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소아치과입니다.
일하는 병원 소아치과는 어느 구석에 위치해있다. 처음 오는 사람은 좀 찾기 힘들다. 원래 이 병원이 미로 같은 곳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구석에 있는 편이다. 의과의 여러 과 중 마이너과인 치과, 치과의 여러 과 중에서도 마이너인 소아치과는 그렇게 병원 구석 어딘가에 조그맣게 존재한다.
그런데 작다고 해서 존재감마저 미미한 것은 아니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우리 조상님들이 누누이 말하지 않으셨는가. 작은 공간에 오디오는 어느 과 못지않다. 성인 치과와 연결되어 있는 문은 항상 꽉 닫아 두어야 한다. 대기하는 성인 환자들이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소아치과 진료실이란 쾌적함과 거리가 멀다. 오열과 분노와 토사물이 만연한 전쟁터이다.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우는 아이들 울음에 화음처럼 더해지는 것은 울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어른들의 언어다. 그런데 말이다. 왜 울면 안 되지?
본격적으로 동요까지 나서서 아이들에게 울지 말 것을 종용한다. 미취학 아동들에게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란 어느 유일신보다 절대적이라는 것을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면 알 것이다. 그런 산타할아버지가 대놓고 협박을 한다. 울면 안 된다고. 울면 산타할아버지는 선물을 안 주신다고?
“울면 안 돼~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주신대~”
치과에서 아이들은 늘 운다. 치과는 울 만한 곳이다. 이상한 냄새에, 이상한 기구들,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무서운 사람들. 어른이 되어서 들어가도 무서운 곳인데, 아이들이 어떻게 두려움이 안 생길까? 그래서 악악 운다. 더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아이들일수록 최선을 다해서 운다. 울어서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울음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아이들은 감정을 명확하게 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표현할 줄 안다. 아직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울음으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도, 의사소통이 되지만 무서우니 무섭다고 우는 아이들에게도 울음은 좋은 표현 수단이다.
그런데 왜 동요까지 만들어 아이들에게 울지 말라고 하는 걸까? 우리 어른들이, 우리 사회가 아이들의 울음을 너무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울음뿐 아니라 감정표현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왜 우리는 감정표현을 불편해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아이들을 보자. 아이들은 욕구에 명확하다. 말을 못 할 뿐이지, 배가 고프고, 졸리고, 기저귀가 축축하고 본인 나름의 표현으로 충분히 본인의 욕구와 감정을 표현한다.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것이 감정이라는 것을 모를 뿐이다. 조금 더 크면 주양육자와 상호작용을 하기 시작한다. 그때 아이들은 주양육자의 표정을 살피고 따라 한다. 엄마가 웃으면 웃고 엄마가 울면 운다. 애착관계가 충분히 형성되었으면 엄마의 상태를 살피기도 한다. 내 감정을 알고 상대의 감정을 살핀다. 어린아이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은 사회생활을 하며, 세상의 규율을 만나며 점차 잊혀 간다. 아이들은 아프면 운다. 아프면 화가 난다. 화가 나는 감정에 대한 솔직한 대응으로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것에 대고 부모들은 “울지 말고 예쁘게 말하라고 했지!”라고 윽박지른다. 아니. 슬픈데, 화나는데 예쁘게 말이 어떻게 나오느냐 말이다. 아이들은 헷갈린다. 내가 가진 감정이 잘못된 것인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서서히 자신의 감정을 잊어간다.
어른의 입장이 되어보자. 상대 감정의 표현이 “표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해결해달라는 “부채”로 느껴진다. 아이는 그냥 우는 건데 그 울음이 계속 송곳이 되어 “너 어떻게 좀 해봐”라고 찌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도 울고 싶다. 나도 울고 싶은데 너무 오랫동안 울지 않았더니 이게 울 감정인지,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글을 써 내려가며 한참을 울었다. 그러다 또 글을 썼다. 쓰다가 울고 쓰다가 웃고. 지난 세월의 눌려놓은 감정을 한꺼번에 폭발시키기라도 하듯 그렇게 한참을 쓰고 울고 웃었다. 태풍 뒤의 화창함이라고 할까. 그러자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무얼 좋아하는 사람이고, 무얼 견디기 어려워하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감정을 쌓아놓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감정을 억누르지도 않기로 했다. 자신의 감정을 잊은 사람이 타인의 감정을 알기란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감정을 잃은 사람들은 그 채워지지 않은 공감의 골을 찾아 부유한다.
아이들은 운다. 그리스어로 진리는 ‘알레테이아(잊힌 것들)’이다. 진리는 잊힌 것들에 있다는 말이다. 아이들의 감정표현을 보면서 기억해보는 것은 어떨까. 내 안에 깊게 파묻혀서 잊혀 있던 그 오래된 감정들에 대해서 말이다. 어쩌면 그곳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표현하지 않은 감정은 절대 죽지 않는다
산채로 묻혀서 나중에 더 추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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