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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Jun 17. 2018

8살의 땀은 정직하다.

시아가 체조를 배우기 시작한 건 특별히 재능을 보였다거나 우리 부부가 체조를 좋아한다거나와 같은 특별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우리 동네 여자 아이들은 모두 체조를 배운다고 하고, 시아도 친구들과 같이 다녀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시작한 운동이다. 첫 해는 일주일에 두 번씩 가서 한 시간 동안 친구들이랑 쉬지 않고 뜀을 뛰었다. 시아가 아주 즐거워했고 행복해했기 때문에 우리도 행복했다. 그저 행복하게 뜀을 뛰었을 뿐 대단한 재능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실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기대하지 않았고, 시아는 결과를 욕심내지 않았다.

체조를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지난겨울에 욕심은 내지 않았지만 체조를 아주 많이 즐겼던 시아가 체조 대회에서 입상을 했다.

트로피를 자주 마른 수건으로 닦고, 가끔은 학교에 들고 가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아무데서나 덤블링을 했고, 매일 저녁 '아야, 아야' 소리를 지르면서 다리 찢기를 했다.


체조 학원에는 일주일에 3일을 하루에 3시간 동안 훈련하는 선수반이 있다.

작년에 시아의 단짝 친구 M이 7살로는 유일하게 그 반에 합류했다. 시아는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했고, 선망했다.

"나도 M이랑 같이 체조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려면 진짜 잘 해야 되겠지. 나도 계속 많이 연습하면 같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치? 그런데 같이 못해도 괜찮아. 체조는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아닐 수도 있지. 그치?"

M을 대하는 시아에게서 순도 높은 부러움이 느껴졌다. 그냥 부러운 것이다. 친구가 부럽고 참 대단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친구가 부러워 배가 아프거나 속이 상하지는 않다. 그저 친구가 참 멋있다고 생각하는 시아가 가진 그런 부러움이 나는 참 부러웠다.


시아와 M은 같은 반은 아니지만 쉬는 시간이면 함께 학교 정원에서 체조 놀이를 한다고 했다.

"체조 놀이? 그게 어떻게 하는 놀이야?"

"M이 선생님 하고, 내가 배우는 거야. M은 진짜 어려운 거 많이 할 수 있어. 배에 거북이도 있어."

"거북이? 배에?"

"응, 배에 거북이처럼 이렇게 이렇게..."

제 배를 까고 손으로 가로 세로 줄무늬를 그어 보인다.

우리는 초콜릿이라고 하는 복근을 이태리에서는 거북이라고 하는구나.


지난달에 비밀스러운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몇 월 며칠 몇 시까지 체육관으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고 나와달라는 것이다.

말하지 말라고 하니,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아이 키우는 것도 처음이고, 이태리에서 아이 체조시키는 것도 처음인 나는 겨우 궁금한 것을 참다 문자에 적힌 시간에 체육관을 찾았다.

시아네 반 선생님이 계실 줄 알았는데, 다른 선생님 두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나 말고 다른 엄마 둘이 또 있다.

두 엄마는 싱글벙글 뭔가 아는 듯한 표정이었고, 나는 도대체 영문을 몰라 쭈뼛거리며 교무실에 혼나러 간 학생처럼 긴장했다.

시아와 다른 아이들 둘에게 선수반에 합류할 기회를 주고 싶다고 하신다.

선택은 부모님들과 아이들 본인이 하는 것이니 돌아가서 가족들과 상의를 해보고 답을 달라고 하신다.

아이들의 의사를 물을 때,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선수반 합류 제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고 당부를 하셨다.

합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실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이번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원래 하던 대로 수업하고, 전체 발표가 있은 이후 여름 방학 때부터 훈련을 시작해서 다음 학기부터는 계속 연습과 대회 출전을 하는 일정이라고 하셨다.


밀라노 변방 이 작은 마을에서 영원히 살 줄 알았던 그 날. 나도 모르게 목이 뻣뻣해지고 어깨가 불쑥 솟아 올라 대회 출전하게 되면 주말에 한글학교랑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습이 고되어 학교 생활이 힘들지 않을지 같은 선수 엄마 다운 걱정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황가수에게 눈을 찡긋해 부엌으로 불러 짧게 상황을 설명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을 하려던 의도였으나, 황가수는 허허허 큰 웃음을 한번 웃더니, 재잘재잘 시아에게 모두 발설해 버리고 말았다. 시아는 너무 좋아 볼이 빨갛게 상기된 채로 아빠 품에 안겨 "너무 좋아, 나는 너무너무 좋아"를 무수히 반복했다.


그날 저녁 M의 엄마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시아가 선수반 들어오게 된 거지? M이 체육관에서 선수반 선생님과 네가 면담하는 걸 봤다고 했어."

"응, 맞아. 선수반 제안받았어."

"할 거야? 같이 하면 좋겠다. 우리 M은 시아랑 같이 운동하는 게 소원인데... 선수반에 대해 물어볼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어떤 결정 내렸는지 꼭 알려주고."

"하기로 했어. 시아도 너무 원했던 일이라 바로 결정했어."

"그래? 잘했어! 나도 M에게 얘기해 줄게. 정말 잘됐다!"


친구들에게 비밀로 해야 하니 크게 말도 못 하고 M과 시아는 등교 길에 만나 그저 좋아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렇게 기뻐하는 시아에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덟 살인 것 같은 시아에게 우리에게는 좋지만, 시아에게는 아주 힘든 '이사' 소식을 전했고, 얼마간의 눈물과 큰 아픔을 지나 이사 가기 전 까지는 체조 훈련을 하기로 결정했다.


학기 말 전체 체조 발표회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연습에 절대 빠지지도 늦지도 않았고, 발표하는 날까지는 공연 내용이 비밀이라고 방문을 꼭 닫고 배운 동작을 복습했다.


온 동네가 들썩들썩한 체조 발표는 작년보다 더 대단했다. 커다란 축구장 관중석은 어김없이 만석이었다.  올해 발표의 주제는 '오스카'였다. 오스카 시상식장을 닮은 무대에서 다양한 영화 주제곡에 맞추어 체조를 선보였다. 시아네 반은 Pulp Fiction 주제곡인 Pumpkin and Honey Bunny에 맞추어 댄스와 체조 동작을 선보였다. 노안이 오니 마니 하는 와중인데 많은 아이들 사이 시아는 참 잘도 보인다. 멀리 무대에 있는 시아의 헉헉 숨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틀리지 않으려고 다음 동작을 미리 생각하느라 가끔 골똘한 것 같은 표정도 다 보인다. 시아의 주 특기인 덤블링을 할 때는 더 높이 더 멀리 뛰기 위해 호흡을 고르며 꼭 쥔 작은 주먹도 다 보인다. 자정이 넘어 발표가 끝나고, 얼굴에 반짝이 화장을 한 시아를 만나 집으로 돌아왔다.


"힘들지 않아?"

"응, 힘들지. 진짜 힘들어. 그런데, 아까 큰 언니들 하는 거 봤지? 진짜 잘해. 그렇지? 너무 멋있지. 어떤 언니는 평행봉에서 한번 떨어지는 거 봤어? 그때 내가 여기 있잖아. 심장. 여기. 여기가 차갑게 됐었다. 그 언니 진짜 잘 하는데. 원래는 한 번도 안 떨어져. 그래도 괜찮아. 떨어졌어도 열심히 했잖아...  힘들었는데, 진짜 재밌었다..."

축 늘어진 시아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얼굴에 반짝이를 닦아주는데 시아가 말을 하다 말고 잠이 들었다.


발표가 끝나고 학교도 방학을 하고, 선수반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 시간 조금 전에 체육관에 도착하니, 뭔가 기운이 남다른 선수 부모님들이 계신다. 아이들은 신입생 시아를 환영했고, 부모님들은 나를 환영해 주셨다. 모두 우리가 곧 떠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한 달짜리 선수 대우를 하지는 않았다. 열렬히 환영했고, 반겨주었다.

밖에 서서 한참 연습 구경을 했다. 시아도 처음이지만 나도 처음이니 궁금했다.

난도가 높은 준비 운동을 하는 모양이다. 뛰고 뛰고, 펴고 펴고. 시작하고 10분도 안되었는데 시아는 땀범벅이다.

에어컨도 없는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천막 형식의 체육관이니 더위가 보통이 아니다.

배에 '거북이' 있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시아는 아직 귀여운 배도 볼록하고, 서양 아이들의 우월한 팔다리 길이 앞에서는 꼬꼬마처럼 보였지만,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고 열심히다.

손으로 연신 땀을 훔치며 꽁지머리를 단단히 매고 입술을 앙 다물고, 매달리고, 뛰고, 넘기를 계속했다.

구경만 했는데도 지쳐 3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집에 들렀다 시아를 데리러 갔다. 마지막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머리는 다 흐트러지고 온 몸은 땀범벅인데, 시아가 웃는다. 계속 웃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시아를 안아 주었다.

운동선수 냄새가 난다.

"아이고, 시아 땀 냄새 대단한데."

"응, 진짜 땀이 많이 났어. 엄청."

"힘들지? 다리 아프지 않아?"

"아니, 괜찮아. 너무 재밌다. 엄마 나는 또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더 큰 언니들은 4시간 연습한대. 나도 나중에는 4시간 하면 좋겠다. 덴마크에 체조 있는지 꼭 물어봐. 알았지?"


M도 옷을 갈아입고 뛰어나와 얼른 시아 손을 잡는다.

집에 오는 길에 M의 아빠가 시아에게 농담을 한다.

"시아야. 시금치를 많이 먹어야겠다. 그래야 근육이 많아지지. 알았지? 덴마크 가서는 시금치 많이 먹어. 그래서 M이랑 대회에서 만나자. 그러면 정말 좋겠다."


시아는 수영장 물속에서도 물구나무를 서고 덤블링을 한다. 여름학교에서는 M과 덤블링을 하고 물구나무를 선다고 한다. 오늘만 있는 것처럼. 오늘 제일 좋아하는 체조를 오늘 제일 좋아하는 친구랑. 오늘이 영원인 것처럼 열심히 한다.


시아가 얼마나 오랫동안 체조를 할지는 모르겠다. 얼마나 진지하게 체조를 계속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시아가 정말 체조를 잘 하는 건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마에서부터 흘러 작고 얇은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땀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 도움닫기를 할 때 입을 꽉 다물고, 작은 주먹을 꼭 쥐고, 귀여운 종아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 시아를 보면 나도 모르게 여기. 심장. 여기가 뜨거워진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다리를 높이 뻗고 덤블링을 해서 흐트러지지 않고 제자리에 서는 것, 평행봉에서 높이 점프를 하고 팔을 쫙 펴는 자세로 착지 하는 것, 유연하게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 그게 시아가 바라는 것이다. 누구보다 잘 하는 것도 아니고, 1등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한계를 넘어 만족할 만한 동작을 해내는 것. 그래서 시아는 땀을 흘린다. 그래서 시아는 아무리 땀이 나도 웃음이 난다.

땀을 흘리며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나는 그런 시아에게 자꾸만 감동한다.

대단한 선수가 되지 않더라도, 온 마음을 다하는 경험, 땀 흘리며 웃는, 영화보다 감동적인 경험을 담고 살아가 주길 바란다.

땀 흘리며 웃는 법을 배운 다음이라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조금은 더 행복하게, 조금은 더 의연하게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다.


그래서 나도 오늘만 있는 것처럼, 이번 달은 단백질 많이 들어 있는 간식을 준비하고, 생과일 주스를 갈아 챙겨 주는 선수 엄마를 땀 흘리며 웃으며 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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