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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Nov 27. 2024

43화 수진에 대한 기억 (1)

’타임캡슐 만들어 보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 바닥에 부딪히며 쿵 소리가 났다. 치호와 지훈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사가 사라진 이후 한 번도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곳은 피해야할 장소였다. 시간이 약이다, 라는 말을 믿으며 그 장소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타고 외곽에 들어서 몇 번의 차선 변경 후, 나는 내가 그 연구실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운다니, 어림없는 소리였다. 


연구실이 있던 터에 도착했을때는 여섯시 이십분을 지나고 있었다. 차를 세우고 내렸다. 정말 이곳에 한때는 건물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공터. 


건물까지 아예 밀어버린건 오 년정도 전으로 알고 있다.

이곳은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내 과오를 나타냈다. 내 커리어를 넓힐 무대라고 생각했었지만 바닥으로 내려오게 만든 공간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내가 화학을 전공했고, 석사까지 마친 경력을 싸그리 지웠다. 나이도 있었고, 마땅히 한 일조차 없는 어중간한 나이의 청년이 지금의 일을 하게 되기까지는 부단히도 시간이 걸렸다.


“허무하다 허무해.”


빨라진 일몰시간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타임머신이라도 묻어보자고, 우스개 소리로 한 수진의 말을 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떠올리고 여기와서, 어쩌겠다는 건지.


하지만 막상 온 이상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런 아이같은 순수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충 넘길만한 일이었지만, 실제로도 나는 대충 넘겨버린채 잊고 살았지만, 그녀라면 뭔가를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이곳으로 왔다. 지금은 그게 유일한 단서였다. 


타임캡슐. 좋다. 하지만 근데 이 공터를 다 파볼 수도 없고. 


나는 잠시 건물의 담벼락이 있던 경계선을 따라 걸었다. 그나마 이 선이라도 있어서 저 안쪽까지 파볼 염두는 내지 않았다. 제약건물이 있을때에는 바로 앞에서부터 사원증을 찍고 들어갔다. 들어가는 순간 CCTV의 사각지대는 없었으니, 수진이 땅을 파고 타임캡슐을 묻었을 확률은 극히 적어진다. 우리가 산책하던 이 근방이라면 모를까. 


‘제 말 안믿죠?’

‘아니요 믿어요.’

‘에이 안 믿네.’

‘믿는다니까.’

‘그러면 창준씨는 어디다 캡슐 보관할래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묻겠다 대답한 내용이 기억이 안났다. 그리고 나서 내가 수진에게도 물었었나?

그녀가 웃으며 조잘거리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신창준 이 멍청이. 지금은 없던 기억도 만들어야 할 지경이었다.


“어...”


하염없이 걷던 걸음이 멈췄다. 눈앞에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나무는 그대로네.”


제법 튼튼하고 모양도 훌륭해서 조경이 되어주던 나무였다. 크고 굵은데다 그늘까지 만들어주니 더할나위 없었다. 설마, 이 나무 아래 심어놓은 거 아냐?


쭈그리고 앉아 오는 길에 사온 모조삽을 집어넣는 순간이었다.


‘저 큰 나무요.’

내가 했던 말.


‘에이 재미없어.’

수진이 했던 말.


‘저는요. 가장 큰 나무 옆에 있는 나무 중 가장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멋진 나무 밑에 심을거예요.’

그랬다.

수진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나는 다시 일어서서 뒤로 뛰어갔다. 이 근방에 나무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저 큰 나무가 더 눈에 띄기도 했었고. 그래도 멀리서 본다면 하나 정도는..


“저깄다..!”


키가 크진 않지만 적당히 굽어진 나무 사이에 일자로 곧게 뻗은 나무 하나가 있었다. 마치 언젠가 보았던 수진의 등처럼. 단단하고 뿌리깊은 나무였다. 


나무 아래를 파헤치고 대략 삼십분 정도가 지났다. 드디어 뭔가가 손에 걸렸다. 

작은 철제상자였다. 고양이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애들용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이었다.


종이에는 전당포명과 연락처, 맡긴 물건에 대해 짤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추신으로 적힌 글이 있었다. 나는 그 글을 읽어내리며 심장이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 와중에 종이에 눈물이 닿는 게 싫어 한참을 고개 숙인채 흙을 적셨다.


‘이걸 찾은 게 창준씨면 좋겠어요.’          





전당포에 수진이 맡긴 노트북은 올해가 지나면 폐기처분 될 예정이었다. 


“타이밍 좋게 오셨네요. 이 정도 물건을 이렇게 오래도록 맡기는 경우는 없어서 저희도 좀 궁금하긴 했거든요.”

“네.”

“노트북 주인은 같이 안 왔나봐요?”


주인은 노트북을 맡기던 젊은 여성을 기억하는 듯 내게 물었다. 나는 거기다 대고 차마 그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말하지 못했다.


“바빠서요.”

“아유 많이 바쁜가보네.”

“네. 많이 바빴더라구요.”


수진은 언제 이토록 부지런하게 타지역까지 와서 노트북을 맡겨놓은걸까. 수진이 여기까지 예견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묵직하지만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던 노트북을 받아들고 전당포를 빠져나왔다.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 근처 카페로 가서 노트북을 작동시켜 봤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노트북이 안켜질까 조마조마 했다. 하지만 2분 정도 기다리자 노트북은 말끔한 하늘화면을 배경으로 보여주며 켜졌다. 


바탕화면에 있는 폴더 하나. ‘비밀’이라고 이름 지어진 폴더를 클릭해보았다. 그 안에 웹사이트 주소가 하나 있었다. 주소를 클릭해보니 회색바탕에 정중앙에 ‘일기’라는 글자만 하나 쓰여 있는 메인 화면이 떠 있었다. 그리고..


“아!”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노트북을 찾기까지도 난관이었는데, 비밀번호까지 걸려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불행 중 다행인지 비밀번호 아래에 힌트가 쓰여 있었다. 


‘아이어른 (그 아이를 칭하는 말과 어른이 가지고 있는 숫자)’


.....무슨 말이지. 전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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