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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Jan 06. 2020

산타가 된 베짱이

9살이지만 아직 산타를 믿는다.


"엄마, 절대로 절대로 진짜만 얘기해야 돼. 알았지?"

"응. 그래."

"하나님은 있지?"

"그럼."

"엄마는 하나님 봤어?"

"아니, 못 봤지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어."

"그럼 산타 할아버지도 있지?"

"엄마는 있는 것 같아." (이건 거짓말 아니다. 나는 진짜로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치? 나도 그런 것 같아. 산타 할아버지가 없으면 누가 선물을 이렇게 많이 줘. 그리고 엄마랑 아빠는 산타 할아버지처럼 비싼 선물은 한 번도 안 사주니까. 아무래도 산타 할아버지가 있는 것 같아."


............ 

"그런 것 같아...."




친구들이 하나 둘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도 혼란스러워했다. 산타 부재의 증거를 찾기 위해 킁킁 냄새를 맡고 조사를 했다. 수사 끝에 나름의 증거와 정황을 바탕으로 일단은 산타 할아버지를 믿어보기로 한 모양이다.


세 번째 크리스마스를 집 밖에서 보내고 있다. 3년 전 크리스마스는 한국에서 보냈다. 한국 가기 전 평소에 아이가 가지고 싶다던 장난감을 사서 이탈리아 집에 숨겨두고 갔었는데 막상 한국에 가니 선물 없이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게 서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할머니 할아버지의 지원도 있으시고 하니 이번만 특별히 산타 할아버지가 한국에도 다녀가시고 이태리에도 다녀가신 걸로 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이후 아이는 산타 할아버지가 집에도 선물을 두고 가고, 놀러 가면 놀러 간 곳으로도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2년 전 크리스마스 때는 두고 온 이탈리아에 대한 식지 않은 그리움과, 짧은 이탈리아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돌아와 많이 허전할 아이의 마음을 생각해 우리 부부가 전에 없이 통 큰 양국 산타를 감당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이태리 여행 가는 날 짐 싸들고 내려갔다가 전기 점검을 핑계로 혼자 다시 올라온 황가수는 숨겨둔 선물 상자를 트리 밑에 두고, 아이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산타할아버지와 루돌프 간식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 내려오는 첩보전을 펼쳤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러 이탈리아에 다녀오기로 했다.



"이번에도 산타 할아버지가 이탈리아에도 오고, 덴마크에도 오겠지?"

"이제 아홉 살이니까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하나만 줄 것 같은데..."

"아니야. 산타 할아버지는 두 번 줄 것 같아. 나는 아홉 살이라도 아직 애기처럼 할 때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산타 할아버지한테 무슨 선물 받고 싶은지 엄마 아빠한테 얘기 안 해줄래. 왜냐하면, 한번 봐야겠어. 친구들이 그러는데, 산타 할아버지 대신 엄마 아빠가 선물을 사주는 거래. 그래서 내가 이번엔 엄마 아빠한테 얘기 안 해주고 선물 기다려 볼 거야. 그래도 내가 갖고 싶은 걸 선물 받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준 게 맞는 거지. 어때? 좋은 생각이지?"


아이는 산타 할아버지에게 무얼 받고 싶은지 예년처럼 편지로 따로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수시로, 아주 자주, '나 저거 갖고 싶어. 저거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아이의 열망을 알아차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즐겨 읽던 시리즈로 발행되는 어린이 도서를 갖고 싶다고 했다. 책을 가지고 싶다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그 소원을 안 들어 주실 리 없다. 그리고 스케이트용 트롤리 가방. 스케이트 좀 타는 언니들이 다 끌고 다니는 바퀴에서 불이 번쩍번쩍 나오는 가방이 있다. 가방의 튼튼한 프레임 위에 걸터앉아 스케이트를 갈아 신는 언니들을 보면서 아이는 항상 아~ 예쁘다~라고 선망했다.

선망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그렇게 해줄 수도 없고, 그렇게 해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아이의 욕망이나 소유가 가볍게 채워지는 경험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엄마다. 가질 수 없는 마음이 처절하지 않게, 가질 수 없는 경험을 예사롭지 않게 쌓아두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 그래서 아이는 엄마 아빠는 대해 절대 비싼 것을 사주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스케이트용 트롤리 가방은 내가 보기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은 아닌 듯했고, 특별히 대단하지도 않았으며, 가격도 비쌌다. 나는 스케이트 트롤리 가방보다 더 필요하고 저렴한 아이의 또 다른 소원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아이는 단발적으로 이것도 저것도 가지고 싶어 했기 때문에, 나는 여러 후보를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 아이가 스케이트 대회에서 성과를 내었다. 우리도 아이도 기대했거나 바라지 않았던 결과였기에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스케이트 연습도 매일 하고, 대회도 자주 나갈 것 같으니까, 그 가방 사주면 어떨까?"

"그 가방 비싸던데... 올 겨울에 자전거도 사기로 했고..."

"내 자전거?"

"응, 체인 자꾸 빠져서 타고 다니기 어렵잖아. 이번엔 자전거 사고, 가방은 다음에 사주지 뭐."

"아니야. 내가 자전거 고쳐볼게."


황가수는 무엇을 고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그를 '파괴지왕'이라고 부르며, 강철 열쇠, 수도꼭지, 각종 전자 제품 등 그의 손이 닿아 파괴된 물건의 리스트는 아직도 작성 중이다. 황가수도 자신의 손의 괴력을 잘 안다. 그래서 섣불리 무언가를 수리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런 황가수가 무려 자전거 체인을 교체한다는 것이다. 황가수는 덴마크에 오자 마자 중고 자전거를 사서 1년 반 정도 하루도 빠짐없이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덴마크 물가에 놀라 새 자전거는 생각도 못했고, 중고 사서  몇 개월 사용하다 바꾸자고 했던 게 지금까지 왔다. 중고이지만 나름 잘 달려주던 자전거가 최근에 체인이 자주 빠지는 말썽을 일으키면서 미뤄왔던 2륜 자가용 교체를 결심했었다. 그런데, 아이가 가방을 꿈꿨고, 스케이트 대회에서 상을 받아 온 것이다.


황가수는 파괴지왕이기도 하지만 베짱이 이기도 하다. 욕심은 없지만 충동적인 구매를 강행하기도 하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등의 긴축을 피곤해한다. 오늘 할 수 있다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늘 모든 것을 허용하고 내일은 노래만 한다. 오늘만 사는 노래 쟁이, 베짱이가 맞다. 


베짱이 파괴지왕이 칼바람이 불던 날 체인을 사 왔다. 오래된 자전거를 끌고 올라와 베란다에 세워두고 유튜브 체인 교체 영상을 보고 또 봐가며 애를 썼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 나는 더 이상 손이 빨간 베짱이를 볼 수가 없어 제안했다.

"들어와. 자전거도 바꾸고, 가방도 사자. 딴걸 좀 덜 쓰면 되지. 어때?"

"아니야, 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진짜야, 잠깐만 기다려 봐."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난 다음 손도 빨갛고 얼굴도 빨간 황가수가 크게 환호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나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이거 봐. 완벽해. 야... 내가 기술을 배웠으면 맥가이버 부럽지 않았을 텐데. 멋있지? 멋있지?"

자전거 체인 교체가 그토록 어렵고 대단한 일은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딸의 스케이트 가방과 바꾼 꽁꽁 언 황가수의 얼굴이 조금 멋있어 보이긴 했다.

그렇게 황가수는 체인을 교체한 오래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고, 무척 자람스럽고 뿌듯한 심정으로 반짝이는 바퀴가 달린 스케이트 가방을 주문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태리 가는 날 또 한 번의 감쪽같은 첩보전을 펼치고 트리 아래 스케이트 가방 상자를 놓아두었다.


이탈리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몸을 비비며 매일 행복하던 아이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스케이트보다 이탈리아가 더 좋아. 만약에 내일 스케이트 대회라고 해. 내일 안 가면 스케이트 이제 못한다고 해. 그런데 내일 또 이탈리아에 갈 수 있다고 해. 그러면 나는 이탈리아에 갈 거야. 나는 나중에 커서 이탈리아에 가는 것 도 좋지만, 어렸을 때 지금 이탈리아에 살아보고 싶어. 어른이 돼서 돌아가면 나도 다르고 이탈리아도 다르잖아."

라고 말하며 조금 울었다.


조금 울었지만 집 앞에 도착해서는 혹시 도착했을 선물에 대한 기대로 빨리 문을 열라고 성화하던 아이는 커다란 스케이트 가방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덴마크에 오면 슬플까 봐 산타 할아버지가 스케이트 가방을 줬나 봐. 그래도 스케이트 타는 건 좋긴 좋아. 스케이트 가방이 있으니까 또 빨리 스케이트 타러 가고 싶네. 내일 새벽 연습 가야겠다. 가도 되지?"


기뻐하는 아이, 제 슬픔을 스스로 달래는 아이와 산타가 되어 버린 베짱이 황가수를 번갈아 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베짱이는 부양가족이 없어서 계속 베짱이였을까? 부양가족은 베짱이를 산타 되게 하는 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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