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버지니아 울프의 친구이자 동성 연인, 비타 색빌-웨스트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은 소설(367p, 옮긴이의 말)인 <올랜도>는 본래 ‘올랜도: 전기’라는 한 줄에서 터져나온 이야기였다. 가볍게 시작했던 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진지해졌고(369p) 비타의 삶, 정체성, 사랑, 작가로의 운명을 반영한다. 받아쓰기 하듯 적어내린 제목에서 실존인물인 비타를 재료로 한 ‘올랜도’라는 캐릭터는 자신의 삶과 역사에 관해 토로하고 저자인 버지니아 울프는 일종의 빙의가 된 상태로 보인다.
버지니아의 유명한 멘탈여행법은 역사 판타지 요소를 도입해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라 자부하는 <올랜도>에서 시간여행과 맞물리며 그 매력을 뽐낸다. 산책덕후로도 정평이 나있는데다 산책덕후라는 필명을 지어준 셈이나 마찬가지인 버지니아 울프, 그녀의 산책론은 다름아닌 자연속의 사색과 사색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그 순간의 자연(혹은 도시)과 연상되는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그래, 그거) 의식의 흐름은 백화점 안에서 길을 잃은 듯한 올랜도의 마지막 산책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산책과 집필을 켜켜이 쌓은 일상을 살고 있다면 이러한 올랜도의 멘탈여행에서 희열에 가까운 대리만족을 느낄 것이다. (이쯤에서 울프의 MBTI를 검색해본다.) 몽상적이고 즉흥적이되 핵심을 간파하는 문장들. 올랜도의 역사가 누적될수록 버지니아 울프는 역사를 관통하는 본질에 가까워진다. 껍데기는 필요 없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을 남들이 알아주던말던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라는 유산은 중요하다. 동명의 영화로 울프에게 입문했음에도 <올랜도>를 읽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이 또한 우주가 미뤄두었다가 밀어주는 타이밍이라고 여길 수 밖에. 코르셋을 벗지 못하거나, 벗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시점(순서가 정해진 건 아님주의)들을 지나 그 모든 덧없음을 깨닫는 순간에 이 책을 만나서 더욱 소중하다.
여자들은(여자라는 성을 잠깐 경험해보니) 본래부터 순종적이고, 순결하며, 향기롭고, 아름답게 차려 입는 사람들이 아니었어. 그러지 않으면 인생의 즐거움을 전혀 못 누릴 수 있으니 끈질긴 훈련과 노력으로 그런 우아함을 갖추는 것뿐. 머리 손질만 아침에 한 시간은 걸리잖아. 거울 보는 데 또 한 시간, 그러고 있다가 코르셋을 입고 끈을 당겨 매고, 씻고, 분 바르고, 비단옷에서 레이스 옷으로 갈아입었다가 다시 레이스 옷에서 다른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그러면서 몇 년이고 순결을 유지해야 하고…… -177p
질식해 죽을뻔하거나,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두꺼비 세트를 선물 받지 않거나, 대공한테 청혼받지 않고는 산책도 할 수 없단 말인가? -214p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자아가 있었다. 이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욕망하는 힘도 가지고 있고 자의식도 강한 가장 중요한 자아가 오직 자신만이 유일한 자아가 되기를 원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자아라고 부른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자아의 집합체로서, 우두머리 자아. 핵심 자아의 명령과 통제를 받으며 나머지 모든 자아를 결합하고 지배한다. -343p
처음에는 복잡하고 난해하게 느껴지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자기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이 열린다. 고전이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매개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382p, 옮긴이의 말(신혜연)
비평서와 소문에 흔들린 나머지 버지니아에게 선입견이 있다면 이 책부터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유럽, 백인 중심성이나 엘리트 주의 같은 특권의식이 있을까 우려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모두 오해로 밝혀졌다. 궁금하면 올랜도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