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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수단인가?

'나는 무엇을 위하여 오늘도 3시간밖에 못 자고 일하는가?'

by 법의 풍경

저는 이 글 말미의 <나는 무엇을 위하여 오늘도 3시간밖에 못 자고 일하는가>라는 정다훈 변호사의 글을 읽으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왜 우리는 늘 일을 ‘노동’과 ‘취미’, ‘의무’와 ‘놀이’로 갈라놓아야만 한다고 믿을까요?


이 구분 자체가 이미 근대적 시간관,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논리 속에서 형성된 것이지, 삶의 본질적 구조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의 에너게이아(energeia)는 활동 그 자체의 완성 속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즐거움을 위해 따로 시간을 배분할 필요 없이, 일 자체가 곧 놀이이고 자기실현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정 변호사님은 이미 그 길 위에 계십니다. 로펌에서라면 애 셋과 함께할 시간조차 잃었을 텐데, 지금은 가족과 함께 호흡하며, 동시에 글쓰기를 통해 자기표현을 이어가고, 자신이 선택한 고객과 함께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일과 놀이, 사적 삶과 직업적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융합된 상태, 철학적으로 말하면 ‘분할 이전의 충만’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사는가’라는 질문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은 이미 일을 ‘수단’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입니다. 삶의 어느 순간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매 순간이 목적 그 자체로서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고, 오히려 그 충만함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s. 저도 그랬지만 로펌 저 연차 변호사 중에 하루 3시간 밖에 못 자는 경험을 하지 않은 변호사는 거의 없을 겁니다(물론 무능해서 일이 없는 경우 제외). 제가 아는 한 변호사는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자고 일하다 쓰러져 병원 실려가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변호사에게 멘붕이 오는 순간은 일이 없을 때입니다. 나를 찾는 고객이 없고, 로펌은 망해가고, 집에 가져다주는 돈이 없어질 때 진정한 위기가 옵니다. 초창기 개업 변호사들이 많이 겪는 어려움이죠. 따라서 개업초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3시간 밖에 못 잘 정도로 일이 있다는 건 축복입니다. 많은 로스쿨생들이 정 변호사를 부러워할 겁니다.


에너게이아 (Energeia)란?

• 어원: 그리스어 en (“안에서”) + ergon (“작용, 일, 일함”) →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는 뜻.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어떤 것이 잠재성(dynamis)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성(entelecheia)으로 실현된 상태.
• 예시:
악보만 들여다보는 것은 잠재성(dynamis). 피아노 건반을 실제로 두드려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이 에너게이아. 건강을 위해 달릴 수 있는 능력은 잠재성. 실제로 지금 당장 달리고 있는 행위가 에너게이아.

즉, 에너게이아란 “잠재성이 아닌, 지금 여기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활동적 충만”을 뜻합니다.

왜 중요한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의 행복(유다이모니아, eudaimonia)은 단순히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무엇을 성취했는가 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즉 활동 그 자체”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는 축소된 삶이고, “일하는 지금의 순간이 즐거움이고, 이미 목적 그 자체로 충만하다”는 상태가 바로 에너게이아적 삶입니다.


정리하면, 에너게이아는 “행위 그 자체 속에 목적이 충만하게 드러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13314575638?e=1759968000&v=beta&t=pARxEoIB7u8kMiefZHIJU164Vjhqj7TPXGE-bujkoDI 정다훈 변호사

<나는 무엇을 위하여 오늘도 3시간밖에 못 자고 일 하는가>

제목이 좀 자극적이네요. 원래 글 올리는 날도 아니지만 오늘 이래저래 이 것에 관하여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어서 일하다가 잠깐 쉴 겸 글을 써 봅니다.

* * *

미국에서 10년을 넘게 살며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삶을 살아왔던 사람 치고 저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일 큰 이유는 비행기멀미입니다. 한 때 비행기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물도 간신히 먹을 정도로 비행기멀미를 심하게 겪었는데, 한국에서 미국 또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고 내리면 그 것만으로 최소 2kg는 빠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절약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오며 "가성비"를 신경쓰는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여 왔다 보니 일을 위하여 필수적으로 하여야 하는 여행이 아니라면 같은 시간과 돈을 다른 데에 쓰기 마련이었습니다. (변호사 업무 등으로 저를 겪어보신 분들은 놀라시겠지만) 성향 자체가 집돌이 스타일이라 어디 안 나가고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컸습니다.

그러다보니 최근 몇 번 영업차 커피챗 또는 미팅을 하면서 해외 여행 경험에 관하여 얘기가 나올때마다 "아 저는 거기 안 가봤어요"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친동생이 지금 취리히에 있는데 취리히는 커녕 유럽 대륙 자체를 가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2011년에 잡인터뷰 하러 런던에 갈 기회가 있었어서 1주일을 잡고 4일 런던 3일 파리를 갔다오는 일정으로 여행을 하는 동안 파리에 잠깐 있었던 것이 저의 유럽 경험의 전부입니다.

급기야 오늘은 "어떻게 그렇게 안 다니고 사셨어요" 라는 말 까지 들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바쁘게 살았다곤 해도 뭔가 인생의 크고 중요한 부분을 너무 놓고 살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더라고요.

* * *

저랑 사적으로 절친한 지인 중 하나는 인천에서 큰 규모의 안과병원을 운영하고 계시면서 진료실 안에 고가의 기타와 앰프 등 장비를 여럿 늘어놓고 살고 계십니다. 환자가 잠깐잠깐 끊겨 진료가 없을 때마다 기타를 치시며 즐기신다고 하시고 일부러 일찍 출근해서 열심히 연습하시기도 하시는데 덕분에 실력도 아마추어로서는 상당한 편입니다.

이 분은 밴드 드림시어터의 기타리스트인 존 페트루치의 광팬입니다. 국내에서도 워낙 인기가 많은 밴드이고 연주자다보니 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매우 어렵지만) 그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분처럼 존 페트루치의 시그내처 모델을 넘어 존 페트루치가 실제로 사용하는 기타와 앰프와 같은 종류의 제품을 신품으로 구매하여 사용하고 계시는 분은 극소수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저 앰프와 기타의 구매가 약 한 달 반 남짓 하는 기간 동안 반 충동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그만큼 벌고 계시기에 가능하신 일이지만 본인께서도 저 정도의 소비는 많은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충동구매(?)가 맞는 것인지에 관하여 (저와 여러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고민하긴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구매한 기타 사진을 단톡방에 올리면서 얘기하더라고요. 자긴 하고 싶은 것 하고 살려고 이 골방에서 이러고 있는 것이라고요. 자기 진료실을 "골방"이라고 자주 폄하(?)하시지만, 진료받으러 직접 가봤는데 골방과는 거리가 먼 아주 산뜻한 인테리어의 넓은 진료실입니다.

그 얘기를 들은 순간 갑자기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러고 있는 것일까. 기타 실력은 물론이고 기타에 관한 열정과 애정이 저 분에게 뒤지지 않을 것 같은데 정작 저는 지난 2년 동안 30분 이상 기타를 친 횟수가 딱 세 번에 그치고 있습니다. 무대에서 기타를 치는 꿈을 그렇게 자주 꾸고 있는데, 뭔가 이게 맞나 하는 생각까지도 드네요.

* * *

업무와 영업, 그리고 육아를 병행하려다 보니 스스로를 잘 돌보지 못한 세월이 길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건강 유지를 위하여 최소한으로 하고 있는 운동과 식이요법을 제외하면 가용시간이 생기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밀린 잠을 자는 것이더라고요. 취미생활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저만을 위하여 가장 제가 하고 싶은 것들만 골라서 24시간을 보내본 것의 마지막이 언제였나 생각해보니 코로나 감염으로 인하여 1주일간 격리되었을 때더라고요. 마침 그 때가 크래프트테크놀로지스에서 업무를 시작하기로 한 주였는데, 그 일로 인하여 출근일이 1주일 뒤로 미루어졌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격리기간 동안 힘들었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저는 원없이 책보고 원없이 악기치고 원없이 게임하고 원없이 글쓰고 채팅하고 원없이 그간 해보고 싶었던 것들 다 해보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달에 애들 데리고 외갓집에 갔을 때 애들은 본인과 처제와 장모님이 볼 거니까 저는 하룻밤이라도 집에 와서 편하게 지내다 오라고 아내가 저를 집에 혼자 보내는 파격적인(?) 휴가를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집에 와봤는데 어색하더라고요. 일단 그 날 애들 재우면 밤에 혼자 하려고 했던 업무를 빨리 처리를 할 수 있었는데 그러고도 시간이 꽤 남았지만 코로나 격리기간 때처럼 책을 보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게임을 하고 그러지를 못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써본 적이 너무 오래 전이라 어떻게 충분히 즐길 수 있는지를 까먹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그냥 어영부영 시간 보내다가 푹 자고 다음날 대중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자마자 바로 애들 외갓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나를 위하여 쓸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때가 올 것도 같은데 그 때 뭐를 해야 할 지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런 시간이 생기면 더욱 아내와 애들을 위하여 쓰거나 아니면 커리어를 위하여 투자할 것만 같습니다. 예전에 봤던 여러 글이나 들었던 여러 얘기에 의하면 이게 별로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에 관하여 링크드인에 계신 여러분들께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아마 저와 같은 경험을 해보신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 어떻게 대처를 하였는지에 관하여 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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