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yaMya Sep 27. 2019

활활 태우는 아홉살

시아가 덴마크에 마음을 내어주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엄마인 내가 보기에 시아의 마음을 녹인 가장 따뜻한 요인은 스케이트와 체조이다.

덴마크에 오고, 임시 집에서 불안한 한 달을 살고,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시아는 비로소 외로웠다. 이제 나는 이태리로 돌아갈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외로운 사아 손을 잡고 동네 산책을 하다 스케이트장을 발견했다. 스케이트장 앞에는 펭귄 그림이 그려있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시아야? 저거 해볼래?"

그렇게 시아는 스케이트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대로 서기도 어려워 엉덩방아를 찧기 일 수였고, 말도 못 알아듣고, 친구도 없었지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스케이트를 다녔다. 펭귄 두 마리를 내세운 스케이트 학원은 오로지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는 학원이다. 특별한 기술을 지도하기보다는 빙판에서 신나게 노는 것이다. 그렇게 한 겨울을 지나 봄이 올 때까지 빙판에서 노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 느리게 꽃이 피는 봄에 동네로 학교를 옮기고, 그동안 다니던 스케이트장에 또 다른 학원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반이 되면서 만난 친구를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친구를 따라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여, 그렇게 했다.

그렇게 우연히 찾아간 학원에서 아이들은 점프도 하고,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기도 하고 음악에 맞추어 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했다.

"엄마!! 나도 여기서 배우면 안 돼? 나 여기 오고 싶어."

그렇게 해서 봄에 두 번 시험 수업을 하고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새 학원을 다니고 있다. 학원을 옮기고 시아는 금세 두 반을 월반하고, 일주일에 4번보다 강화된 훈련을 하고 있다. 9월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 학교 가기 전 연습이 생겼는데, 6시 반부터 하는 새벽 연습도 빠지지 않고 출석한다. 

"너무너무 재밌어. 진짜 잘하게 되고 싶어. 엄마 오늘 이렇게 하는 거 배웠다. 아빠 이거 봐. 나 따라 해 봐. 내 친구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나도 나중에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난주부터는 초보자 어린이반에서 선생님 도움이 역할도 맡게 되었다. 뒤뚱 거리며 넘어지는 다섯 살 꼬마들의 손을 꼭 잡고, 같이 스케이트를 타는 역할이다. 아주 아주 소정의 수고비를 받는데, 시아는 그 사실에 스스로가 너무 대단하고 대견해 아이들 도와주러 나서는 길에는 늘 어깨가 빵빵 부풀어 오른다.

스케이트를 4년 정도 타고 대회에도 나가는 친구, 언니들의 시범을 볼 때는 가끔 눈가가 촉촉해지기도 한다.

다른 아이들이 화려한 점프를 선보이면 "아!!! 와!!!!" 조용히 감탄사를 내뱉으며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스케이트 장에서는 또래의 여자 아이들과 탈의실에서 스케이트를 신고 벗으며 깔깔깔 웃기도 하고, 스트레칭 시간에 다 같이 비명을 질러가며 다리 찢기를 하기도 한다.  같이 스케이트 타는 친구를 집에 데리고 와서 방문을 닫아 놓고 스케이트 얘기를 하기도 하고, 한 달에 한번 있는 스케이트장의 '아이스 디스코' 파티에서 밤 9시가 넘도록 빙판을 질주하기도 한다. 아침 6시 반에 시작하는 아침 연습에 빠지지 않으려고, 아침 연습 전날에는 일찍 자고, 아직 깜깜한 새벽에 제 이름을 한번 부르면 벌떡 일어난다.


언제, 어떻게 시아에게 스케이트에 대한 이만큼 큰 마음이 생겨버렸는지 모르겠다. 늘 함께 있었지만 눈치채지 못했다. 

딱 1년 전 이맘때 외로운 시아는 선생님의 말을 못 알아들어 다른 아이들을 보다 한 박자 늦게 움직이며 스케이트를 탔다. 어쩌면 힘들고 어려울 수 있는 환경에서 집중을 하며 따라가려고 애쓰는 시아가 늘 안쓰러웠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서라도 친구도 사귀고, 즐거운 일을 찾게 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었다. 내가 미처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시아에게 스케이트는 없어서는 안 되는, 덴마크에서 제일 신나고 즐거운 일이 되었다. 

이태리에 체조를 두고 온 이후 다시 기쁘게 숨을 헐떡거리며 땀 흘리는 시아를 보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번에도 내가 틀렸다. 기적 같은 9살은 그리움도 외로움도 이기고, 그 새 새로운 열정을 찾았다.

운동선수의 앞날 같은 건 바라거나 꿈꾸지 않는다. 그렇게 돼도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도 하나도 나쁠 게 없다. 운동선수의 엄마를 해 낼 만큼의 희생정신이나 근성이 없는 나를 잘 알아서 이기도 하고, 꿈도 바람도 어디까지나 시아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거나 품을 일이 아니다. 나는 그저 해가 넘치던 나라에서 처럼 환하게 웃고 들뜨고 설레고 기대하고 온 힘을 다하는 시아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고 넘친다.  


시아는 이태리에서 꿈에 그리던 체조 선수반에 들어갔지만 바로 덴마크에 오게 되어서 한 달 정도 선수 생활 맛만 보고 그만두게 되었다. 꿈을 이루었는데 외부 요인으로 그 꿈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시아가 많이 힘들었다. 덴마크에 와서 주소지가 정해지자마자 학교보다 체조를 먼저 알아봤다. A자 위에 동그라미가 얹혀있거나 O 자 가운데 줄을 그어놓은 덴마크 말을 도저히 알 수 없어 크롬 브라우저의 자동 번역의 도움을 받아 짐작을 해가며 체조 학원에 연락을 했다. 그런데! 까막눈 엄마가 자동번역기에게 굽신거리는 동안 체조 신청 기간이 지나 버렸다. 결국 대기자 80 몇 번. 해가 지나도 당겨질 수는 없는 순번이다. 시아도 나도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해가 거의 다 지나고 다시 올봄.

시아가 새로 사귄 친구가 체조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기회가 생겨 그 아이 엄마와 얘기를 나누다 시아도 체조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대기자 80 몇 번이라 포기했다는 슬픈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 엄마가 포기는 금물! 매년 신청을 새로 받으니 신청받는 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사이트를 열어두었다가 신청이 열리자마자 클릭 클릭을 하면 체조를 배우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본인도 그 치열한 절차를 거쳐 딸들 둘 체조를 가르치고 있다며 나도 할 수 있을 거라 격려해주었다. 

행여 클릭하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늦어버리는 불상사가 생긴다고 해도 포기는 금물. 그렇다면 체조 학원 자원봉사를 신청하라고 했다. 엄마가 자원봉사를 하면 아이를 100% 등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은 체조 학원의 문을 여는 황금 열쇠가 하나 있다고 했다. 그건 바로 단체팀 선수 오디션에 뽑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클릭할 것도 없이 무조건 체조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디션 3차 중에 이미 1.2차가 끝났고 이제 더 이상 신청이 안될 거라고 했다. 
 아쉬움은 나중일로. 신에겐 아직 3차가 남았다!!!
 나는 친구 엄마에게 오디션 담당자 연락처를 받아 바로 메일을 보냈다. '오디션을 하는 줄 몰라 기한 내 등록을 못했습니다. 우리 딸은 이태리에서 자그마치 3년 체조를 했고 선수반에도 뽑힌 경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체조를 너무 사랑합니다. 체조를 못한 지난 1년 시아는 무척 슬픈 시간을 보냈습니다. 꼭 한번 기회를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메일을 보내고 나는 치마 바람을 펄럭이는 학부형이 되어 하루에 수천번씩 메일 확인을 했다. 그리고 받은 답변
  '이미 오디션 결과가 나와 3차 오디션은 취소되었지만. 시아에게 한번 기회를 줄게요. 다음 주 아이들 수업 시간에 같이 수업을 받고 수업 중에 선생님들께서 채점을 하실 겁니다'
  시아에게 체조의 길이 열릴지 모르는 오디션이라는 긴장되는 기회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오디션 전날 밤  우리는 떨려 셋이 한방에서 자다 몇 번이나 깨었다. 오디션 가기전 곧 맞이할 상황의 막중함을 잘 아는 시아는 올해 들어 처음 나에게 머리 빗질을 맡기며 예쁘게, 잔머리 하나도 안 나오게 잘 묶어 달라고 주문했다. 제비 같이 까만 머리를 한 비장한 얼굴의 시아가 2시간짜리 체조 수업을 받으러 들어가고 나는  집에 와서 좀 떨었다.
  끝날 때쯤 시아를 데리러 가니 시아가 땀에 흠뻑 젖어 열심히 뛰고 돌고 있다. 수업이 다 끝나고  선생님들 두 분이 나오셔서 시아를 더 가르쳐보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좀 울뻔했다. 시아는 너무너무 좋아서 집에 오는 내내 춤을 추었고 집에 와서는 이불을 쓰고 소리를 지르고 크게 웃었다. 

그렇게 시작한 단체 체조는 시아가 이태리에서 하던 기계체조와는 조금 다르다. 무협 영화 주인공들처럼 훽훽 텀블링을 배우고, 다 같이 음악에 맞추어 체조 안무를 익힌다. 단체 체조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체조라고 알고 보낸 덕에 시아는 처음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엄마, 체조는 맞는데, 뭔가 좀 달라. 도는 것만 하고, 평행봉이랑, 철봉도 없어. 춤을 배우고... 좀 이상해."

"그래? 시아가 생각했던 체조가 아니야? 너무 재미없거나 힘들면 안 해도 괜찮아."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친구가 없어서 좀 심심하지."

그러고 보니 단체 체조하는 아이들 중에 시아 같은 반이나 같은 학교 같은 학년 친구는 하나도 없다.

모두 새로운 친구들이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6살 때부터 같은 팀으로 체조를 해왔다고 한다. 

"꼭 해야 되는 건 아니니까 시아야, 힘들거나 너무 심심하면 안 해도 괜찮아. 일주일에 한 번 그냥 가는 체조가 있는데, 그건 엄마가 다시 신청하거나, 엄마가 도와주는 사람을 하면 할 수 있대. 거기는 시아네 바반 A도 다니니까 거기 다녀도 괜찮아."

"아니야. 나 할 수 있어. 내가 시험 봐서 이긴 거잖아 (붙은 거잖아) 그러니까 해볼래. 그리고 내가 잘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좀 더 크면, 그때까지 계속 잘해서 TeamGym (단체 체조) 하면 이태리 갈 수 있어. 알아? 이태리에서 대회를 하는데, 언니 팀들은 거기 갈 거래. 나도 나중에 갈 수 있으면 좋겠어."

"그래? 그러면 정말 좋겠다!"


시아는 학교 끝나고 돌아와서 체조 연습을 하러 가거나 스케이트 연습을 하러 간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체조 오디션 전에 스케이트를 신청했고, 체조를 시작한 후에 스케이트 월반이 되는 바람에 시아는 이태리에서 체조 선수반 했을 때만큼 많이 운동을 하게 되었다. 


"나는 운동을 많이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체조도 스케이트도 잘하게 되고 싶어. 잘하게 되는 게 너무 재밌어."

체조 연습을 하고 와서 내일 아침 6시 반 스케이트 연습에 가려고 일찌감치 잠든 시아 옆에 꼼꼼히 챙겨둔 묵직한 스케이트 가방이 있다.

아홉 살. 아홉 살은 열정이라는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 내는 나이로구나.

그렇게 흘린 아홉 살의 땀이 마침내 익을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응원한다. 동행한다. 지지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하고 놀아도 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