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이라는 이름의 결벽에 대하여
오전 8시 40분. 텅 빈 사무실에 불을 켜고 내 자리에 앉는다.
컴퓨터 본체가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과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밤의 냉기가 섞인 이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시간을 확보해야만 비로소 '안심'한다.
업무 시작 20분 전, 책상 위에 단정히 놓인 다이어리와 따뜻한 차 한 잔은 나에게 단순한 루틴 그 이상이다. 그것은 오늘 하루도 누군가에게 책잡히지 않고 내 몫을 해내겠다는 나만의 고요한 의식이다.
반면, 나의 평온한 예열 시간을 깨뜨리는 소리가 있다.
9시를 1, 2분 넘긴 시점에 들려오는 조급함 없는 발소리. 신규 직원의 출근이다.
단 120초의 차이일 뿐이지만, 내 마음속의 엄격한 메트로놈은 그 박자를 놓치지 않고
불편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사실 그를 향한 내 불편함은 꽤 다층적이다.
그는 급한 협업이 몰아칠 때면 약속이라도 한 듯 조퇴나 결근을 선택하고,
일이 한가한 날에는 묘하게 야근을 자처하며 저녁 식사 시간을 보낸다.
틈만 나면 이어지는 담배 브레이크까지.
그 모든 행동이 내 눈에는 '공동체의 리듬'을 무시하는 파열음으로 들린다.
그런데 문득, 그를 향한 날 선 시선 끝이 나를 향할 때가 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빡빡하게 구는 걸까.'
나는 근무 시간 중에 자리를 비우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
누군가 내 빈자리를 보고 "저 사람은 게으르네", "농땡이 피우네"라고 판단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가거나 짧은 휴식을 취할 때조차 내 발걸음은 늘 분주하다.
나의 성실함은 어쩌면 순수한 책임감이라기보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 갇힌 채 '성실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세운 결과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묘한 자괴감이 밀려온다.
나는 스스로를 '공동체를 우선하는 사람'이라 정의했지만,
사실은 그저 미움받고 싶지 않은 불안한 영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다.
나의 불안이 만든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그저 자기 본능에 충실한 타인을 '무책임하다'고 심판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가책 말이다.
동료의 얄미운 행동은 객관적인 '민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짜 이유는, 내가 스스로에게 결코 허락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그는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20분 전부터 자리를 지키며 나를 검열하는데, 그는 2분 늦게 들어오면서도 당당하다.
나는 다 같이 바쁠 때 숨이 차도록 노를 젓는데, 그는 풍랑 속에서도 자기 휴식을 챙긴다.
그 간극에서 느껴지는 박탈감이 나를 '꼰대'라는 이름의 방어기제로 도망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이 갈등은 누가 옳고 그르냐의 이분법으로 결론지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에 예민한 나의 성실함'과 '나의 안위가 우선인 타인의 합리성'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나는 여전히 8시 40분에 출근할 것이다.
그것이 나를 불안으로부터 구원하는 방식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9시 1분에 들어오는 그를 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려 한다.
내가 화가 난 것이 그의 불성실함 때문인지,
아니면 나 스스로를 너무 꽉 조이고 있는 내 마음의 여백이 부족해서인지.
성실함이라는 이름의 결벽이 타인을 향한 칼날이 되지 않기를,
그리고 나의 불안이 만든 잣대가 나 자신을 갉아먹지 않기를.
오늘도 나는 9시 1분의 불편한 소음을 견디며, 조금 더 유연해진 마음의 자리를 마련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