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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Sep 13. 2019

너하고 놀아도 돼?

"엄마, 여기 친구들은 이태리 친구들하고 다르다."

"다르겠지. 다른 나라 사람들이니까. 아무래도 다르겠지. 그런데 뭐가 다른데?"

"응... 여기 친구들은 그냥 와서 같이 놀지 않고, 꼭 물어본다. 너하고 같이 놀아도 돼? 이렇게."

"그래? 이태리 친구들은 그런 거 안 물어봤어?"

"응, 만약에 내가 다른 친구들이랑 놀고 있을 때 어떤 친구가 우리랑 놀고 싶으면 그럴 때는 이태리에서도 물어봤지. 너희들이랑 같이 놀아도 돼? 이렇게. 그런데 여기서는 내가 혼자 있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있어도 물어봐. 너하고 같이 놀아도 돼? 애들이 다 그래. 신기하지?"

"그러네. 그럼 이태리 친구들은 시아 혼자 있을 때 놀고 싶으면 어떻게 했어?"

"그냥 와서 놀지. '안녕'하고, '뭐하고 놀자' 이렇게 말했지."

"그럼 시아는 여기 친구들이 같이 놀아도 되는지 물어보면 기분이 어때?"

"뭐, 괜찮아. 물어봐도 괜찮고 안 물어봐도 괜찮은데, 그냥 좀 신기한 거지."


"너하고 같이 놀아도 돼?"

그거구나.


이태리 사람들은 하나, 둘, 셋 하고 숨을 고르는 일이 없다. 사람을 보면 직진한다.

"안녕! 이름이 뭐니? 어디서 왔니? 어떻게 지내? 어디가? 애는 몇 살이니? 이태리가 맘에 드니? 이태리에서 친구는 사귀었니? 무슨 일을 하니? 일은 재미있니? 가방 예쁘다. 옷이 예쁘다. 오늘 머리스타일 참 좋다. 오늘 날씨 좋지 않니? 벌써 며칠째 비가 오는 거니, 너무 지겹다 그렇지?"

이런 말을 하루에 열명을 만나면 열 번을 듣는다.

그날그날 상대에 따라, 날씨에 따라 본인의 기분에 따라 조금씩 내용이 변하기는 하지만, 그냥 지나치는 일은 없다.

"나 너한테 인사해도 돼?" 이런 걸 물어보는 이태리 사람은 없었다.

출근 지하철에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동네에서 한 두 번 마주친 사람을 만나면 난 늘 좀 곤욕스러웠다.

친하지는 않지만, 인사는 무조건 해야 하고 인사를 하고 나면 둘 중 한 사람이 내릴 때 까지는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이태리 사람들은 술술 아무 질문을 하고, 아무 대답을 잘도 하는데, 나는 딱히 물어볼 것도 없고, 들려주고 싶은 내 얘기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경우에 나도 모르게 "넌 어디서 내려?"를 먼저 물었다. 나보다 먼저 내린다고 하면 속으로 안도했고, 나보다 나중에 내린다고 하면, 한숨을 좀 쉬었다.


아무와 아무렇게나 대화를 하지만, 그건 이야기를 나눈 상대와 가까워지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눈이 마주치면 입을 열어 소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소통은 10년쯤 만난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고 매끄러워야 하지만, 볼에 쪽 입까지 맞추고 헤어졌어도 영원히 다시 못 만나기도 한다. 

아무런 질문에 사실과 진위를 따지느라 아무런 대답을 못하는 일이 많은 나는 그런 소통이 사실 불편했다.

가끔 이태리 이웃들을 단체로 왕따 시키며 혼자 아주 바쁜척하며 길을 걷기도 하고, 소통이 발생할 것이 당연한 상대가 나타나면 길을 우회하기도 했다. 그 사람들이 싫었던 건 아니다. 다만, 일 년 내내 유쾌하고, 궁금하고, 들려줄 소식이 많은 사람들에 비해 나는 담담했고, 궁금하지 않았고, 들려줄 소식도 별로 없었다.


시아와 태어난 이후로 그 소통은 화산이 터지듯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했고, 세상 모두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육아는 본디 행복하지만 외롭기도 하기에, 나도 어느새 조금씩 마음을 열고, 아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서툴고 부자연스럽지만 아무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다른 엄마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유모차 안에 머리가 까만 아이를 예쁘다고 하시는 어른들과도 안부를 나누었다.

여전히 나는 다소 뚱한 이방인이었지만, 이태리 사람들의 아무런 인사가 스며, 이상할 것도 불편할 것도 없는 오래 산 외국인이 되었다.


덴마크에 오고 나서, 나는 서운했다.

아무도 나를 서운하게 하지 않는데 그냥 서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서운한 내 기분이 불편했다.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우울한 것도 아니고, 처음 오는 나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서 서운함을 느끼는 내가 짜증스러웠다. 


왜 나는 서운할까? 


그리고 일 년의 서운함 끝에 아홉 살의 예리한 통찰을 통해 그 답을 찾았다.


이 사람들이 "너하고 같이 놀아도 돼?"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라 그랬던 것 같다.

한참 보고, 한참 마주치고 나서야 "너하고 같이 놀아도 돼?"라고 진중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라 그랬던 것 같다.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나를 봤으면 웃어야 하고, 아무런 질문을 해야 하고, 내 귀여운 아이를 봤으면 손을 흔들며 나이를 물어봐야 하고, 내 수줍은 남편을 만나면 너희들은 덴마크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물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 나하고 놀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다음에야 "너하고 같이 놀아도 돼?"라고 물어보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나는 늘 지나치고 과하고 넘치던 아무런 결론에도 이르지 못할 의미 없는 인사들이 사무쳤나 보다.



시아가 A를 우리 집에 데리고 온 이후, 시아와 A는 부쩍 가까워져서 매일 붙어 다녔다.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시아를 데리러 갔는데, 어김없이 시아와 A가 같이 놀고 있다. 금요일이라 그랬는지, 둘이 더 놀고 싶어 떨어지기 싫어하는 눈치여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야 할까? 먼저 약속을 안 하고 막 데리고 와도 될까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A를 데리러 온 A의 아빠가 먼저 시아를 데리고 가서 A와 더 놀게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약속도 안 했는데, 미안하다. 당신이 괜찮다면 나는 괜찮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시아를 보냈다.

저녁시간 전에 시아를 데리러 가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아이들이 잘 놀고 있으니, 저녁까지 먹이겠다고 연락이 왔다.

아이들이 저녁 다 먹었을 시간쯤 시아를 데리러 갔는데,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식탁을 치우던 A의 엄마와 아빠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우리 부부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이태리에서 시아가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의례 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시아를 데리고 나왔다.

우리 집에 시아 친구가 와도 의례 문 앞에서 아이 엄마와 인사를 하고 보냈다.

그런데. 오며 가며 인사도 제대로 안 해본 사람들이 우리를 들어오란다.

"우리가 이사한 지 얼마 안돼서 집이 어수선해. 앉아. 우리 저녁에 먹던 소시지가 좀 남았는데 먹을래? 아, 와인 어때? 너희들이 이태리에서 왔으니까 이태리 와인을 마셔야겠다. 이태리 와인 괜찮지?"

"응?..!!! 응... 응"

시아와 A는 엄마 아빠들이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보고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A방으로 쏙 다시 들어가 버렸다. 

두 딸을 키우며 즐거운 얘기, 아이들이 성향이 달라 힘든 얘기, A가 들려주었던 시아의 얘기, 본인들이 다니는 직장 얘기, 십 대 때 첫사랑 얘기, 취미로 하는 조깅에 중독되고 말아 피곤하다는 얘기를 했다.

아직 오며 가며 아무런 얘기를 나눈 사이도 아닌데, 이토록 담백하게, 1년 동안의 아무런 얘기의 부재를 바로 뛰어넘어버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이태리 와인을 홀짝이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도 모르게 사무친 내 서운함을 열어버렸다.

"덴마크는 대체적으로 참 좋은데, 그런데 말이야. 사실 나는 덴마크 사람들이 좀 차갑다고 느꼈어. 이태리에서 살다왔기 때문일까? 덴마크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게 너무 어려운 것 같았어. 짧게 대화를 하고 인사를 할 때도 나는 덴마크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어서 나를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알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아마 싫어하는 것 같다고 느낀 것 같아. 이태리 사람들은 좀 투명해. 얼굴에 손에 마음이 다 보여. 그런데, 덴마크 사람들은 말도 많이 안 하고, 표정도 잘 변하지 않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너무 솔직하게 튀어나온 취하지도 않았는데 나온 진담에 나도 조금 놀랬다.

내 말을 들어준 부부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말이 맞아.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린 쉽게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아. 그건 그렇게 하기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렇게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네 말이 맞아. 오히려 우리는 이태리에 놀러 가면 아무 하고나 얘기 잘하는 이태리 사람들이 생소하게 느껴져. 하지만, 그 사람들이 더 친절하다고 느껴지는 건 사실이야. 그렇다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네 얘기 조금은 알 것 같아. 그거 알아? 덴마크 사람들과는 술을 같이 마시는 게 친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

두 부부가 웃는다.

"이거 봐 우리도 같이 와인을 한잔 하니 이렇게 말이 많아졌잖아. 덴마크가 외국인들이 살기 쉬는 나라는 아닌 것 같아. 우리 이렇게 가끔 와인을 마시는 게 어때? 우리 부부가 술을 더 많이 마시고 나면 이탈리아 사람들보다 말이 많아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할 거야."

그렇게 웃으며 대화하는데, 열어놓은 문 앞으로 이웃들이 지나간다.

A의 엄마 아빠는 손을 흔들어 이웃을 안으로 청한다.

"들어와, 같이 와인 한잔 하자. 마침 우리의 새로운 친구가 있어. 너희들에게 소개해줄게. 모두 가까이 살고 있으니까 이제 서로 알고 지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응, 와인? 좋지?"

그렇게 해서 A네 거실은 금세 북적북적해졌고, 우리는 마치 이 사람들과 오래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와인을 따라 마시고, 사춘기가 될까말까한 아이들에 대해 험담을 하고, 누구네 집 차가 두 번씩 같은 곳에서 주차 딱지를 떼었다는 얘기를 하고, 같이 조깅을 하자는 A의 아빠의 권유에 단체로 콧방귀를 뀌며 대답을 대신했다.


"시아는 학교 끝나고 아무 때나 우리 집에 놀러 와도 돼. 미리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부담 갖지 말고, 오늘 즐거웠어."

쪽쪽 입을 맞추는 대신, 담담하고 정다운 인사를 건넸다.

가을 건너뛰고 겨울 온 것처럼 싸늘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이태리산 와인에 살짝 취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셋이는 각자 상쾌했다.


"너하고 놀아도 돼?"

그 질문을 건너면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좋은, 서로의 거실에 자리 잡고 편하게 앉아 와인 한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걸까?

다리가 길어 보폭이 넓은 걸까? '너를 몰라'에서 '너 하고 놀아도 돼?' 오는 동안 긴 다리로 넓은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나는 서운했는데 막상 그 한 걸음에 발을 맞추려니 종종종 나는 빠르게 몇 걸음을 달려야 했다.


이방인이고 주변인이길 스스로 선택한 나는 늘 조금의 서운함을 품고 살겠지만, 지금 만큼은 안 서운하다. 

"나하고 놀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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