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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Feb 28. 2020

팔자 좋은 사람이 글쓴다

코로나가 마비시킨 일상


아무도 관심없고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지만 『싱크홀 메우기』라는 북큐레이션 연재를 하려고 했다. 내 안에서 꽤 오랫동안 준비했던 기획이고 아주 소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모든 게 마비되었다. 가장 마비가 심한 건 물리적 또는 신체적인게 아니라 바로 정신. 온 정신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쏠려있다.


한창 활발하게 글쓰기를 할 때는 몰랐다.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이를 글로 옮기는 게 얼마나 팔자 좋은 일인지. 글의 테마를 탐색하고 두꺼운 인문학책을 뒤적이며 인용구를 찾는 건 괴로운 일이야! 하며 머리를 쥐어뜯던 시간, 그건 괴로운 일이 아니라 행복한 일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슈가 터지고 책 한장 펴본게 일주일이 넘어간다. 손에 잡히는 아날로그 책이 있다면 그건 오직 오늘자 신문 뿐.



마음이 가라 앉지가 앉는다. 대부분의 사망자는 60대. 친정부모님, 시부모님이 모두 60대시고 딱히 건강하신 분들이 아니다. 언니는 하루에 여러 사람을 만나는 자영업을 하고 있고 형부는 폐렴을 취재해야하는 기자다. 한집에 살고 있는 가족들도 걱정이다. 남편도 최근에 폐렴을 앓았고 기관지가 약하다. 집에는 휴원했다고 TV를 볼수 있다고 즐거워하는 5살 꼬맹이도 있다. 불안이 꼬리를 무니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내 몸 안의 모든 영양분을 불안이 빨아들이는 것 같다. 곧 나를 먹어치워 버릴 듯한 불안. 우울감과 무기력이 몰려온다.


기분이 안 좋거나 우울감을 느끼면 책을 폈다. 그런데 오늘따라 책을 집는게 속편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간만에 뉴스채널을 틀었더니 가슴이 답답하다. 채널을 돌리니 영화채널에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을 하고 있다. 루시 리우가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야쿠자의 목을 베고 포효한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렇게 될거야!! "Fucking time!!"를 외치는 그녀의 입이 매섭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소리지르는 것 같다. 더 우울해졌다. shit...


< Kill Bill, Lucy Liu>



TV를 끄고 책장으로 향했다. 사놓고 한번도 펴지 못한 유발하라리의 신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폈다. 여러가지 테마 가운데, 테러리즘이 눈에 들어온다.


테러리즘이란 말 그대로 물리적 피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퍼트리는 방법으로 정치 상황을 바꾸려 드는 군사전략이다. 이런 전략은 적에게 물리적으로는 큰 피해를 입힐 수 없는 아주 약한 일당이 주로 사용한다. 물론 군사 행동도 모두 공포를 유발한다. 하지만 재래식 전쟁에서 공포는 물리적 손실에 따라붙는 부산물이며, 대개 손실을 입히는 힘에 비례한다. 반면, 테러리즘에서는 공포가 주무기다. 테러범이 실제로 갖고 있는 힘과 그것이 유발하는 공포사이의 불균형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유발하라리,『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인구는 천만. 현재 코로나 환자는 65명이다.(2월28일 16시 기준) 비율로 따지면 0.0001%도 되지 않는다. 국내 확진자 수 대비 전체 인구 비율도 0.00001%도 채 되지 않는다. 매우 적은 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 테러리스트의 실제 힘과 그것이 유발하는 공포는 불균형이 크다고 해석된다. 역시 영화보다는 책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조금 차분해진다.


제발 이 소요가 어서 지나가길 기도하고 이 글을 모든 모든 분들이 코로나의 테러에서 안전하시길 기도합니다.

시드니 소속 직업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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