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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Apr 18. 2020

팬데믹 시대의 엄마

한국, 이태리보다는 조금 늦게 우리가 사는 덴마크에도 COVID 19 확진자가 발생했다.

하루가 다르게 확진자 수가 늘었고, 덴마크는 문을 걸어 잠갔다.

학교도 회사도 상점도 모두 문을 닫았다.

남의 일이기만 했고, 뉴스를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는 기습적으로 내 일이 되었다. 

3월 11일 총리는 기자 회견을 통해 직장인들에게는 자택 근무를 권고했고. 10인 이상 모임을 금지했고, 국경을 폐쇄하고, 16일부터는 휴교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3월 11일까지 매일 확진자가 증가했지만 모두 눈치를 보며 스스로의 불안을 숨겼고, 어쩌면 운이 좋게 세계를 덮친 이 불행이 우리만은 피해 갈지도 모른다는 아무 근거 없는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은,  총리의 발표 이후 숨겨왔던 불안을 끄집어내며 상점의 진열대를 비웠고, 아직은 정상 등교가 가능했지만 3월 12일부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어른들도 직장에 나가지 않았다. 


한국과 이태리에서 이미 시작한 격리에 대해 많이 들었던 터라, 총리의 발표에 나는 그저 그럴 줄 알았다고 반응했다. 

하지만 슈퍼의 텅 빈 진열장 사진에 마음이 무너졌다. 처음 느끼는 불안함이었다. 

'시아를 지켜주지 못할 수 도 있겠다'.

알 수 없는 불안, 예감 같은 것이 아니라 언어가 되어 들리는 것 같은 너무도 선명한 불안이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생겨도 내 아이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도 내 본능은 당연히 내 아이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간절하고 교만한 본능을 공격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여러 재앙 영화에 등장했던 아이를 지키는 엄마의 모습들을 두서없이 떠올렸다. 하루쯤 그렇게 두려웠지만, 이내 한 치 앞을 모르는 얇은 인간이 되어 격리를 받아들였다. 


휴교와 동시에 극장도 문을 닫아 우리는 셋이 똘똘 뭉쳐 격리에 돌입했다.

이상하게 주어진 휴가도 방학도 아닌 느슨하고 조용한 일상이 어색해 셋이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보기도 하고, 늘어지게 늦잠을 자기도 했다.

삼일 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나니, 셋이 같이 가만히 제 할 일을 조금씩 찾아갔다.

시아는 온라인 숙제를 하고, 온라인 체조 수업을 하고, 온라인 피아노 강습도 받고, 격리 생활 선배인 이태리 친구들과 통화를 했다.

나와 황가수는 덴마크어 온라인 수업에 참석하고 숙제를 하고, 가사에 집중했다.

하루 세끼의 압박을 가볍게 하기 위해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음식을 했고, 음식에는 불평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식료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온라인으로 구매했다.

사람들이 없는 시간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산책도 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다들 저녁 먹을 시간에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이태리와 한국의 격리 선배들의 얘기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근거도 희망도 없었지만 불안도 걱정도 시간에 녹아 사라졌고, 답답하고 단조로운 일상이 바쁘게 여겨질 만큼 적응을 했다.

세상이 다 아픈데, 우리는 염치도 없이 셋이 밥을 먹고, 셋이 싸우고, 셋이 자전거를 타고, 셋이 산책을 하는 시간이 즐겁기도 했다.

격리의 필수 아이템이라는 Netflix에도 가입을 해서 오래된 한국 드라마를 매일 한편씩 정주행을 하며 남의 사랑에 두근거리는 아홉 살 구경도 했다.

아프고 힘든 세상에 미안했지만, 어쩌면 이대로도 그냥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의 생활의 기억은 꿈이 저편 같은 것이라 핑크빛이 었지만 다소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내가 격리를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 총리가 다시 기자 회견을 열었다.

확진자는 감소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전히 매일 증가하는데, 총리는 조금씩 일상으로의 복귀를 예고했고, 가장 먼저 복귀하는 대상은 유치원과 5학년까지의 아이들이라고 했다. 부활절 휴일이 지나면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개학을 한다는 것이다.

설마 했다.

며칠 지나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하겠지. 이태리도 한국도 학교는 여전히 휴교 중이거나 온라인 수업 중인데, 덴마크라고 뭐가 다를까?

며칠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유감스럽지만 휴교가 계속됩니다'라는 공지가 올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약속한 날짜는 다가왔고, 학교에서는 휴교 연장 소식 대신, 다시 시작될 학교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침들을 보내왔다.

텅 빈 진열대를 보고 느꼈던 날카로운 불안이 다시 찾아왔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밤잠을 설쳤다.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라도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엄마도 처음인데, 코로나 19에서의 엄마라니. 나는 경험이 없는 초자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도 집에 있고, 황가수도 집에 있는데, 시아를 학교에 보내는 게 맞을까? 보낸다면 왜 보내야 하는 걸까? 지금 보내지 않는다면 언제 보내는 게 적당할까? 판데믹의 날들은 언제 끝날까? 학교에 갔다가 혹시라도 시아가 아프면....

질문과 가정은 늘어갔지만 답도 예측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학교 시작이 약속된 날을 이틀 앞두고 학교에서 긴 지침을 보내왔다.

학교의 모든 공간을 교실로 활용하고, 학년 별로 등하교 시간을 달리하고,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만나 선생님과 등교하고, 부모들은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학교에서 제공되던 필기도구는 더 이상 함께 쓸 수 없으니 각자 필요한 필기도구를 챙겨 와야 하고, 모든 반을 2개로 나누어 수업하고, 2-3명의 아이들로 놀이 그룹을 구성해 같은 그룹의 아이들만 신체적 접촉이 가능하도록 하고, 수시로 손을 씻고, 올라가는 계단, 내려오는 계단을 구분해 계단에서 많은 인원이 같이 이동하는 것을 막고, 점심은 교실 제 자리에서 먹고, 많은 야외 활동을 하며, 아이들 간의 간격은 2m를 기본으로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긴 지침을 시아와 같이 읽었다.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시아도 조금은 불안해하는 눈치다. 학교에 꼭 가야 한다 혹은 가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는 해주지 못했다.

등교 하루 전에는 선생님들께서 직접 학교에서 등 하교 수업시간 등을 재연해서 동영상을 만들어 보내왔다.

학교 식당 강당 체육관에 새로 만들어진 교실, 등교 시간에 선생을 만나는 장소가 소개되었고,  친구들과 놀이를 할 때 주의할 점, 1분 동안 손 씻기와 같은 내용들을 선생님들께서 직접 보여주셨다. 

동영상 말미에 선생님들이 모두 운동장에서 점프를 해가며 아이들을 향해 인사를 하셨다. 

"아! 빨리 가고 싶다."

시아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동영상과 함께 온 교장 선생님의 편지 말미에는  '우리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분명 실수도 할 것입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문장에 담긴 선생님들의 두려움과 걱정을 읽었다. 선생님들 역시 아무런 확신도 없이 두려운 채로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신다는 생각에 오히려 부풀었던 나의 두려움은 조금 사그라들었다. 


손세정제를 챙기고, 필통을 챙기고, 학교에서 보내준 지침을 입이 닳도록 반복하고, 급식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조금이라도 안전해 보자고 도시락을 준비해서 평소보다 20분 늦게, 3학년 등교 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갔다.

학교 운동장에는 풍선 장식이 달려 있고, 선생님들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셨다.

시아는 멀리서부터 친구들의 실루엣을 알아보고 마음이 급해져 발걸음이 빨라졌다.

운동장 밖에는 'Kiss and Go zone'이라는 안내가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부모들이 아이들과 작별을 해야 하는 곳이다.

우리도  Kiss and Go zone에서 쪽 입을 맞추고 설레어 펄쩍펄쩍 뛰는 시아를 보내주었다.

늦게 도착한 아이들은 멀리서부터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달려왔다.

아이들은 2m 간격을 두고 서서 서로를 살피고 부르고, 찾았고 행복했다.


나에게는 전염병이고, 확진자 수이고, 사망률로 정의되는 하루하루가 아이들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 결핍의 시간이었으리라.

어른들의 불안을 배워 같이 불안해하며 아이스럽지 않은 일상을 잘도 견뎌냈지만 너희들은 하루아침에, 너희를 둘러싼 익숙한 세상, 다정한 목소리, 폭신하고 따뜻한 손, 너희들만 아는 비밀스러운 이야기, 미움과 위로 같은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구나.

지키기 위해 불안하고 근엄하기보다 한 번이라도 더 같이 유쾌할 걸.

맑게 웃는 아이들을 보고 나서야 팬데믹의 시대를 경험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 짐작했다.


내 아이와,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오늘이 참 가혹하다. 당연했던 순간들이 우리의 아이들에게 다시 당연한 순간들이 될 수 있을까? 팬데믹 시대의 어른들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생명과 마음을 모두 지켜줄 수 있을까? 

아이들이 경이로운 생명력으로 결핍의 상처에 새살을 돋우고 서로를 보듬어가며 다시 일어서는 동안 한 명도 낙오되지 않도록 우리 어른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보듬어야 할까? 


시아는 이틀째 학교에 다녀왔고, 다시 더 수다스러워졌고,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시아를 학교에 보내기로 한 우리의 선택을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팬데믹을 사는 엄마는 팬데믹 이전의 엄마보다 작아졌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지만 인류를 사로잡은 재앙을 막는 방패가 돼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초등학생인 네 삶에 충실한 네 곁에서 나도 너처럼 팬데믹의 하루하루를 그저 소중하고 유쾌하게 보내리라. 


이 모든 날들이 우리를 더 자라게 해 주길, 이태리가, 한국이, 온 세계가 서로에 기대어 이 시간을 견뎌내길. 그리고 반드시 다시 일어서길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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