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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Aug 28. 2019

천연덕스러운 일상

이태리보다 늦게 시작한 여름 방학은 이태리보다 20일 정도 일찍 끝났다.

이태리에서 돌아와서 남은 방학에 학교에서 진행하는 여름학교에 보내려고 했지만, 시아가 완강하게 거부했다.

프로그램도 좋고, 방과 후 비용만 지불하면 참여할 수 있다고 하니, 엄마 입장에서는 그 보다 좋은 대안은 없는데, 시아는 이태리의 여운이 남아 그런지, 여름학교라는 또 새로운 환경이 싫었는지,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남은 여름 자전거를 타고, 속이 시커먼 코펜하겐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박물관에 미술관을 구경하며 관광객 놀이를 했다.

그렇게 방학을 보내고 학교 가기 전날 밤에 시아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못 이루는 것 같았다.

친구들을 다시 보는 건 반갑지만 아직 어떤 친구들은 다시 만나면 낯설 것 같기도 하고, 덴마크 말을 그동안 좀 잃어버렸을 것 같기도 하고, 학년이 올라가 옮긴 교실을 잘 못 찾아가면 어쩌나...

시아를 재우고 나니 나도 긴장이 되었다. 한 학년 올라가는 날인데, 그런 날, 첫 등교의 날에 엄마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뭔가 특별한 게 있을까? 학교에서 보내준 공지사항을 읽고 또 읽었다. 혹시 내가 뭘 잘못 이해해 시아가 난처하게 되지는 않을까? 시아 친구 엄마한테 미리 좀 물어봤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걸 후회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간식을 챙기고, 가방을 챙겨서 등교했다. 첫날이니 나도 같이 교실 앞까지 갔다. 사물함도 옷걸이도 자리가 바뀌어서 시아랑 잠시 헤매는데, 시아가 먼저 제 친구 가방을 알아보고, 그 옆자리에 제 물건을 놓아두었다. 2학년 때와 똑 같이 생긴 교실이다. 다만 한 층 올라가서 이제 3층이다. 밝은 나무 색 교실에는 밝은 나무색 책상과 걸상이 있다. 창문 너머로 먼저와 자리 잡고 앉은 친구들을 한번 둘러보더니

"엄마 이제 나도 들어갈게. 오늘은 좀 일찍 2시에 데리러 와."하고 쪽 입을 맞추고 들어가서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커다란 창 밖에서 앉아있는 시아를 보며 또 이런저런 감상에 젖어 자리를 뜨지 못했다. 다행히 다른 덴마크 엄마들도 이런저런 감상 중인지 나처럼 창문 너머 아이를 보고 있다. 수업종이 치고 아이들이 선생님과 인사하는 걸 보고서야 감상에 젖었던 엄마들이 발길을 돌려 나왔다.

시아 친구 A 엄마가 먼저 인사를 해주었다.

여름방학 얘기도 하고, 이제 시작하는 스케이트 얘기도 했다. 오래 알았던 사람처럼 식구들의 안부도 묻고, 좋은 하루를 기원하며 헤어졌다.


딱 2시에 시아를 데리러 갔는데, 시아가 노느라 정신이 없다.

"엄마, 진짜 미안한데, 이따가 3시, 아니다, 4시에 오면 안 돼? 너무 재밌는데..."

"응?! 재밌어?! 엄마가 왔다 갔다 진짜 싫어하는데, 오늘만 특별히 봐줄게. 알았어 이따가 4시에 만나."

시아가 친구들 사이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멀리서 좀 더 구경하고 왔던 길을 돌아왔다.

2시간 대기했다 다시 데리러 가니 땀에 흠뻑 젖은 시아가 가방이랑 신발을 챙기고 있다.

"시계가 있으니까 좋다. 엄마 오는 시간에 맞춰서 신발이랑 가방을 찾아오니까, 엄마도 더 좋지?"

"응, 그러네. 엄마 왔다 갔다 해서 짜증 낼까 봐 가방, 신발 미리 챙겼구나?"

"맞아, 엄마는 왔다 갔다 싫어하니까. 괜찮지?"

응, 오늘은 많이 괜찮아. 내 걱정도 시아 걱정도 다 기우였다.

걱정할게 하나도 없었던 3학년이었다.


새 학기부터는 체조도 시작하게 되었다. 작년에 하던 스케이트도 반을 올려 계속하게 되었다.

학교 끝나고 체조를 가거나 스케이트를 가고,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고, 중간에 간식을 챙겨주고, 늦을까 봐 서두르고, 운동하고 배고파서 군것질을 하려는 시아에게 밥 먹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호통을 치고.

새 학년이 시작되고 지난 2주를 그렇게 보냈다.


시아는 즐겁게 학교에 가고, 운동을 하러 다니고, 친구네 집에 놀러도 가고,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기도 한다.

혼잣말로 덴마크 말을 하거나, 학교에서 배운 덴마크 말을 흥얼흥얼거리고,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같은 나라들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된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스케이트 가방을 챙기고, 체조할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이태리에서는 절대 안 먹었던 덴마크 아이들이 먹는 간식 중 제일 달콤한 시리얼바를 먹는다.

맛이 없다던 덴마크 우유도 꿀떡꿀떡 마시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덴마크 책을 읽어가며 킥킥 웃기도 한다.


한 천년쯤 덴마크에서 어린이를 하고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 딱 1년 전에 시아는 덴마크에서는 살아 낼 수 없을 것처럼 마음이 아팠고, 두고 온 모든 것이 그리웠다. 언젠가...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그런데 그 언젠가가 벌써 와버렸다.

시아의 천연덕스러운 일상을 따라다니다 이태리에서와 다를 것 없는 미소와 궁금증을 되찾은 시아를 발견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랑 스트레칭을 한다며 깔깔 거리며 뒹구는 시아에게 길고 긴 기립박수를 치고 싶어 졌다.

친구에게 내일 만나자고 경쾌하게 인사를 한 시아가 내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데도 나는 공연의 감동이 가시지 않은 관객처럼 마음속으로 시아의 웃음소리에 자꾸만 박수를 보냈다. 

"엄마 무슨 생각해? 왜 나 보고 뭐 했는지 물어보지도 않아?"

"시아 생각."

"나하고 있는데, 내 생각을 해? 엄마 웃긴데. 무슨 생각?"

"시아가 멋있다고. 우리가 덴마크에 온 지 1년밖에 안 지났는데, 시아는 오래 살았던 사람처럼 참 멋있게 잘 적응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니야. 그렇다고 내가 이태리보다 덴마크를 좋아하는 건 절대 아니야."

"응, 그건 엄마도 알아. 그냥. 시아가 아직 이태리를 좋아하지만, 덴마크에서 재밌게 지내는 방법도 많이 찾아낸 것 같아서,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뭐, 그건 맞지. 재밌는 건 내가 잘 찾지. 나는 재밌는 거 잘 찾는 사람인가 봐 하하하"

"하하하"


네게 그 언젠가가 오면, 나에게도 그 언젠가가 올 줄 알았는데, 그 언젠가는 너에게만 찾아왔다. 네 걱정을 한 건지, 네 핑계를 대고 있었던 건지 나는 그동안 재밌는 걸 찾지 않았고, 찾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이제는, 나에게도 그 언젠가가 올 수 있도록 재밌는 것들을 채워가야겠다. 


1년 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다시 사랑하는 네가 참 멋있다.


그나저나... 나는... 무슨 재미를 찾아 나에게 기립박수 칠 날을 이루어 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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