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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Nov 29. 2024

44화 수진에 대한 기억 (2)

불행 중 다행인지 비밀번호 아래에 힌트가 쓰여 있었다. 

‘아이어른 (그 아이를 칭하는 말과 어른이 가지고 있는 숫자)’

.....무슨 말이지. 전혀 모르겠는데.





물어볼 사람도 없고, 이건 내가 해결해야하는 또 하나의 난제임이 분명했다. 

수진이 만일 노트북을 발견하는게 나라고 가정했으면, 내가 풀 수 있게 만든 비밀번호일거라는 희망회로를 돌리긴 했다. 


하지만 친절하게 설명한답시고 적어놓은 괄호마저 암호처럼 보였다. 


나는 노려보면 답이 나오기라도 하듯 노트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냥 말그대로 ‘아이어른’이라고 쳤을때는 틀렸다는 안내창이 떴다. 1/10 이라는 숫자도 함께였다. 이 말인즉슨, 나에게 남은 기회는 9번 뿐이라는 말이었다. 아이어른. 아이어른.. 아이와 어른. 수진에게 아이와 어른이라고 하면..?


“이치호..?”


도진요에 적어놓은 글 때문에 알게된 사실이긴 해도, 수진은 치호와 6개월을 함께 지냈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하는 ‘아이’란 이치호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른은?

나는 다시 생각해보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른’은 최훈을 의미하는 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보았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 틀렸다.


이래저래 조합해보았다. 숫자는 점점 커져만 갔다. 7번째에 가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하나씩 맞춰보다가 영원히 못보는 수가 있다.


설마. 


나는 내 이름을 적었다. 숨쉬는 것도 잊은 채 엔터를 눌렀다. 안내창이 떴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8/10’ 


“하아..”


차라리 이대로 들고가 전문해커를 통해 시간을 두고 접근하는게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 고지가 눈앞인것만 같았다. 이 노트북까지 찾아냈는데, 수진이 그렇게 어렵게 비밀번호를 설정했을까?

나는 힌트로 보이는 괄호 속 글자를 다시 한 번 천천히 바라보았다.


‘아이어른 (그 아이를 칭하는 말과 어른이 가지고 있는 숫자)’


자 그 아이가 이치호고, 어른이 나라고 해보자. 

이름을 넣는 건 의미가 없었다. ‘칭하는 말’과 ‘가지고 있는 숫자’

그때 내 자리 옆에 아이를 데려온 여성 한 명이 앉았다.


“나 이거 먹어도 돼?”


아이가 큰 소리로 물엇다. 


“아구, 우리 강아지 먹고 싶은 걸로 먹으세요. 근데 우리 4시전에는 가야해, 알지?”


나는 그 장면을 마치 배경처럼 흘려 듣다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이를 향해 말하는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 심각하게 쳐다본 것인지, 헛기침을 하더니 등을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방금 깨달은 두 가지 사실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했다.

강아지. 네 시. 


진짜 이 어이없는 발상이 제대로 된 추리라고 해보자. 치호를 칭하는 말, 동물로 보자면 그건 날다람쥐였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말했으니까. 왜 하고많은 동물 중에 날다람쥐였을까. 


그리고 시간. 어른이 가지고 있는 숫자는 시간을 의미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내가 가진 시간 중에 의미 있는게, 그야말로 수진도 알고 있을 법한 숫자가 하나 있었다. 


나는 오래전 그녀에게 시계를 주었다. 그 시계는 지금 이치호가 가지고 있다. 

그 시계는 시간을 측정한다는 시계의 존재의의로 보자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그 시계를 주었다. 시간은 멈춰있었고, 그 시곗바늘이 가리키고 있던 숫자는..


‘날다람쥐0328’


엔터를 누르자, 페이지가 전환되었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무수한 파일들. 년도별, 일자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그녀의 일기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채 2주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있었다. 


시작은 우리가 연구실에 발령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나는 앞 글자가 미리보기처럼 나와있는 파일을 훑어보다 하나를 눌렀다.  


‘20XX. 모월 모일. 날씨가 맑다. 내겐 면역이 있었다. 아무래도 태생적인 듯 하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를 ‘날다람쥐’라고 칭하기로 했다. 1호다. 원래라면 내가 1호였을텐데.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며..’


읽으면서 손이 발발 떨렸다. 등 뒤로 오한이 들었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휘청휘청 거리더라구요. 술취한 건 아닌데 저도 잘 못알아보는 것 같고. 말도 못알아 듣고.’

‘걘 야자도 안해요.’


김지훈이 해준 말이 지금에야 의미있게 다가왔다. 


‘잘 못들었어.’

‘밤이라서..’


별 생각 없이 넘긴 치호의 말이 떠올랐다. 맞고 왔을 때도 그는 무언가 잘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게 다쳐서 그런거라 생각했다. 지난번 봤을 때 치호는 소파에 앉는데도 늙은 노인처럼 굴었다. 손으로 소파를 더듬고 앉던 일련의 동작이, 그저 피곤하다고만 넘겼다. 정말로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그에게도 뭔가의 부작용이 있는 것이다.


‘왜 날다람쥐야?’


나는 그제야 날다람쥐가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었다.


치호가 네카의 첫 번째 피해자였다. 그것도 수진에 의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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