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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Aug 06. 2018

엄마도 힘낼게.

덴마크에서는 집을 구하는 일이 어렵다고들 했다.

이민, 유학에 가장 어려운 일이 집을 구하는 일이라고 들 했다.

다들 그렇게 어렵다고 하니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힘들겠구나.

하지만, 나의 '힘들겠구나'는 지금까지의 다른 '힘들겠구나'처럼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었다. 현실 앞에서 각오 혹은 예상이라고 했던 나의 '힘들겠구나'는 가루도 안 남고 다 부서져 버렸다.

힘든 건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다.  나의 '힘들겠구나'는 늘 신중하지 못하고 가벼워 더 그렇다.


덴마크에서는 월세를 부동산에 직접 알아보지 않고 유로 사이트에 등록을 해 찾는다고 한다.

유로 사이트 두 곳에 등록을 하고, 전화기와 컴퓨터를 붙들고 집을 찾고, 집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지역도 보고, 집 구조도 좀 따졌지만, 3일이 지나도록 연락하나 오지 않자, 아무것도 보지 않고 닥치는 대로 메시지를 보냈다.


휴가라 연락이 없겠구나...

외국인이라 연락이 없는 걸까?..

3명이라 연락이 없는 걸까?

덴마크 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우리가 못 미더워 연락을 안 하는 건가?


프로필 사진도 좀 더 환하게 웃는 사진으로 바꾸었다.

우리 소개도 좀 더 자세하게 보충했다.


매일매일 보내고 보내고 보내던 중에 드디어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외곽이지만, 밀라노에서도 주변 도시 거주에 만족했던 터라 거리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해가 유난히 따갑던 날, 샌드위치 도시락까지 챙겨 집을 보러 나섰다.

조금은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어쨌든 처음으로 연락을 준 주인이니 크게 나쁘지 않으면 일단은 들어가자고 웃으면서 희망찬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교통비가 어마 어마하다.

시내 교통비 처음 내고 이미 한번 놀라긴 했지만 시외는 더 대단하다. 시외라고 해봐야 버스로 30분 내외 가면 나오는 거리인데 한 사람 편도가 만원이 넘는다.

교통카드를 구입하면 교통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아직 주소지를 등록하지 못해서 이름이 적힌 교통 카드를 발급받지 못한다고 했다.

기분이 상했다.

집 한번 보러 나서는데 그렇게 많은 교통비를 지불하고 에어컨도 안 나오는 버스를 타는 것도 그렇고 친절하지만 웃음기 없는 얼굴로 주소지 등록을 빨리 하는 게 좋다고 말하는 매표소 직원의 말도 기분이 나빴다.

며칠 전 교통카드 구입을 알아보러 갔을 때는 우리의 CPR (주민등록번호 혹은 개인 TAX CODE 정도인 것 같다)이 시작되는 날이 8월 1일이니 그 이후에 오면 카드를 구입할 수 있다고 했었는데, 그 사이 바뀐 매표소 직원은  CPR 번호는 정상적이지만 등록된 주소가 없으니 안된다는 것이다. 아직 집을 못 구했는데, 어떻게 등록을 하느냐, 임시 숙소에서 집을 보러 다녀야 하니 카드 발급을 해주면 안 되겠냐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일반 교통 카드를 구입해서 사용하라고 한다. 혜택이 일정 부분 차이가 날 수는 있겠지만 아쉬운 대로 그걸 쓰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겠지.

이태리에서였다면 며칠 전 다른 직원은 그런 얘기 없었다고 볼맨 소리라도 한 번 더 했을 것이다.

하지만 덴마크 말 하나도 못하는 나능 어차피 안될 일로 서툰 영어까지 써가며 진 빼고 싶지 않았다.

다만 기분이 상했다.

비용을 조금 더 내고 일반 교통카드를 사면 그만이다.

그런데 참 말할 수 없이 덴마크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며칠 괜찮다, 괜찮다 겨우 다졌던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 올랐다.


시아는 매표소가 있는 역 안에서 햄버거를 먹자고 하고.

나는 안된다고 하고

황가수는 눈치를 보고

시아는 다시 햄버거를 먹자고 하고

나는 그만 엉뚱한 곳에 분을 내고 말았다.


아까 매표소 직원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 지난 며칠 나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


"여기 싫어. 별로야. 나가자. 나는 여기 싫으니까 나가자. 언제나 너 좋은 대로만 할 수 있니? 오늘은 내가 좋은 대로 할 거야. 여기서는 절대 아무것도 안 먹어. 엄마는 기분이 정말 안 좋으니까 더 이상 햄버거 사달라고 조르지 마."

씩씩거리는 엄마의 모습에 놀란 시아가 아빠 손을 꼭 잡고 입을 삐쭉거린다.


비겁한 나는 며칠 간의 불만과 불안을 약한 시아에게 분풀이했다.

시아에게 미안한 마음, 불쾌한 마음 때문에 버스 타고 집 보러 가는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황가수가 소곤소곤 시아를 달랜다.

"시아야. 엄마가 기분이 안 좋으니까 시아가 좀 이해해줘. 엄마는 이태리 생각이 많이 나서 좀 슬픈가 봐. 그리고 집도 잘 안 구해지고 그러니까 걱정도 되고. 불안해서 기분이 나빠졌나 봐."


예상보다 조금 더 외진 곳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단지가.. 뭐랄까.. 삭막한 느낌이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아가 학교를 다니게 되면 도대체 어느 방향 어느 길을 따라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그런 곳이다.

마음 좋게 생긴 주인의 안내로 들어가 구경한 아파트는... 아주 안 좋았다.

대충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태리로 돌아갈까? 나는 정말 괜찮아. 여기 너무 힘들도, 적응하는 것도 불편하고 그러면 돌아가자."

"돌아가긴 어디로 돌아가? 여기가 싫다는 게 아니잖아. 집이 없잖아. 집이"

황가수에게도 가시 돋친 말을 내뱉어 버렸다.


사실은 여기 별로야. 사람들도 친절한 것 같은데 웃질 않아. 눈을 마주쳐도 미소 지을 줄도 몰라. 뒷사람 있으면 문 잡고 기다려주는 배려하는 사람도 없어. 시아가 놀고 있어도 먼저 인사해주는 사람들도 없어. 이태리에서는 지하철만 타도 아이들 보면 다들 인사해 주는데. 이 사람들은 무뚝뚝해.  커피 한잔 사서 마시는 것도 이렇게 여러 번 생각해야 하고, 지하철 한번 타는 것도 미리 계산해야 하고, 플라스틱 병은 슈퍼에 돌려주고 물건 살 수 있는 쿠폰 받는다는 거, 전화 SIM도 슈퍼에서 살 수 있다는 거, 주소 등록을 안 하면 교통카드도 못 산다는 거. 다 물어봐야 알 수 있어. 그냥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다 물어보는 것도 이제 피곤해. 아무것도 안 물어봐도 그냥 살아졌는데, 왜 이 과자는 무슨 맛이고 저 빵은 무슨 맛인지도 한참을 들여다봐야 아는 곳에... 그런 곳에.... 나를 데리고 왔어!



황가수에게 던진 가시 돋친 말속에는 이 만큼의 말들이 들어있었다. 황가 수도 그걸 안다.

"미안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처음이니까 그렇지, 조금 지나면 다 괜찮을 거야."


황가수가 나를 데리고 온 건 아니다. 황가수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직장을 찾은 것뿐이고,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취직인 된 것뿐이다. 내가 한 번이라도 절대 가지 말자라고 했다면 황가수는 덴마크행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황가수는 그런 사람이다.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가족을 모든 일의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황가수의 덴마크 취직에 나도 황가수 만큼 기뻤다. 단번에 덴마크행을 결심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온 것이다. 내가 왔는데, 어려움이 닥치니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외국 생활 좀 했고, 여러 가지 경험도 했으니, 덴마크에 와서도 쉽지는 않더라도 많이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러시아에서도 이태리에서도 어려웠던 기억은 다 잊고, 거기서도 했으니까 여기서도 그냥 하면 될 것 같았다.

묻고 도움을 청하기에 나는 너무 어른인 것 같아 알아서 해보려고 했다. 묻지 않고 덤벼드니 실수하고 사소한 실수를 웃어 넘기기에 나는 또 너무 어른이라 상심하고 만다.


시아도 황가 수도 아무 잘못 없이 내 눈치를 보고, 나는 미안하면서도 풀리지 않는 마음 때문에 둘을 안아주지 못했다.


이태리에서 들고 온 인형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시아가 혼자 놀고 있다.

내 불안이 시아에게 모두 전달되겠지. 이미 그렇게 됐겠지. 시아에게도 새로운 환경이고, 외로운 하루하루인데, 그런 시아에게 감정을 쏟아버린 것이 너무 미안했다.


"시아야 놀이터 갈래? 아빠는 시아랑 오늘 많이 놀아줬으니까 엄마랑 둘이 갈까? 오랜만에?"

"응, 좋아. 고마워!"

참 오랜만에 둘이만 손을 잡고 걸었다.

"시아는 여기 어때?"

"응, 난 괜찮아. 어떤 건 이탈리아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건 다르기도 한데. 그래도 신기해. 엄마 아빠랑 노는 것도 재밌어."

"엄마가 요즘에 기분이 좀 안 좋아서 시아한테 화도 내고, 시아랑 놀아줄 힘도 없었어. 미안해."

"괜찮아. 이제 힘이 좀 났어? 내가 있으니까 힘이 나지?"

"응, 시아가 있으니까 힘이나."

"조금씩 힘 내. 괜찮아. 나도 힘 많이 낼게. 엄마도 더 힘낼 수 있지?"

"응, 고마워. 엄마도 힘낼게."

"엄마는 왜 기분이 많이 안 좋았어?"

"그냥... 여기를 잘 모르고, 다 물어봐야 하는 것도 답답하고, 이태리에서는 안 물어봐도 다 알았는데. 여기서는 엄마가 꼭 애기처럼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리고 집도 빨리 구해야 하는데, 안 구해져서 걱정되고."

"모르는 건 나쁜 게 아니라고 했잖아. 엄마가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고 했는데, 생각 안 나? 잊어버렸구나. 몰라서 물어보는 건 창피한 거 아니야. 집은 빨리 구하면 좋지만 안 구해지면, 다른 집에서 또 조금 살다가 구하면 어때?"

"시아 학교 가려면 빨리 구해야지. 다른 애들은 학교 가는데 시아는 못 가면 어떡해?"

"엄마는 왜 나쁘게 될 거라고 생각해. 좀 좋게 생각하면 어때? 집도 찾아지고, 시아도 학교 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좋아. 그럼 화도 안 나고 힘도 나. 그리고 학교 늦게 가면 어때? 늦게 가서도 배울 수 있어. 어린이집, 유치원 그럴 때처럼 천천히 배우면 되지. 선생님들 말 듣고 따라 하고, 내가 틀리게 말하면 선생님이 가르쳐 주고, 이태리 말도 그렇게 배웠으니까, 여기서도 그렇게 하면 될 거야. 내 친구. S도 미국에서 왔는데, 처음엔 말도 못 하고 친구도 없었는데, 금방 말도 배우고 친구도 생겼어. 그리고 친구들도 다 도와줬어. 여기서도 친구 사귀면 그렇게 할 수 있어. 엄마 나는 괜찮을 것 같아."


한산한 놀이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태리에서라면 친구들이랑 했을 소꿉놀이를 나랑 둘이 했다.

"이거, 소나무, 그렇지? 우리 집. 아, 우리 이태리 집에도 있었는데, 여기도 똑 같이 생겼네. 솔방울을 찾아서 케이크를 만들자. 어때?"

"응, 좋아. 케이크를 아주 많이 만들자."

"내가 케이크 만드는 사람이고 엄마가 도와주는 사람 해. 괜찮아?"

"응. 그럼"

"내 친구 S랑은 맨날 싸웠는데, 다 자기가 케이크 만드는 사람 한다고, 엄마는 괜찮다고 하니까 좋네."


케이크 다섯 개를 만들고 미끄럼틀 위에서 자갈 내려보내기 장난을 하고 숨바꼭질을 하는데 황가수가 우리를 찾으러 왔다.

"오빠 이제 괜찮아. 나도 괜찮아. 오빠도 괜찮지?"

"응, 나는 너희들만 좋으면 다 좋아."

"아빠도 숨바꼭질 한번 할래?"

"응, 그래 다 같이 하자."


저녁 공기가 상쾌하다.

"여기는 모기가 없다. 밀라노 같았으면 모기 때문에 이 시간에 밖에서 놀 수도 없는데, 그렇지?"

"맞아. 모기가 없으니까 노는 게 더 재밌다."


시아랑 내가 웃고, 황가수가 우리를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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