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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Jun 12. 2019

그리움을 담는 아홉살

키가 크고 눈동자가 고운 9살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얼마 전부터 학교 갔다 오면 A와 놀았다는 얘기를 했다. 

학교 상담 시간에 선생님께서도 시아가 A와 T, A, E와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하셨다.

이제 마음을 나눌 친구가 생기는 걸까?


학교에서 미니 마라톤을 하는 날, 시아보다 키가 많이 큰 아홉 살 A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는 A야. 우리 엄마도 외국 사람이야. 하지만 우리 엄마는 덴마크에 오래 살아서 덴마크 말을 잘하지. 시아 엄마도 오래 살면 덴마크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하얀 얼굴에 톡톡 뿌려진 주근깨가 귀여운 소녀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다. 

아홉 살의 살가운 인사에 기운이 나고 위로를 받는다. 시아가 얘기하는 A로구나. A의 엄마는 슬로베니아 출신이고, 결혼 전부터 덴마크에 살았다고 한다. 덴마크어도 유창하고, 남편이 덴마크인인 만큼 현지 문화에 잘 스며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슬쩍 내 곁으로 와 역시 먼저 인사를 건네준 A의 엄마도 편안하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시아와 A는 어느 휴일, 둘만의 특별한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고, 그래서 A를 우리 집에 초대했다.


아홉 살 손님의 방문을 앞두고 사실 나는 두근두근, 떨렸다. 

시아와 A의 당연한, 하지만 시아에게는 한참 유보되었던 행복을 엿볼 생각에 미리부터 감격했다.

"점심은 뭘 만들어 주면 좋을까?"

"파스타, 파스타 좋아한대. 파스타 해줘. 아... 그리고 김밥을 몇 개만 만들면 어때? 그래서 잘 먹으면 더 주고, 아니면 우리가 먹자."

"김밥? 김밥을 먹을까?"

"안 먹을 수도 있는데, 보고 싶어.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먹어보라고 해보고 싶기도 하고."

"그래?....."


시아가 마음을 주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친구가 온다는데, 김밥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다. 

비 오는 휴일에 김밥을 말고 라구 소스를 끓여 놓고 손님을 맞았다.

수줍은 아홉 살들은 말도 않고 키득키득 웃다가 시아 방으로 종종 들어가 무얼 만들고 무얼 그렸다.

점심시간에 A는 젓가락질도 해가며 김밥을 맛있게 먹고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이며 화답해주었다. 

파스타를 못 먹을 만큼 김밥을 많이 먹고 아이들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만들고 그리다, 거실로 자리를 옮겨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게임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A의 엄마가 A를 데리러 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아홉 살 둘이 손을 모으고 애원을 해 노는 시간을 한 시간 연장하고 A 엄마에게 더 늦게 와달라고 연락을 했다.


휴일이었고, 이것도 저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여기도 저기도 가야 할 것 같았지만, 두 아홉 살이 몹시 난처한 발음의 덴마크어를 구사하며 웃기를 그치지 않으며 노는 진풍경을 구경하여 우리는 만족했고 감사했다.

이제. 시아는 정말 괜찮은가 보다.


주말에 시아가 밀라노에 있는 친구들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한다.  

친구들과 통화가 되었지만, 이미 6월에 방학을 하는 이태리 친구들은 학기말 파티, 학기말 발표회로 바빠 긴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짧은 통화가 아쉬워 그런지 시아 표정이 어둡다.

"엄마... 난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어."

시아가 피곤한 건 아프거나 슬픈 거다. 시아는 피곤을 용납하지 않는 아홉 살이다.

"시아.. 어디 아파?"

"아니야.."

"그럼, 기분이 안 좋아?"

"아니야... 안 좋은 건 아니고.... 나는... 이탈리아에 가고 싶어... "

"그래?.... 이탈리아에 가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는데. 오늘 더 많이 가고 싶어? 친구들이랑 오래 전화를 못해서 그런가?"

"아니야... 나도 모르겠어. 친구들이 보고 싶고, 나는 덴마크도 괜찮고 이제 좀 재밌는데, 그래도 이태리에 가고 싶어. 나중에 커서 이태리에 가면 내가 S랑 M 얼굴을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어떻게 못 알아봐, 화상 통화도 하고, 일 년에 한두 번은 만나는데, 엄마는 친구들 몇 년에 한 번씩 만나도 알아보는데, 아주 잘 알아볼 수 있어."

"응... 그건 아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친구들이 나를 잊어버리고... 내가 친구들을 잊어버리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자기 전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태리 친구들을 많이 생각하면 기분이 안 좋은데, 보고 싶으니까. 그래도, 기분이 안 좋아도 잊어버리고 싶지 않으니까, 친구들 많이 생각해도 기분이 조금만 안 좋게 해 주세요. 기분이 조금 안 좋아도 나는  친구들 생각을 할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 안 잊어버리게 해 주세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뽀얗게 잠이든 시아를 두고 나왔다.

나는 슬픔을 고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내 슬픔도 타인의 슬픔도 모두 고치고 싶다. 고치는 게 어려우면 지우기라도 해야 한다. 슬픔을 인정하고, 슬픔을 도닥이고, 슬픔이 주는 생의 빛깔을 키워 낼 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꾸 시아의 슬픔을 고치려고 했다. 고쳐지지 않으니 새로운 즐거움으로 덮어 지워지기만을 바랬다.


그런데 그 사이 시아는 새로운 만남의 즐거움으로 그리움이 지워지는 것을 , 친구들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나 보다. 

아프지만, 슬픈 그리움을 잘 간직하기로 마음먹은 시아가 대견하다.

울어도 괜찮아. 슬퍼도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우는 것도 슬픈 것도 하나도 괜찮지 않은 나는 슬픔을 바로 바라볼 줄 아는 아홉 살이 그저 부럽다.


진한 그리움의 대상을 편히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날까지 아파하고, 새로운 사랑을 키워가는 그 모든 일을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해 낼 수 있는 다 큰 시아라면. 생각만 해도 든든하다.


이제 아홉 살이나 먹은 너에게 나는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줄 알았어. 이제는 옹알이를 하며 손으로 무엇이든 주워 먹던 매일이 경이롭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가 좋았다'같은 얘기를 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았어.  그런데 말 안 듣고 말대꾸하고 가끔 문도 꽝 닫는 너는 여전히 경이로운 사람이다.


그리움을 담아내기로 마음먹은 아홉 살. 네가 담은 그리움을 고치려 하지 않을게. 그리고 오늘은 내 그리움도 다시 한번 들여다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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