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대한변호사협회 미국법 전문가 연수실에서 들은 한 마디가 내 인생을 바꿨다. 강용석 변호사가 던진 말이었다(강용석이 유명인으로 뜨기 전이다).
"하버드는 추천서 잘 받으면 그냥 가요. 송상현 변호사님 추천서 받으면 그냥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무조건 패스예요. 저도 지인 통해서 받았서 하버드 들어간 거지 뭐 공부 잘해서 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버드에 너무 쪼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뉴욕주 변호사 시험도 족보가 다 있거등요. 한국 변호사들은 다들 성실하고 똑똑해서 쉽게 붙어요.“
그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나에게 하버드는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그 신화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단순한 개인적 일화가 아니라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협상학의 탈(脫) 하버드 현상은 이미 유럽 학계에서 진행되고 있던 거대한 패러다임 시프트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하버드 협상론이 곧 협상의 정답이라고 믿어왔다. 하버드 협상 프로젝트가 1979년 로저 피셔(Roger Fisher)와 윌리엄 유리(William Ury)에 의해 설립된 이후, 그들의 저작 『Getting to Yes』¹는 협상의 바이블이었다.
하버드 협상론은 다음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 사람과 문제를 분리하라 (Separate the people from the problem)
- 입장이 아닌 이익에 집중하라 (Focus on interests, not positions)
- 상호 이익을 위한 선택 안을 만들어라 (Generate options for mutual gain)
- 객관적 기준을 사용하라 (Use objective criteria)
하지만 뇌리에 남아 있던 강용석 변호사의 말은 내게 계속 영향을 미쳤다. 정말 하버드가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들이 주장하는 협상 이론도 그렇게 절대적인 것일까? 이런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협상/조정교육을 받았던 네덜란드 The ACADEMY of Legal Mediation (part of Toolkit Company)의 국제조정인 Manon Schonewille와의 인터뷰)
전환점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Toolkit Company에서 받은 교육이었다. 국제적인 협상과 조정 기법을 배우고, IMI에서 국제조정인 인증을 받기 위한 교육이었는데, 거기서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하버드 스타일? 그건 올드패션이에요."
강사의 말이었다. 유럽의 협상학계는 이미 하버드 스타일을 "올드패션"으로 간주하고 있었다(극적인 묘사를 위해 제 기억이 과장되었을 수 있습니다).
유럽의 협상학자들이 하버드 모델을 비판하는 핵심적 근거는 문화적 다양성과 신경과학적 발견에 있었다. 최근 연구들은 협상에서 문화가 미치는 영향이 단순히 표면적 차이가 아니라 인지 과정과 의사결정 메커니즘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².
이후 협상공부를 심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공부를 하다가 Aslani 연구팀의 연구³를 확인했다. 국제 협상의 세계는 깊고도 넓었다. Aslani 등의 연구에 따르면, 국제 협상에서 문화적 차이는 세 가지 차원에서 나타난다:
존엄(Dignity) 문화: 미국, 캐나다, 북유럽 등 개인주의적 가치를 중시하며 직접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을 선호
체면(Face) 문화: 동아시아 지역의 간접적이고 관계 중심적 접근
명예(Honor) 문화: 중동, 북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집단적 명예와 상호 의존성 중시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협상 과정에서 정보 교환 방식, 신뢰 구축 메커니즘, 갈등 해결 선호도에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협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 것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추구해 온 것이 진짜 협상의 본질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한국인인 내가 서구식 협상법만 고집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도.
IMI(International Mediation Institute) 인증에 도전하기로 결심했을 때, 솔직히 겁이 났다. 내가 성취한 가장 중요한 자격 중 하나가 될 국제조정기구(IMI) 인증 조정인 및 조정대리인 자격이었다. IMI는 20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립된 비영리 재단으로,
전 세계 유일의 초국가적 조정 전문가 인증 기관이다⁴.
IMI의 인증 과정은 그 엄격함으로 유명했다. 내가 직면해야 할 과정을 보고 나서 더욱 막막했다(Qualified Mediation Advocate/Mediator자격은 교육과 모의 조정 합격만으로 받을 수 있고, Certified Mediation Advocate/Mediator는 아래 요건을 모두 갖추어야 했다):
기본 교육 이수: IMI 승인 교육기관에서의 고급 조정/협상 교육
실무 경험 증명: 최소 10건 이상의 협상, 조정을 통한 분쟁 해결 경력
추천서 20개: 실제 협상, 조정 당사자들로부터의 추천서
독립 평가: 교육기관 소속 이외의 국제조정인 2명에 의한 추천서 객관적 평가
모의 조정 시험: 2시간 동안의 실제 조정 과정 시연
특히 실제 협상 당사자들로부터 추천서를 20개나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봤을 때, '과연 내가 도움을 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까? 그들이 정말 추천서를 써줄까?'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분쟁 해결에서 ’인간성(humanity)’의 가치를 일깨워준 호주의 국제조정인 조안나 칼로프스키(Joanna Kalowski)와의 인터뷰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그녀가 들려준 호주 원주민들과의 조정 경험은, 문화적 차이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존중하는 것이 조정 과정에서 얼마나 본질적인 요소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IMI의 접근법이 기존 하버드 모델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다문화 역량(Intercultural Competence)을 핵심 요소로 설정했다는 것이었다⁵. IMI의 다문화 역량 태스크포스가 제시하는 핵심 원칙들을 배우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문화적 자각성(Cultural Awareness): 자신과 상대방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깊은 이해
적응적 의사소통(Adaptive Communication):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의사소통 스타일에 대한 유연한 대응
가치 체계 인식(Value System Recognition): 서로 다른 가치 체계 간의 충돌과 조화 가능성 탐색
문화 심리학(Cultural Psychology)은 문화가 개인의 인지 과정, 감정 표현, 행동 패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협상 맥락에서 중요한 발견들은 다음과 같다:
-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침묵'이 숙고를 의미하지만, 서구에서는 거부 신호로 해석됨
-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합의 도달 과정이 개인주의 문화보다 더 오래 걸리지만, 합의 후 이행률이 높음
- 권력거리가 큰 문화에서는 위계질서가 협상 테이블 배치와 발언 순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그때 나를 도와준 건 첫 번째 로펌에서 만난 스승의 독특한 교육법이었다. 나의 협상 능력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도제식(徒弟式) 교육이었다. 내 스승이 실행한 "벼랑 끝 교육법"은 단순한 스파르타식 훈련이 아니라, 변증법적 학습 과정의 정교한 구현이었다.
그분은 나에게 세 가지를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논리적 사고의 촉진: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한 비판적 사고 능력 배양
자율성의 부여: "네가 알아서 해라"를 통한 독립적 의사결정 권한 이양
책임의 보장: "내가 책임질게"를 통한 안전망 제공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알아서 하라니?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얼마나 정교한 교육법인지 깨달았다. 이는 존 듀이(John Dewey)의 경험주의 교육론과 비고츠키(Vygotsky)의 근접발달영역(Zone of Proximal Development) 이론을 실무에 적용한 탁월한 사례였다⁶.
스승은 나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안전망을 제공해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었다.
존 듀이는 20세기 초반 미국을 대표하는 교육 철학자로, 경험주의 교육론을 통해 전통적인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고, 학습자가 직접 경험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고와 행동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 경험 중심 교육: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실제 경험을 통해 학습하며, 현실 세계에서 체험하고 탐구하는 것을 강조한다.
- 사회적 상호작용: 학습은 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학생들이 서로 협력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 문제중심 학습: 학생들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며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지식과 기술을 실용적으로 응용한다.
- 학습과 생활의 통합: 교육은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하며, 추상적인 지식보다는 실제 경험과 연결된 학습이 중요하다.
비고츠키는 러시아의 심리학자로, 아동의 인지발달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의 대표적 개념인 근접발달영역(ZPD)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 근접발달영역(ZPD): 아동이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능력(실제적 발달 수준)과, 유능한 타인(교사, 또래 등)의 도움을 받아 도달할 수 있는 능력(잠재적 발달 수준) 사이의 영역을 의미한다.
- 스캐폴딩(비계 설정): 교사나 또래가 아동의 현재 수준에서 도달 가능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는 과정이다.
- 사회적 상호작용의 중요성: 인지발달은 개인적 요인뿐 아니라 사회적 맥락, 특히 언어와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 협동학습: 다양한 능력을 가진 학생들이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할 때, 서로에게 발판이 되어 더 높은 수준의 학습이 가능하다.
IMI 인증 준비 과정은 쉽지 않았다. 추천서 작성을 부탁하고, 바쁜 분들에게는 내가 먼저 추천서 초안을 작성하느라 진땀을 뺐다. 가족들은 걱정했다.
“무슨 추천서를 20명한테 받아오라는 자격증이 다 있어? 장관도 그 정도는 요구 안 하겠다. 참 유별난 기관이네”
아내의 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위공직자에 응모한 적이 있는데 당시 국정원은 내 전력을 확인하기 위해 전 직장 동료들 6명을 면담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뭔가 더 큰 것을 향한 갈망이 있었다. 한국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그것이 사명감을 가장한 이기심인지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맥쿼리에서 법무 및 지배구조 팀장으로 일하면서 정말 다양한 협상을 경험했다. 그 11년간의 경험은 협상 능력을 몇 단계 진화시키는 결정적 계기였다.
하지만 딜팀과 함께 대규모 분쟁을 처리할 때의 그 떨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특히 다음과 같은 복합적 분쟁들을 해결한 경험들은 기억에 남는다:
사회기반시설 민자사업 관련 대정부 협상: 주무관청과의 사업재구조화 협상, 실시협약상 분쟁 해결 협상
M&A협상: PE팀의 매물 발굴 초기단계부터 MOU체결, 실사, 주식매매계약, 인수 이후 분쟁관리, 공동주주와의 기업지배 및 운영갈등 관리, 주식 매각, 매각 이후 매수인과의 분쟁 관리 등 펀드의 딜 발굴과 펀드레이징 단계부터 펀드 청산 단계까지 펀드의 전체 life cycle 관리
주주 간 분쟁(Deadlock) 해결: 운용팀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Deadlock상황을 간 타 주주사 법무임원과 장외 협상을 통해 해결
상장회사 소수주주운동에 대한 방어(Shareholder Activism): 상장펀드의 운용권을 빼앗기 위한 적대적인 공격에 대한 방어활동과 협상
대형상업시설 화재사고: 30여 건의 각종 보험, 민사, 형사 사건을 초기 협상을 통해 해결 시도하고, 통합적으로 관리하여 전부 승소
북파공작원 단체와의 협상: 특수임무유공자회의 물리적 실력행사에 대한 대응과 협상
특히 펀드가 투자한 회사 내의 주주 간의 갈등은 미묘한 한국 기업의 정서와 외국계 기업의 정서가 충돌하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각지대였다. 운용팀 내부에서도 불법에 응할 수 없고 갈 때까지 가자는 의견과 한국에서 계속 사업하려면 적당히 타협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이 드물지 않았다.
‘불법과 탈법이 아니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틀 밖의 대안은 없는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때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책임질게."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구체적인 내용은 변호사윤리에 어긋나 이야기할 수 없는 점 너그러이 이해 부탁드립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협상은 특수임무유공자회와의 협상이었다. 이건 단순한 비즈니스 협상이 아니었다. 관련자들의 자살,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 수사관에 대한 압수수색, 경찰 정보팀장의 위험 경고, 형사처벌, 생명/신체의 위협이 연루된 일반적인 비즈니스 협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심리적, 역사적, 정치적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극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물리적 실력행사도 불사했다. 일반적인 협상 기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상대들이었다. 여기서 내가 깨달은 건, 협상이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기억, 트라우마, 생존에 대한 절박함까지 이해해야 하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나에게 다층적 분쟁 해결 능력을 제공했다. 그 협상을 마치고 나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정말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걸까? 기법만 익혔을 뿐, 협상의 진짜 본질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다 보면 정체성의 혼란이 올 수 있다. 하지만 서구의 협상 기법을 배우면서도, 내 안의 한국적 가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 협상 접근법은 이러한 신경과학적 발견들을 실무에 적용한 혁신적 모델이 되어갔다. 나는 다음과 같은 다층적 분석을 포함하는 나만의 프레임워크를 개발했다:
문화적 배경 분석: 상대방의 출신 문화에 따른 가치 체계와 의사결정 패턴 파악
개인적 특성 평가: 문화적 배경을 넘어선 개인의 고유한 성향과 경험 고려
상황적 맥락 해석: 협상이 이루어지는 구체적 환경과 제약 조건들의 영향 분석
시간적 차원 통합: 단기적 목표와 장기적 관계 구축의 균형점 모색
'눈치'. 한국인은 상대방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그 의도를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정(情)'이라는 감정적 유대. 이런 것들이 과연 국제 협상에서도 유효할까?
IMI의 다문화 역량 기준을 공부하면서 깨달았다. 문화적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인정하고 활용하는 것이 진정한 국제적 역량이라는 것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러한 한국적 특성을 이해하면서도 국제적 표준에 부합하는 협상을 수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문가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면 착각이었을까?
한국은 유교적 전통과 서구적 근대화가 결합된 독특한 협상 문화를 가지고 있다:
- 눈치: 명시적 표현 없이도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능력
- 정(情):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감정적 유대가 협상 결과에 미치는 영향
- 체면: 공적 이미지와 사회적 지위에 대한 고려
- 빨리빨리 & 결과 중심문화: 신속한 의사결정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결과 도출 중시
전환점은 아시아 국제조정의 일인자 조지림(George Lim)을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을 때였다. 그는 싱가포르의 저명한 외교관 출신으로, 토미 코(Tommy Koh)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토미 코는 아시아의 전설적인 외교관이자 협상가였다.
조지림이 들려준 토미 코의 협상 철학은 내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국가 간의 협상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이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외교협상 분야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의 협상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상업적 분쟁 해결에 국한되지 않는 이유는 접근법이 본질적으로 외교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관계학에서 협상은 국가 이익 추구와 평화 유지라는 이중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고도의 기예다⁸.
현대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는 문화적 감수성(Cultural Sensitivity)이다. 2019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국제 협상에서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능력이 협상 성공률을 상당 수준 증가시킨다고 한다⁹.
물론 내가 외교관이 되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외교 분야에서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다중 법체계 이해: 대륙법과 커먼로 법체계에 대한 깊은 이해(올해 3월 치른 캘리포니아 변호사 시험 합격)
언어적 역량: 각종 국제회의, 세미나 등에서 영어 발표, 토론에서 증명된 원활한 영어 소통 능력, 호주 맥쿼리 본사에서의 발표 경험
국제기구 경험: IMI, WIPO, SIMC 등 국제기구에서의 활동 경력
아시아 지역 전문성: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태생적 이해와 서구 문화에 대한 학습된 지식의 결합
특히 한반도 문제나 동북아시아 지역의 복합적 갈등 상황에서 문화 간 중재 능력은 매우 유용할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 프로젝트 "까꿍"도 이러한 기반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IMI 인증을 받았을 때의 그 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단순한 자격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밀려왔다.
'정말 내가 이 인증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성취의 기쁨과 함께 찾아온 것은 더 큰 책임감이었다. 이제 나는 한국을 대표하는 협상, 국제조정 전문가로 불리게 될 텐데, 과연 그만한 실력과 인격을 갖추고 있는가?
나의 여정은 협상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20세기 후반을 지배했던 하버드 모델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21세기 협상학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신경과학적 접근: 뇌과학 연구 결과를 협상 전략에 통합
문화심리학적 통찰: 문화적 차이를 표면적이 아닌 근본적 차원에서 이해
시스템적 사고: 개별 협상을 고립된 사건이 아닌 더 큰 시스템의 일부로 파악
지속가능성 관점: 단기적 승리보다 장기적 관계와 상호 번영 추구
내 경험과 접근법은 통합적 협상 이론(Integrative Negotiation Theory)의 발전에 기여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고 자평한다:
다문화적 감수성(Multicultural Sensitivity): 협상 당사자들의 문화적 배경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협상 전략에 반영
법률적 정밀성(Legal Precision): 복수의 법체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교한 협상안 설계
관계적 지속성(Relational Sustainability): 일회성 거래가 아닌 장기적 파트너십 구축을 지향
상황적 적응성(Contextual Adaptability): 각 협상의 고유한 맥락과 제약 조건에 맞춘 맞춤형 접근
지금까지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나는 끊임없이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고민해 왔다. 서구의 체계적 이론을 배우면서도, 동양의 직관적 지혜를 포기할 수 없었다.
Kapoutsis 연구팀⁷의 신경과학적 접근이나 Putnam의 이중게임 이론⁸ 같은 최신 연구들을 접하면서, 협상학이 얼마나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지 실감한다. 하지만 동시에 느끼는 것은,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 없이는 진정한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갈등해소와 조정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알게 해 준 남미 페루 출신 호주 국제조정인 Delcy Lagones de Anglim와의 인터뷰
Kapoutsis, Volkema, Lampaki (2017)의 연구는 협상 개시 단계에서 감정(affect)이 미치는 영향을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주요 발견들: 감정 상태가 협상 개시 의사결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침, 권력 비대칭 상황에서 개인의 감정적 특성이 협상 전략 선택을 좌우함, 뇌과학 연구 결과를 통해 협상자의 인지 과정과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
Robert Putnam (1988)이 제시한 이중게임 이론은 국가의 대표가 두 개의 협상 테이블에서 동시에 게임을 해야 하는 상황을 설명한다:
예시: 한국 대통령이 미국과 FTA를 협상한다고 가정.
- 1단계 게임 (국제): 미국 대표와 앉아서 "관세를 몇 %로 할까?" 협상
- 2단계 게임 (국내): 돌아와서 국회, 농민, 기업들에게 "이 협정 어때?" 설득
핵심 포인트: 국제협상에서 아무리 좋은 합의를 해도, 국내에서 반대하면 무용지물, 협상가는 "국내에서 통과될 수 있는 선"을 미리 계산해야 함, 때로는 "우리 국민들이 반대해서 안 된다"고 핑계를 대며 더 유리한 조건을 얻기도 함
M&A협상에서 흔한 외국계기업의 이중게임 이론 역활용:
“저희는 매수인이 지적하는 사항이 일견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글로벌 본사의 방침이라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 글로벌 본사 방침임은 확인하기 어려움. 내부 비밀문서라 외부 반출이 안된다고 핑계. 진짜인지 확인이 불가능한 내용.
외국계 기업이 협상장에서 흔하게 레버리지함.
돌이켜보면 내 여정은 완벽하지 않았다.
실수도 많았고,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다.
강용석 변호사의 말로 시작된 이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구의 체계적 이론과 동양의 직관적 지혜,
그리고 현대의 과학적 발견들을 하나의 통합된 접근법으로 결합시키고 싶다.
많은 한국인들이 여전히 하버드를 무비판적으로 숭배한다. 하지만 유럽식 접근법과 같은 비판적 사고와 실증적 경험을 통해 시야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한 서구 추종이 아니라 글로벌 표준에서의 최신 동향파악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나는 이러한 유럽식 접근법을 한국적 맥락에 맞게 재해석하고 발전시키고 싶다.
단순한 이론의 적용자를 넘어서 새로운 협상 패러다임의 개척자가 되고 싶다.
Caputo 등의 최신 연구⁹처럼 문화적 지능과 협상 스타일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나도 그 발전의 흐름 속에서 계속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한다. 진정한 협상은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 나은 길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하버드 협상론에서 시작해서 유럽의 진보된 이론을 거쳐, 결국 도달한 것은 이 단순한 진리였다.
21세기는 문명 간 대화와 협력이 인류 생존의 관건이 되는 시대다. 이러한 시대에 문화 간 조정 전문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나는 한국이 글로벌 사회에서 문화적 교량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배우고 성장하고 싶다.
한국적 지혜와 국제적 표준 사이에서,
이론과 실무 사이에서,
개인의 성공과 사회적 기여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이 평생의 과제가 아닐까?
이론과 실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통합적 사고를 바탕으로 협상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싶다.
완벽한 답은 없지만, 진솔하게 고민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P.S. 싱가포르 국제조정협약의 이행법률이 내년이면 통과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한국은 아직 조정기본법도 없고, 조정윤리도 없고, 국제조정인, 국제조정대리인에 대한 제대로 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조정의 기본은 협상이다. 전 세계의 분쟁해결은 점차 당사자들이 스스로 해결해 가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부디 한국이 이 길에서 뒤처지지 않기를...
¹ Fisher, R., & Ury, W. (1981). Getting to Yes: Negotiating Agreement Without Giving In
² Brett, J. M., & Gelfand, M. J. (2006). A cultural analysis of the underlying assumptions of negotiation theory. Negotiation Theory and Research
⁴ International Mediation Institute.About IMI.
⁵ IMI Intercultural Competence Task Force. (2012). Criteria for Intercultural Competence in Mediation.
⁹ Caputo, A., Ayoko, O. B., Amoo, N., & Menke, C. (2019). The relationship between cultural values, cultural intelligence and negotiation styles. Journal of Business Re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