은 인테리어였다. 가구와 벽지 모두가 은은한 계열들로만 이어져 있었고, 티는 색이 어느 한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거실의 중앙에는 고급스러움만을 따온 소형의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조차 평범한 주황색 등이 아니었다. 커진 눈동자로 은평의 집을 보던 기성은 가현의 뒤에서 조용히 생각했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물건들 같다고. 자신과의 비교에서 이어진 질투와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기성은 조금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은평의 집이 급조된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 그러나, 그의 앞에 서 있는 가현은 그러지 않았다. 가현은 당장에 나서서 어색한 정적부터 깨부쉈다.


“저기요, 은평 씨.”


불만이 많은 목소리였다.


“네. 말씀하세요, 아가씨.”


은평이 현관 옆 비켜선 자리, 그곳에서 가현의 말에 대답했다.


“자기 집은 이런 식으로 깍듯이 쓰면서, 건물의 외관은 왜 그딴 식으로 방치해 놓은 거예요? 그쪽이 여기 건물주인 걸 알고서 하는 소리예요.”


은평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리곤 잠시 입을 우물거렸지만, 이내 처음의 미소 그대로를 곁들인 얼굴로 가현의 물음에 친절을 담아 대답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아가씨, 그건 말이죠. 뭐랄까, 말이 나온 김에 제가 어디 한번 적절한 비유를 찾아보죠…, 아! 그래, 미식가. 아가씨, 미식가란 무엇입니까. 값비싸고 질 좋은 음식만을 선별해서 자신의 입 안에 집어넣는 사람들이죠? 미식가 말입니다, 아가씨. 제가 그들과 같답니다. 저는 미식가예요.”


“그러니까 그쪽 말은 겉은 상관없고 속만 좋으면 되는 거다. 뭐, 그런 얘기예요?”


“네, 그렇죠! 역시 소문대로 머리가 좋으시군요. 제 말을 단번에 알아들으시다니. 아,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제가 어렵게 말을 하는 걸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거든요.”


“어렵게 말한다기보단 쉽게 말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 같아 보여요. 주변에 친절한 사람이 없었나 봐요. 이런 간단한 충고 하나쯤은 건네줬을 법도 한데.”


“하하하, 농담도 참. 그래도 염려 놓으세요. 제 전문 분야 하나만큼은 유치원생도 알아듣게끔 쉽게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니까요.”


“그래요. 일단 앉죠? 아까 말한 먹을 것도 좀 내와 줄래요? 우리가 아침 일찍 오느라 입에 뭘 제대로 넣질 못해서.”


가현이 벗은 외투를 소파로 내던지며 은평에게 말했다.


“물론이죠, 잠시만 쉬고 계세요. 미식가란 말이 미리 나왔지만, 실제로 제가 요리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대답한 은평은 현관에서 뒤돌아, 곧장 왼쪽 통로로 사라졌다.


“당황한 기색 하나 안 비추네.”


은평이 가자, 가현이 말했다.


“아니요. 소스라치게 놀라던데요.”


“엥? 어디가? 말의 높낮이도 일직선, 능글맞은 표정도 한결같고, 조금도 놀란 사람의 얼굴이 아니던데.”


“저 사람, 당황하면 웃어요. 그것도 크게. 우릴 처음 봤을 때 놀라지 않은 건, 이런 상황 정도쯤은 단련이 돼 있단 의미겠죠. 그게 아니면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았다거나.”


기성은 무심한 말투로 자신의 추리를 입 밖으로 뱉어냈다. 그리고, 현관 한쪽에 짐을 세우고서, 가현의 옆으로 다가와 소파 위에 팔을 걸쳤다.


“웃는다고요? 그랬나? 이따 한번 유심히 봐 볼게요. 그쪽 눈치가 확실히 좋긴 하네요. 지옥에서 배워서 그런지.”


“그래도 누굴 헤칠 인간은 못돼 보이던데요. 오늘 제 머리에 구멍 뚫릴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어?”


“응? 왜 그래요?”


가현이 기성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건 또 뭐야.”


“가이드라는 건 거짓이 아니었네요.”


소파 바로 위, 벽에 빼곡히 붙어 있는 갖가지 사진들. 그는 마치 물고기를 산 채로 비늘 떠, 그것 그대로를 붙여 놓은 듯했다. 그리고 사진 한 장에는 꼭 한 장의 포스트잇이 덧씌워져 있었다.


“꼼꼼히도 꼼꼼하다.”


가현이 사진에 붙은 포스트잇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기성은 가현을 따라 했다. 종이에 적힌 것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던 기성은 글씨의 굵기가 너무 일정하다는 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그날의 날씨, 동행했던 사람들, 느꼈던 모든 게 적혀 있어요.”


그에 기성은 물었다.


“이제 어쩔 거예요.”


“뭘요?”


“저 사람이 이따 나랑 같이 회포 풀자고 말한 거 못 들었어요?”


“그깟 장단 하나 못 맞출까.”


“눈치를 챈 걸 수도 있어요. 제가 그쪽의 가이드가 아니라는 걸 말이에요. 그쪽도 지금부터 바삐 머리를 굴리세요. 어떤 말들이 오갈 것이니, 그땐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해야겠다, 라고.”


“저는 머리가 좋아서 그때그때 반응하는 게 가능해요.”


그리고 왼쪽으로 사라졌던 은평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들은 둘은 대화를 멈췄다.


“아가씨, 그리고 우리 가이드 씨. 요리가 완성됐습니다. 드시러 가시죠. 참, 저희 집에는 식탁이 따로 없답니다. 주방을 보시면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메뉴가 뭐예요?”


가현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토스트와 밀크티로 준비해 봤습니다. 아침이니까, 과하지 않으시게끔.”


그 말에 가현이 기성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요리 잘한다더니, 고작 토스트라는데요?”


“대충 넘어가면 안 될까요. 그리고, 좋아한댔어요. 잘하는 게 아니라.”


“겁쟁이.”


그리고 가현은 계속해서 은평과 말을 주고받으며 안으로 걸어갔다. 기성은 뒤에 떨어져 말없이 걸음을 내밟았다. 가현이 왼쪽의 입구 가까이로 다가오자, 은평이 손짓했다.


“이쪽으로.”


주방은 널찍했다. 요리를 하는 데 필요한 기구와 향신료들이 각각의 몸집에 알맞은 곳에 걸리거나 들어가 있었고, 그 외에 불필요한 장식 같은 것은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요리를 하는 곳, 식사를 하는 곳, 둘의 경계선이 확실히 그어져 있는 곳이었다.


“자리는 여기에 앉으면 돼요?”


눈앞의 다리 긴 의자를 보며 가현이 말했다.


“네. 높이 조절이 가능하니, 몸에 맞춰 편히 앉으시면 됩니다.”


“일 얘기는 아무래도 식사가 끝난 뒤에 하는 게 낫겠죠? 먹다 체하면 앞다투어 화장실에 줄 선 꼴을 보게 될 테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도 약간 그런 상탠 것 같습니다. 아침 무렵부터 아가씨를 제집에서 직접 환영하게 되리라곤 꿈에서도 상상치 못 한 일이었거든요.”


은평이 가현이 하는 말에 호응하며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기성은 가현의 옆에 조용히 따라 앉으며 은평을 관망했다.


“그래요? 아까 놀란 기색 하나 안 보이던데? 신기하네.”


“그럴 리가요.”


거기 셋 가운데, 음식을 드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현과 은평,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되었다.


“사실 나도 놀랐어요, 울 아빠가 이렇게까지 나한테 비밀스러운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하하하, 역설이십니다. 저는 그저 가이드에 불과한걸요.”


은평이 전과 같은 웃음소리를 뿜어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집안에 많고 많은 사람이 있는데, 왜 하필 당신을 끌어다 쓴 거냐는 거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외부인이 필요할 만큼 집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가현이 고개를 돌리며 기성을 향해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기성은 간단히 대답했다.


“반대로 그쪽이 집안의 믿음을 못 사고 있는 걸 수도 있어요.”


“하하하.”


둘의 대화를 들은 은평은 웃음과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기성에게서 눈을 옮겨와 가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 가이드 씨와 원래 아시던 사이였던가 보네요. 아가씨께서 일반인과 말을 편하게 나누는 게 신기하여, 그만. 실례되는 질문이었을까요?”


그에 가현은 도리어 뻔뻔스레 얼굴을 쳐들고서 은평의 질문을 되받아쳤다.


“아, 이 사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야.”


“그럴 리가요?! 말을 트신 듯 보였습니다만…, 우리 친애하는 가이드 씨. 비결이 뭐예요? 인물이 좋은 편에 속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그거 하나로 통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기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평 씨.”


그리고 이어지는 가현의 목소리. 누가 들어도 싸한 목소리였다.


“당신이랑 잡설이나 나누려고 찾아온 거 아니야. 아빠가 당신한테 의뢰한 거, 그것만 말해. 그것만 들으면 끝나. 음식도 식기 전에 먹을 수 있고, 우리도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어. 선택해.”


“하하하. 제가 말해 드리지 않겠다는 선택지를 택하게 되면, 그땐 어떻게 되는지 여쭤봐도 될는지요?”


“당신이 아끼는 이 건물을 오늘 내로 짓뭉개 버릴 거야.”


그리고.


“그게 전부야?? 겨우 그런 걸 가지고 당신을 고용했다고? 우리 아빠가?”


가현이 상기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네, 틀림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회장님께서 저에게 의뢰하신 사안은 아가씨를 절대 '가족여행'에 참석하지 못하게끔 상황을 꾸며달란 것. 그게 제 할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해가 안 돼. 분명 다른 말이 있었을 거야, 잘 생각해 봐.”


가현이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그저 아가씨가 여행에 동행하지 못하게, 그런 상황만을 만들어 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반대여야 맞잖아. 설마하니 일가 식구들한테 나를 비추기 부끄럽다는 뜻이야? 그건 아니잖아, 그럴 순 없어.”


“진정하세요, 아가씨. 회장님께서 평소 무던하셔서 그렇지, 결코 그런 이유만으로 아가씨를 떼놓으려는 게 아니실 겁니다.”


그때, 기성이 토스트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말했다.


“아직 안 식었어요, 토스트. 그리고 제가 옆에서 말들을 들어 보니, 그쪽은 지금 신경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어 보여요.”


“가이드 씨의 말이 맞습니다. 과민 반응하지 마세요, 아가씨. 후에 보면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일로 변해 있을 겁니다.”


은평이 위로에 동참하며 말을 얹었다.


“맛이 어때요? 토스트.”


가현의 힘없는 목소리가 기성의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를 들은 기성은 따스한 얼굴로 가현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 맛있어요. 식기 전에 어서 들어요.”


그리고 가현이 처음으로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아닌, 낯선 세 사람이 함께하는 아침 식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용한 슬픔이 흩날려, 그 자체로 눅눅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다들 조용히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을 뿐, 말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기성은 빵의 텁텁함에 목이 막힘에도 물 한 잔 내어 달라는 말조차 뱉어내지 못했다. 기성은 계속 가현의 눈치를 살피며 가현의 먹는 속도에 맞춰 음식을 집어 나갔고, 가현의 움직임이 끝나는 때, 셋의 식사는 끝이 났다. 그리고 제일 먼저 말문을 열고 나선 이는 누구보다 빠르게 냅킨으로 입을 닦아 낸 은평이었다.


“다들 음식을 남기지 않고서 그릇을 비우신 걸 보니, 맛에는 문제가 없었나 봅니다.”


“잘 먹었습니다.”


가현은 은평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음. 제가 정말 분위기 돋우는 데만큼은 일가견 있는 사람인데, 지금 상황에선 도무지 뭘 시도키가 두렵군요. 이를 어쩐다…”


은평은 양팔을 교차시켜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이 있어요.”


기성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탁자 위로 보이지 않는 선을 그렸다. 은평이 바라봤고, 옆에 있던 가현 역시 기성에게로 고개를 돌려왔다.


“여기서 헤어지는 거예요.”


“하하…, 그렇겐 안 됩니다, 가이드 씨. 상황을 지금 여기서 끝내 버리면, 저는 회장 직통 명령을 무시한 사람이 되고 마니까요.”


은평의 높은 웃음소리가 다시금 주변을 울렸고, 뒤로 그의 구차한 말들이 이어졌다. 탁자에 올린 팔을 풀지 않은 채로 은평은 계속해 말을 이어나갔다.


“아가씨의 속상함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만, 저도 목이 걸려 있는 상황이라서요. 이대로는 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입을 다물게.”


내내 말이 없던 가현이 입을 뗐다.


“네?”


은평이 팔짱을 풀고서는 큰 눈으로 가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입을 다물겠다고. 여길 찾아온 것과 당신을 만났단 사실 모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당신은 당신의 일을 계속해. 그러면 문제없는 거잖아?”


가현의 말을 들은 은평이 되물었다.


“그 말인즉…, 연기를 하자는 말씀인가요?”


“아니. 각자가 해야 하는 일을 하잔 것뿐이야. 당신은 나를 여행에서 떼어 놓는 데 계속해서 심혈을 기울여. 그럼 되잖아.”


심각한 표정과 행동들. 은평은 불안을 느끼고 있음을 내비쳤다. 수 분이 지나고, 접시에 남은 찌꺼기들이 눌어붙으려 할 때쯤, 은평의 입술 사이로 말이 새어 나왔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죠. 다만, 제가 연기를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제 일을 하겠습니다.”


“그래, 좋아. 그럼 그렇게 알아들은 걸로 알고, 우리는 자리에서 그만 일어날게.”


그리고 가현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말을 덧붙였다.


“토스트 잘 먹었어. 맛있더라.”


은평이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왼쪽의 공간에서 걸어 나온 가현과 기성은 각자의 짐을 챙겨 들었다. 작별에 선 세 사람은 쓸모없는 말을 잇지 않았다. 은평은 현관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둘에게로 말없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케케묵고 더러움 가득한 건물의 전경이 둘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건물에 올라왔을 때처럼 가현이 앞장서 계단 위로 발을 내려놓았다. 둘은 한동안 서로에게 아무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3층과 4층, 그 중간 지점의 계단 부에 이르렀을 때, 기성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물음에 가현은 바로 대답했다.


“괜찮지 않을 건 또 뭐 있어요?”


“그래요? 그러면 다행이고. 난 또 주저앉아 펑펑 울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있었죠.”


“참나. 한번 울어 볼 걸 그랬네요. 반응이 궁금한데.”


그리고, 다시 건물의 1층. 입구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건물이 아니었지만, 유난히도 길가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기 전, 가현이 두드렸던 유리 너머의 고양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전, 제가 할까요?”


기성이 가현이 렌트한 샛노란 차의 운전대를 응시하며 물었다. 기성은 버림받은 사람의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단념의 자위가 끝날 때 찾아오는 먹먹한 패배감까지 겪어 봤기 때문에.


“멀쩡하다니까. 그리고 이젠 그쪽 갈 길 가도 돼요.”


“마음에 없는 소리 하는 걸 보니까 아직 완전히 못 돌아왔네.”


그에 가현이 뺨을 붉히며 기성을 향해 발끈 소리쳤다.


“뭐라고요?!”


“벌써 12시예요. 빨리 타서 좌표나 찍어요.”


기성이 차량 앞을 가로질러 운전석을 향해 가자, 투덜대던 가현은 어느 때보다 빨리 차에 몸을 실었다. 차에 시동이 들어오자, 기성은 가현에게 말을 건넸다.


“제가 큰일에 휘말린 듯한 기분이 쉴 새 없이 몰아쳐 들어오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인지를 모르겠어요.”


“어떤 느낌의 감정인데요? 좋은 쪽이에요? 아니면, 나쁜 쪽?”


“긴장이 느껴지고, 불안이 느껴지고,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중심엔 묘한 흥분이 들어앉아 있는데, 그것이 자꾸만 저를 괴롭게 만들어요.”


“그건 아마 그쪽이 조심스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 그럴 거예요. 근데 묘한 흥분이 들어앉아 있는 건, 그쪽 때문이 아니라 이쪽 때문인 것 같은데.”


가현은 운전대에 올라 있는 기성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렸다. 기성은 가현의 손에 담긴 온기가 타고 들어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기성은 따뜻한 그 손을 있는 힘껏 움켜잡았다. 그리고 가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주위에 누구 하나 나다니는 사람 없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외관의 건물 아래에 세워져 있는 작은 자동차 안. 그곳에서 두 사람은 그해 겨울의 누구보다도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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