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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Jul 03. 2024

결혼의 이유(feat.결혼 19주년)


며칠 전이 결혼기념일이었다.


딸램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축하해 주었고.


슈는 오후에 문득 생각났다며 가족단톡방에 올려주었다.



남편에게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물으니 


"알지~ 우리 결혼 기념일."


"편지 써줘~"


"알써."


사실 편지 써와도 별 새로운 말은 없을 거다. 매년 했던 것처럼 나랑 결혼한 일이 본인 태어나서 한 일 중에 제일 잘 한 일이라고 하겠지 머.(맞짜나.) 한 때는 그 말이 더 없는 칭찬으로 들린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그 말이 이 결혼에서는 내가 호구라는 뜻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앞으로는 또 어떤 함의를 가지게 될지 모르겠지만 올해는 그 말 그대로 들을 수 있는 상태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라고 순순히 말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


© alexagornago, 출처 Unsplash

트레이더스에서 소고기와 수박과 케익을 사다가 저녁 식사를 차렸다.


너무 상차림이 보잘것 없어서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남편이 앞치마 챙겨입고 올리브유와 버터에 튀기듯 소고기 스테이크를 구워주었다. 20년 키워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해줄 수 있는 꿈나무가 되었으니 20년 더 키우면 몇 개를 더 할 수 있는 어른이가 될지 기대가 크다.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말해주었다.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를.


그것은 바로바로...


칼이 바르기 때문이었다.


서른이 된 나는 10년째 검도를 하는 중이었고 기둥이를 도장에서 만났다. 칼이 무척 크고 바르고 강했다. 그때의 나는 검도는 마치 운전과도 같아서 사람됨이 칼로 드러난다고 믿었다. (나라는 사람의 칼은 남들이 보기에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최근에 내가 도장에 나간다고 하니 그 도장에서 수련하시는 분이 나의 선배님이자 사범님에게 물었단다. 000는 어떤 사람이냐. "독해요."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ㄷr...)


평소에는 멀쩡해 보여도 운전대 잡으면 욕 많이 하고 운전 거칠게 하는 사람들은 그게 본성인 거라고 생각한다. 검도도 마찬가지다. 검도 선수들 경기하는 거 보면 서로의 칼이 상대의 몸 중심을 언제나 벗어나지 않도록 노리고 있고, 상대의 칼은 내 몸 중심에서 벗어나도록 끊임없이 움직인다. 작은 기회라도 보이면 언제든지 공격이 들어온다. 그러니 검도를 하면서 칼은 꾸밀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지금도 그걸 믿는다.


어떤 사람을 1년 보고 그 사람의 전부를 어떻게 알겠는가마는,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해도 될 사람인지 무얼보고 알겠는가마는, 10년 검도인생의 경험을 믿고 나는 칼이 크고 바르고 강한 사람을 선택한 거였다. 


마치 이 아이의 내신 성적과 학생부를 보고 얘를 뽑아놓으면 중간에 때려치지 않고 끝까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나아가서 우리 학교의 이름을 빛내줄 동문이 될 상인지를 알아보고 싶은 교수님처럼, 입사지원서와 이력서, 자기 소개서를 보고 채용을 해도 될까 어떤 자질을 중요하게 봐야 성실하고 함께 일하기 좋고 업무 추진에 있어서는 집요한 사람을 우리 팀원으로 맞이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나는 칼이 바른가를 잣대로 결혼상대를 고른 것이었다.


학자가 되고 싶다고 대학원에 들어간 사람이 공부를 잘 할지를 봤어야지. 나와 경제공동체가 될 사람이니 돈 버는 능력을 봤어야지. 그게 아니라면 돈을 아낄 수 있는 사람인지라도 봤어야지. 칼 바른 거랑 배우자로서의 자질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고!!! 내 눈 내가 찔렀지.라고 생각한 시간도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결혼하면서 들어갔던 대학원이라는 터널, 끝이 없는 것만 같아서 절망할 즈음 겨우 출구를 만나 그 터널 밖으로 나온 지금, 남편은 아직도 열심히 검도를 하고 있다. 내가 다시 검도를 시작하고 그가 운동하는 모습을 보니 여전히 그의 칼은 크고 바르고 강했다.


칼만 보고 골랐는데(사실은 얼굴도...) 공부도 열심히 했고, 논문도 잘 썼고, 가정적이고, 나를 여전히 매우 좋아하는(걸로 해...) 배우자를 고른 결과가 되었더라.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줬는데 왜 남편이 더 좋아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남편은 편지 대신 이렇게 말했다.


"19년간. 고맙다." 


서로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부부사이로 19주년 결혼기념일을 보내고 있으니 30대 초반의 내 선택이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건 아니었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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