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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Aug 03. 2018

다시 먹고 살아내기

눈 떠보니 덴마크다.

임시 숙소에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나 창 밖을 내다 보니 어제까지 보던 그 풍경이 아니다. 창문 아래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혀 내용을 가늠할 수 없는 대화를 한다.

어제까지 하루에도 백번은 넘게 하던 그 흔한 '차오'라는 인사를 건넬 수도 없다.

2,3층 정도의 낮은 아파트들이 드문 드문 서있고, 키가 크고 하얀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있다.

여기가 거긴가.. 거기구나..

제 아무리 북 유럽이라고 해도 유럽인데. 라는 기본도 없는 나의 안일함은 처음 맞는 아침에 모두 부서졌다. 유럽이라고는 하지만 그동안 내가 다녔던 서유럽이나 동유럽과는 아주 다르다. 20년 전 쯤 가보았던 핀란드의 기억을 부지런히 불러 모으며 그래도 나는 이곳이 많이 생소하지 않고, 조금 지나면 익숙한 무언가를 발견할 것이라고 겨우 위안했다.


세상이 모두 어리둥절한 엄마와는 다르게 시아는 상쾌하게 잠에서 깼다. 새로운 집, 새로운 환경에서 눈을 뜨니 여행을 온 것 같은지 아침 부터 들떴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키가 크고 하얀 사람들이 신기한지 한참을 쳐다본다.


아침 식사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셋이 손을 잡고 슈퍼에 갔다.

빵 하나 사는데도 이태리 가격이랑 비교하느라 쉽게 바구니에 담기질 않는다. 덴마크 물가가 무섭다더니 정말 그렇다.

여행 다녀보면, 어떤건 더 비싸고 어떤 건 더 싸고 뭐 그런게 있는데, 덴마크는 이태리보다 싼게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익숙한 브랜드의 커피도 없고, 이태리 아침 식사 주 메뉴인 브리오쉬도 없다.

비슷한 빵을 찾아볼까 빵 코너에 갔는데, 시아가 코를 맊는다.

"이게 무슨 냄새야?"

"무슨 냄새라니?"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처음 맡아보는 냄새야. 정말 이상해!"

호밀빵 냄새다. 시아는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맞다. 이럴때 보면 엄마 아빠가 한국 사람인 시아는 참 이태리 사람 같다.

음식 냄새에 아주 민감하고, 느끼고 생각나는 대로 거침 없이 행동하고 말 하는 이태리 여덟살에게 짙은 갈색 호밀빵을 들어 보여주었다.

"이 빵에서 나는 냄새야. 시아는 처음이니까 좀 이상하겠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참 좋아하는 빵이야. 여기서 당분간은 이상한 냄새, 새로운 맛을 만날 일이 많을텐데, 그럴때 마다 코를 맊고 인상을 쓰면 안될 것 같아. 이 나라 사람들은 맛있게 먹는 음식인데, 시아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 기분이 나빠 질 수도 있으니까. 전에 .. 이모가 집에 김치 있었는데 친구들이 코를 막고, 냄새 이상하다고 해서 이모가 속상했다고 했잖아. 기억나지? 그런 기분이 들 수 도 있지 않을까?"

"아, 알았어. 미안해. 나는 처음이니까. 좀 이상해서. 그럼 오늘은 여기를 빨리 지나가자. 나는 아빠랑 저 앞에 있을게. 엄마가 빵 골라와."

겨우 8년을 살았을 뿐인데, 온 몸에 문화가 배었다. 문화는 그 만큼 무섭고 대단하다.


호밀빵 하나와 하얀 식빵을 하나 골랐다.

우유가 유명하다는 덴마크에 왔지만, 많은 우유중에 도데체 무슨 우유를 먹어야 할 지 몰라 유제품 냉장고 앞에서 한참을 공부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집는 우유를 우리도 따라 집었다.


초코 우유에 시아 단짝 친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엄마!!!! 이거봐!!! MATILDE!!!! 초코 우유 이름이 MATILDE야!!! 사진 찍어줘.사진 찍어서 Matilde 엄마한테 보내주자. 내가 여기서 Matilde 만나서 너무 기쁘다고. 내가 초코 우유 진짜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우유 이름이 Matilde라서 너무 좋아."

초코 우유병을 들고 좋아하는 여덟살이 한 없이 애잔하다. 어쩌자고 초코우유는 아직은 너무 뜨거운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걸까?


이태리에서는 참 흔하던 바질이 안 보인다. 초록물이 뭍어 날 것 처럼 파란 루콜라 대신 조금 시들어 색이 바랜 루콜라를 겨우 발견했다. 아침부터 루콜라 샐러드를 먹을 것도 아니고, 바질을 넣은 파스타를 먹을 것도 아니지만 초록이 부재한 야채 코너가 쓸쓸했다.


"시아는 아침 뭐 먹을래? 비스켓을 살까? 씨리얼을 살까?"

"음... 아니야. 여기는 소세지가 많으니까 핫도그를 먹을래. 소세지가 맛있게 생겼어."

"응? 아침에 핫도그?"

이태리에서는 아침에 주로 단 걸 먹는다. 빵을 먹어도 단 걸 먹고, 과자를 먹어도 단 걸 먹는다. 시아도 늘 누텔라를 바른 식빵을 먹거나 초코렛이 들어간 씨리얼을 먹거나, 초코렛이 들어간 비스켓을 먹었다. 그런데 핫도그를 먹는단다.


처음 보는 브랜드의 커피를 모카에 올려 끓이고, 호밀 빵에 딸기쨈을 바르고, 핫도그를 만들어 아침을 먹었다.


"우유는 좀 맛이 틀린데, 그래도 맛있어. 소세지는 맛있네. 빵도 맛있고. 아빠랑 엄마가 먹는 빵은 냄새가 좀 이상한데... 우리끼리 집에 있으니까 이상하다고 얘기해도 괜찮지? 그 빵은 지금은 안 먹어 볼래. 좀 더 있다가, 많이 지나면 나도 먹을 수 있을거야."

커다란 핫도그 빵을 앙앙 베어 물어 기분 좋게 먹는다.


시내 관광은 미루어 두고, 시내에서 10km쯤 떨어져 있는 숙소 근처의 모든 슈퍼를 섭렵했다.

처음 오는 덴마크이지만 살러 왔다고 생각하니 시내에 대한 궁금증 보다는 뭘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가 제일 큰 숙제다.

익숙한 먹거리를 찾아 봤지만 없거나 다르다.

그렇다면 '적응'을 해야한다. '적응'은 내가 만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태리가 그립다. 이태리가 좋다.를 시아 모르게 천 이백번 정도 속으로 외치면서 자꾸만 자꾸만 마음을 다졌다.


초록 루콜라와 색색 가지 상추,향이 좋은 펜넬도 없지만, 당근과 피망이 달콤하고 오이가 시원하니 샐러드도 만들어 먹을만 하다.

Lavazza도 아니고 Illy도 아니지만, 모카에 끓여내니 이름도 읽기 어려운 브랜드의 커피 맛도 괜찮다.

신선한 바질은 보지 못했지만, 냉동 바질도 있고, 토마토 페이스트도 있으니, 파스타도 만들 수 있다.

빨강이 탐스러운 프로슈토 크루도와 살라메도 흔치 않지만, 참 많은 종류의 소세지가 있으니, 색색가지 소세지와 감자로 간편하고 훌륭하게 북유럽식 식탁을 누릴 수도 있다.

고르곤졸라는 아니고, 모짜렐라도 아니지만, 콤콤한 향이 나는 다나 블루, 잔 구멍이 뽕뽕 뚤린 부드러운 하바르티가 있으니, 몸에는 안 좋으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유지방 섭취도 문제 없다.

짭짤하고 새콤한 이탈리아 피클 대신 달콤하고 새콤한 덴마크 피클은 오히려 한국에서 먹던 추억의 피클을 떠올리는 정겨운 맛이다.

식초와 기름에 저린 청어는 비린내가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러시아에서 먹던 맛이라 반갑다.

이탈리아처럼 윤기나는 쌀은 아니지만, 밥통도 없이 이민 온 아줌마가 냄비밥 하기에는 오히려 빨리 익어 쉬운 것 같다.

물가가 무서워 남겨 버리지 않을 만큼만 고르느라 신중하게 장을 보게되니, 뭔가 착해진 느낌이 들어 좋다.

코펜하겐에서는 물을 사먹는 대신 수돗물을 그냥 먹는다고 한다. 차가 없어 물 장을 어떻게 보나 걱정했는데, 이사가면 튼튼하고 씻기 쉬운 물통 하나만 사면 되겠다.


시아는 두 가지 정도의 아이스크림을 시도 했다 실패해 낙심했지만 3번째 드디어 마음에 쏙 드는 딸기 샤베트를 발견했다.

황가수는 호밀빵에 푹 빠져, 매끼 호밀빵을 곁들인다.



길을 지나는데 얼굴이 하얗고 머리가 금발인 두 꼬마 아가씨가 당근과 오이를 아삭 아삭 먹는다. 아마 그게 간식인 모양이다.

"시아야, 저것봐. 여기서는 간식을 저렇게 먹나봐. 정말 멋지다. 그치? 우리도 그렇게 해야겠다."

"응... 난 당근은 못 먹는데... 그럼.. 오이는 먹어볼게..."


이튿날 단 기운 하나도 없는 당근과 오이가 가득들은 간식 통을 침통하게 바라보던 시아가 마지 못해 오이를 아삭 아삭 씹으며

"엄마가 그 아이들을 본게 문제야. 아... 그 아이들을 못 봤으면, 초코 과자랑 사탕이나 감자칩을 가지고 왔을텐데.. 이 나라 친구들은 왜 그런걸 먹는거야..."

한다.


아직 집도 구해야 하고, 시아 학교 등록도 해야 하고, 정착하기 위해 넘어야 할 쉽지 않은 산들이 무수하지만,

어쩌면

우리 여기서도 맛있게 먹고, 크게 웃으며, 그렇게 잘 지낼 수 있다. 있다. 있다.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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