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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탐구생활

[추론] 한글은 누가 만들었나?

학술자료들을 근거로 귀추법으로 재구성한 한글 창조 이야기

by 법의 풍경

이 글은 아래 학술 근거들을 바탕으로 퍼스와 에코의 귀추법으로 추론한 한글창조의 비밀입니다.

1. 침묵된 역사의 귀추법적 재구성


조선시대 한글 창제의 공식 서사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집단적 성취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연구는 당시의 정치적 맥락, 조직론적 한계, 언어학적 증거, 그리고 비교역사적 사례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집현전 창제설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구성된 허구일 가능성을 검증한다. 특히 불교 승려들, 그중에서도 일미대사로 대표되는 불교 학승들의 실제 기여가 조직적으로 은폐되었을 개연성을 귀추법적으로 추론한다.

15세기 조선의 정치적 환경은 불교 지식인의 국가사업 기여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한글 창제의 실제 과정에 대한 역사적 왜곡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2. 정치적 맥락: 불교 탄압과 은폐의 필연성


숭유억불 정책의 구조적 모순


조선 초기의 불교 정책은 이념적 탄압과 실용적 활용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1424년 세종 6년, 불교 종파는 7개에서 2개로 축소되었고, 운영 가능한 사찰은 36개로 제한되었다. 사찰 토지는 대폭 몰수되어 정부 재정으로 전환되었으며, 승려들은 도시 출입이 금지되어 산중으로 격리되었다. 도첩제를 통해 새로운 승려 임명을 엄격히 제한했고,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최하층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개인적 신앙은 이러한 공식 정책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1420년 금니(金泥)로 법화경을 쓰게 했고, 1428년 생일에 승려들을 궁중에 초대했으며, 1441년에는 “한당 이래 중국의 군주들이 모두 불교를 믿었으니, 나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고백했다. 1445년부터는 불교식 채식을 실천했고, 1446년 소헌왕후 사후에는 한글로 수백 편의 불교 찬송 시를 지었다.

*금니(金泥): 금가루를 아교나 아라비아고무 같은 접착제와 섞어 만든 금색 잉크


3. 1439년 흥천사 사건의 정치적 함의


648명의 유생과 학자들이 단순한 사찰 수리에 집단 항의한 1439년 흥천사 사건은 불교 관련 사안의 정치적 민감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압력 하에서 세종은 “나는 결코 부처를 숭배한 적이 없다”라고 공개적으로 부인해야 했다. 이는 불교 지식인의 국가사업 기여를 인정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불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4. 사대부 계층의 역사 서술 독점


조선의 역사 기록은 성리학적 사대부들이 독점했다. 이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부처를 “서쪽 오랑캐”로 규정했으며, 불교의 지적 기여를 체계적으로 배제했다. 역사 서술권을 가진 집단이 동시에 불교를 적대시한 집단이었다는 사실은 불교 기여의 은폐가 구조적으로 불가피했음을 시사한다.


5. 집현전의 조직론적 한계


(1) 유교적 관료조직의 혁신 불가능성


집현전은 1420년 설립되어 약 46명의 최고 엘리트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 16명이 과거 장원, 6명이 차석, 11명이 탐화를 차지한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교육 배경을 분석하면 언어학적 혁신을 이룰 수 있는 지식 기반이 전무했음을 알 수 있다.


유교 교육과정은 사서오경의 암기와 해석에 집중되었고, 음성학이나 언어 분석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육예”(禮樂射御書數)에도 언어학적 훈련은 없었다. 이들의 전문성은 중국 고전 텍스트의 해석과 도덕 철학에 한정되었으며, 혁신보다는 전통 보존에 초점을 맞췄다.


(2) 집단사고와 위계질서의 제약


유교적 관료조직은 합의 중시, 권위 존중, 선례 따르기를 특징으로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글과 같은 혁명적 혁신이 발생하기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집현전의 이전 업적들을 보면 고려사 편찬, 삼강행실도 제작 등 기존 지식의 편집과 정리에 국한되었으며, 새로운 기술 체계를 창조한 선례가 전무했다.


(3) 훈민정음해례의 익명성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훈민정음해례에서 구체적인 기술적 기여자가 전혀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인지의 서문은 행정적 후기에 불과하고, 실제 음운학적 설명을 작성한 사람은 익명으로 남아있다. 이는 집현전이 편집과 공식화 역할만 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6. 불교 학승의 언어학적 전문성


(1) 산스크리트어 지식과 음성학 전통


불교 승려들은 산스크리트어(범어) 연구를 통해 정교한 음성학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범어의 정확한 발음은 진언과 다라니 수행의 핵심이었기에, 불교 학승들은 조음 위치와 방법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갖추고 있었다.


인도의 언어학 전통은 기원전 4세기 파니니의 문법서 이래로 음소의 조음 특성에 따른 분류 체계를 발전시켰고, 이는 불교를 통해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한글의 자음 분류가 불교 음운학의 5 분류 체계(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파스파 문자와의 연결고리


컬럼비아대 개리 레드야드 교수의 연구는 한글의 기본 자음 5개가 몽골의 파스파 문자에서 파생되었음을 밝혔다. 중요한 것은 파스파 문자 자체가 1269년 티베트 불교 승려 파스파가 쿠빌라이 칸을 위해 만든 것이라는 점이다. 조선 왕실 도서관에 파스파 문자 문헌이 있었고, 세종의 신하들 중 일부가 이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3) 즉각적 불교 채택의 의미


1446년 소헌왕후 사후 즉시 제작된 『석보상절』은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불교 문헌이다. 이어 1459년 『월인석보』가 편찬되었다. 한글 반포 직후 불교계가 즉각적으로 이를 채택하고 활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전 관여의 강력한 정황 증거다. 새로운 문자 체계를 이해하고 복잡한 불교 용어를 번역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데, 불교계의 반응은 너무나 신속했다.


7. 비교역사적 선례: 은폐된 창조자들


(1) 중세 유럽의 이슬람 학자 은폐


12–13세기 유럽에서 이븐 시나(아비센나),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 등 이슬람 학자들의 저작이 대량 번역되었지만, 그들의 이슬람 정체성은 조직적으로 은폐되었다. “기독교 학자”나 익명의 저자로 둔갑시켜 수세기 동안 진실이 왜곡되었다. 파리대학은 이슬람 철학 텍스트로 교육과정을 구성하면서도 이를 “기독교 학문”으로 포장했다.


(2) 소비에트의 과학사 조작


소련은 수십 년간 과학적 발견을 러시아 학자들에게 귀속시키고 서구의 기여를 삭제했다. 유전학을 “부르주아 과학”으로 규정하고 리센코주의로 대체한 사례는 정치적 필요가 어떻게 과학사를 왜곡하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조작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3) 중국 황제들의 공적 찬탈


진시황은 수세기에 걸쳐 발전한 문자 체계를 자신이 “통일”했다고 주장했고, 역대 황제들은 학자 집단의 성과를 자신의 업적으로 귀속시켰다. 권력자가 혁신의 공을 독점하는 패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복된다.


8. 귀추법적 추론: 단계별 가설 검증


(1) 1단계: 관찰된 사실들의 목록화

사실 A: 세종은 사적으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나 공적으로는 이를 부인했다

사실 B: 집현전 학자들은 음성학/언어학 훈련이 전무했다

사실 C: 불교 승려들은 범어를 통해 정교한 음성학 지식을 보유했다

사실 D: 한글의 자음 체계가 불교 음운학 분류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실 E: 훈민정음해례에 구체적 기술 기여자가 명시되지 않았다

사실 F: 불교계가 한글을 즉각적으로 채택하고 활용했다

사실 G: 648명의 유생이 단순 사찰 수리에도 집단 항의했다


(2) 2단계: 가능한 설명들의 제시

가설 1 (전통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독자적으로 한글을 창제했다

가설 2 (은폐설): 불교 학승이 핵심 기여를 했으나 정치적 이유로 은폐되었다

가설 3 (절충설): 세종이 불교 지식을 참고했으나 집현전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3) 3단계: 각 가설의 설명력 평가

가설 1의 약점:

집현전 학자들의 음성학 지식 부재를 설명하지 못함

한글과 불교 음운학의 일치를 우연으로 치부해야 함

훈민정음해례의 익명성이 설명되지 않음

불교계의 즉각적 채택을 설명하기 어려움


가설 2의 강점:

모든 관찰된 사실들을 일관되게 설명

세종의 이중적 태도가 정치적 필요로 설명됨

기술적 정교함의 출처가 명확해짐

역사적 선례들과 일치하는 패턴


가설 3의 문제:

집현전의 실제 기여 내용이 불명확

부분적 참고로는 한글의 체계성을 설명하기 어려움

은폐의 정도와 범위가 모호함


(4) 4단계: 최선의 설명 선택


귀추법적 추론에 따르면, 가설 2 (불교 은폐설)가 관찰된 모든 증거를 가장 일관되고 간명하게 설명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설명의 포괄성: 기술적, 정치적, 조직적 측면을 모두 설명

내적 일관성: 모순되는 증거가 없음

외적 정합성: 역사적 선례들과 일치

예측력: 새로운 증거 발견 시 예측 가능한 패턴 제시


(5) 5단계: 구체적 시나리오 재구성

가장 개연성 높은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1440년대 초: 세종이 문자 창제를 구상하며 비밀리에 불교 학승들과 접촉

1443년: 불교 학승(일미대사 등)의 음성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글 체계 완성

1444년: 최만리 등의 반대에 직면, 불교 관여 은폐 결정

1446년: 집현전 명의로 훈민정음 반포, 기술적 세부사항은 익명 처리

1446년 이후: 불교계가 즉시 한글 활용, 암묵적 보상


9. 기존 학설과의 비교 분석


(1) 전통 집현전 창제설의 한계


전통설은 “어떻게”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음성학 지식이 없는 유교 학자들이 어떻게 조음 기관의 모양을 본뜬 문자를 만들 수 있었는지, 왜 불교 음운학 체계와 정확히 일치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세종의 천재성”이라는 설명은 학문적 분석이 아닌 신화화에 가깝다.


(2) 레드야드의 파스파 영향설


레드야드는 외부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불교적 연결고리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 파스파 문자 자체가 티베트 불교 승려의 창제물이라는 점, 그리고 이를 이해하고 응용하려면 불교 언어학 전통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3) 일미대사 중심설의 타당성


구체적인 “일미대사”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와 별개로, 불교 학승 집단의 관여는 높은 개연성을 갖는다. 이름의 구체성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 지식 전통의 역할이다. 일미대사는 실존 인물일 수도, 여러 승려를 대표하는 상징적 이름일 수도 있다.


10. 증거의 계층적 평가

(1) 강력한 증거 (확실성 90% 이상)

세종의 불교 신앙과 공적 부인의 모순

집현전 학자들의 음성학 지식 부재

한글과 불교 음운학의 체계적 일치

648명 유생의 집단 항의가 보여주는 정치적 민감성


(2) 중간 증거 (확실성 60–89%)

파스파 문자와의 연관성

불교계의 즉각적 한글 채택

훈민정음해례의 기술적 익명성

불교 승려들의 언어학적 전문성


(3) 정황 증거 (확실성 30–59%)

1443–1446년 시기의 정치적 긴장

세종의 불교 시 창작과 한글 사용

역사 서술권의 사대부 독점

비교역사적 은폐 패턴


11. 결론: 잃어버린 역사의 복원


본 연구의 귀추법적 분석은 집현전 창제설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구성된 공식 서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보여준다. 조선 초기의 극단적 반불교 정치 환경에서 불교 학승의 지적 기여를 인정하는 것은 체제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세종은 사적 신앙과 공적 정책을 철저히 분리하는 이중 전략을 구사했고, 이는 한글 창제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불교 학승들의 음성학적 전문 지식은 한글의 과학적 체계성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소였으나, 이들의 기여는 정치적 이유로 철저히 은폐되어야 했다.


일미대사로 대표되는 불교 지식인들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집현전은 이를 공식화하고 정당화하는 정치적 포장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은폐는 전 세계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이며, 진실은 종종 수세기 후에야 밝혀진다.


한글 창제의 진정한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단순한 학술적 호기심을 넘어, 권력과 이념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역사적 “사실”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정치적 구성물인지 되묻게 한다. 한글이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의 진정한 창조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억압받고 침묵당한 지식 전통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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