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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Oct 12. 2020

다음 생은 꼭 친절한 남자랑 결혼해야지

이번 생은 당신이랑 티격태격하며 쭉


(남편 욕 기대하고 오신 분들은 뒤로 가주세요. 자기 반성문입니다)


나는 왜 사회에서 관대하고

집에서는 압력솥이 되는가




후배 10명 정도를 데리고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곧 발표회도 있고해서 후배들에게 발표회 관련 아이디어를 요청했다. 2-4년 차들에게 적합한 굉장히 낮은 수준의 요구였는데, 아무도 아이디어를 내지 않는다. 퇴근 시간이 다되었을 쯤  후배A가 메신저로 말을 건다. '선배님, 제가 생각해봤는데요.'하며 자신의 생각을 소상히 풀어놓는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일까, 아이디어의 적정성과 상관없이 온갖 칭송어구가 내 입에서 쏟아진다.

"역시, 우리 A는 똑똑하구나! 정말 너 때문에 우리 회사 미래가 밝다!!"


다음날이 되어도 연락오는 후배가 없다. 용기내어 프로젝트 단체방에 '애들아, 그래도 1명당 1개는 내자'라고 소심히 운을 떼보았지만 여전히 깜깜 무소식. 묘하게 점점 열이 올라온다. 아니! 이게 대체 뭐라고. 종이 딱 펴가지고 몇단어 조금 끄적이다보면 아이디어 낼수 있을텐데 그걸 못해서 어! 어?!! 하고 싶어진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음수대에서 커피를 뽑고 있는데 후배B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밝게 인사한다. '너 왜 아이디어 안내?'라고 한소리 하려했지만 눈웃음치며 파안대소하는 친절한 B에게 결국 "우리 B는 웃는게 참 예쁘구나."하고 만다. OTL...


다시 자리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고작 아이디어 하나 안냈다고 화내는 선배는 참 별로일 거란 생각이 든다. 단체방 안에 있는 아이디 하나하나 눌러보며 그들의 장점을 생각한다. C는 비록 아이디어는 안냈지만 관록이 있고, D는 비록 아이디어는 안냈지만 유머러스하고, E는 비록 아이디어는 안냈지만 숫자를 잘 뽑고 꼼꼼하다. 하, 이런 보석같은 아이들에게 화를 내려고 하다니. 그래, 별거 아니니까 내가 하자! 하며 종이를 꺼냈다.  


기름이 쏙 빠지도록 지친 하루를 보내고 집에 오는 길, 남편에게 카톡이 온다. "여보, 우리 저녁 뭐먹을까?(하트)". 고작 '저녁 뭐먹지?'라고 물어봤을 뿐인데, 하트하나 붙여 애교있게 말했음에도 열이 확 올라온다. 열이 올라온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집에 가서 남이 차려준 밥 먹거나 급식소에 가서 대충 뱃속에 아무거나 쑤셔넣고 배 두드리며 자고 싶은데,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남편과 저녁메뉴를 심도있게 상의하고 같이 밥 차리고 치우고 아이 씻기고 재우는 워킹대디&워킹맘의 밤루틴을 해내야 한다. 순간 모든 일들이 먼 미래처럼 아득하고 답답했다. 상당히 고기압이 된 기분은 결국 뜨거운 압력솥이 되어 거친 말을 내뱉게 만든다.

"좀, 알아서 골라놔봐!"


여기서 남편도 가만있지 않는다.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래.?". 내가 압력솥이 되면 남편은 기차통이 된다. 고작 '저녁 메뉴'로 촉발된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집에 와서 밤루틴을 끝내고 맥주 한캔을 따며 2차전을 시작한다. 서로의 말을 경청하다가 상대의 말을 가로 막기도 하고, 오해가 있는 부분은 강하게 나서서 정정한다. 결국 극적인 화해(내일을 위해 자야하므로)에 도달하여 침대에 함께 눕는다. 이대로 싸움이 끝나는 게 억울해서 이불을 확 감아올리며 한마디 한다.

"다음 생은 꼭 친절한 남자랑 결혼할거야!"


대꾸조차 하지 않는 남편. 지난한 현생을 떠나 꿈나라로 가있다. 나보다 먼저 잠든 상대에게 분해 최대한 몸을 벽으로 붙인다. 벽의 냉기가 오늘 오르락 내리락 했던 화를 잠재워 주는 듯하다가, 오늘 후배들에게 한마디 못한 스스로에게 또 화가 난다. 아무리 호구선배라지만 그래도 선배가 시킨 건 해야하는 거 아닌가? 아니지, 후배들은 그럴수 있지. 그럴수 있는거야. 아직 어린 연차니까 내가 무조건 이해해주자.


"쿠루루룽쾅쾅콰콰쾅...."

어디서 천둥소리가 들린다. 남편이다. 흥! 좀 투정 부렸다고 받아주지도 않고! 한번 째려보고 등을 돌리는데, 어두운 조명에 비친 남편의 고단한 얼굴이 보인다. 하루종일 회사에서 볶이고 집에서 압력솥에게 시달린 남편. 잠들기 직전까지 거센 비난이나 들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고개를 돌려 남편 얼굴을 빤히 본다. 아까 거세게 내 뱉은 "다음 생은 꼭 친절한 남자랑 결혼할거야!" 라는 말이 내 귀에 맴돈다. 사실 나는 남편이 좋았던 이유는 마냥 '친절하지 않아서' 였는데. 첫 만남부터 자기 먹을 메뉴부터 찾던 남편. 과한 매너와 친절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던 시기라 자기 취향이 확고한 남편은 참 신선했다. 그런 점이 좋아서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이제와서 후회된다고 말하다니.


친구들 중에 10살 이상 차이나는 연상남과 결혼한 애들이 좀 있다. 그 집에 놀러가면 현타가 온다. 와이프가 무슨 말을 해도 허허허 웃어보이는 도사님 같은 남편과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애교부리는 나랑 동갑 친구. 친구가 아무리 날선 말을 해도 남편 분께서는 허허허 하며 포용해주신다. 밥 먹을 때도 반찬을 계속 친구 밥 위에 올려주며 아빠미소 짓는 친구 남편. 김치찌개 같이 먹으면 돼지고기만 쏙쏙 골라먹는 우리 남편과 다르다. 친구에게 말한다. "우와, 친구야. 너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했구나. 남편분 너무 멋지다."


거짓말이다. 모든 걸 나에게 맞추고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사람. 수동적이고 포용만 하는 사람은 부담스럽다. 내가 원하는 배우자 상은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함께 할 일이 있으면 서로 도우면서 해나가는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다소 부딪침은 있을 수 있지만 그 과정 중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성도 더 발달하게 되는 것 같다. 확실히 결혼 초와 지금의 나는 남편님 덕분에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화가 별로 안나는 것도 있다.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이 체화된 것. 근데 스승에게 승질이나 내고 있다. 한심하게...


부러운데 뭔가 공감됨.. ㅋㅋ


명함 하나를 꽂아놔도 될만큼 깊게 미간을 찌푸리고 자고 있는 남편. 괜히 숙연해진다. 벽에 붙어있던 몸을 남편 쪽으로 돌려 그의 어깨에 내 얼굴을 올린다. 그리고 나지막히 속삭인다. 누구든 잘 이해하게 만들어주신, 사회성을 길러주신 남편님, 감사합니다. 다음 생은 친절한 남자랑 한번 살아볼께요. 어차피 이번 생은 당신이랑 쭉 함께 할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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