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과 속이 다른 청담동...
옷을 왜 그렇게 입고 다녀요?
왜냐면 -
“시드니는 항상 스티브잡스처럼 입네요?”
패션센스가 좋은 회사동료가 내 뒤를 스쳐가며 말한다. 그는 매일 다른 스타일의 외투를 입고 속 셔츠와 겉니트의 조합이 매일 바뀐다. 스타일에 예민하고 타인의 복장을 종종 평가하는 그에게 한마디를 듣고 나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칭찬인가 욕인가 갸우뚱 하며 책상 위 테이블을 보는데 정말 스티브잡스가 앉아있다. 유니클로에서 구매한 진한 색의 목 폴라, CKJ에서 대충 사이즈 맞춰 산 청바지, 금색 테 안경까지. 스티브잡스 딸까진 아니어도 먼 사촌이래도 믿을 모습이다.
“생각을 많이 안 해도 되거든요.”
거울로 피부결을 한번 더 확인하며 그에게 답했다. 아- 하고 동의하는 척 하는 그의 눈빛에서 나에 대한 한심함이 비친다. 등을 돌려 하던 일을 하는데 ‘저 나이에, 저 직급에 저렇게 입고 다니는게 맞아? 윗분들은 시각적인 존재인데 저렇게 외모에 신경을 안 쓰면 언젠가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하는 그의 물음표가 뒤통수 뜨겁게 느껴진다. 동료의 애정 어린 걱정에는 송구하지만 나는 이 단촐한 스타일을 바꿀 생각이 0.1도 없다. 회사원, 작가, 엄마, 아내로 살고 있는 지금 본업과 본질 외에 것들에는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 내 체형과 톤에 맞는 스타일을 고정해놓고 몇가지 옵션만 돌려가며 입어야 생산성이 올라간다.
작년 이맘쯤 출간했던 <청담동 살아요, 돈은 없지만>이 딱 출간 1주년이 되었다. 1주년을 기념할 겸 1년 내내 열심히 살아온 우리 부부를 자체 격려하기 위해 미슐랭 식당 한 곳을 찾아갔다. (식당 이름은 인스타에 써두었다.) 식당의 위치는 - 내 책에 ‘쓰리청담’으로 등장했던 - 청담공원 아파트 앞이었다. 지도앱으로 위치를 확인하며 걷는데 영하 10도를 하회하는 날씨 때문인지 식당을 찾아가는 길이 더 쓸쓸하고 스산하게 느껴졌다. 길이 쓸쓸하면 어떤가 싶다. 내 옆에 일년을 건강하고 성실히 살아낸 남편이 있는데.
지도앱을 보니 거의 식당에 도착한 듯 보였다. 그런데 식당 간판이 있는 건물로 다가가니 1층 식당에 불이 꺼져있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예약금까지 내놓았는데 식당이 없는게 말이 안되는 것 같아 요리조리 둘러보니 건물 옆 낭떠러지 같은 비탈길 옆에 미슐랭과 블루리본 마크가 보인다. 여기에 식당이 있다니. 아마 패션센스 좋은 회사 동료는 자신의 멋진 대형SUV를 끌고 왔다가 기함을 하며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허름한 골목 구석에 있는 유명 식당과 카페가 꽤 익숙한 우리는 당차게 식당 문으로 향했다. 유리문 앞에서 우리가 걸어오는 속도를 계산해서 내 발끝이 식당 문 앞에 닿는 정확한 타이밍에 문을 열어주는 점원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유명 식당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건물만 보면 이런 허름한 장소에 미슐랭 식당이 있다는게 상상이 안되겠지만 나는 이게 청담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겉에 곰팡이 좀 피었으면 어떠한가, 유리창에 붙은 빨간색과 파란색 딱지가 그런 것들에 시선도 가지 못하게 하는데.
하지만 여전히 시골사람 유전자가 깊게 박혀있어 파인 다이닝을 다녀오면 매운라면이 땡긴다. 겨울잠 자러 가기 전 지방을 축적하는 곰처럼 가을에 양껏 먹어둔 탓에 몸이 많이 불어있는 상태라 라면은 포기하고 주변 카페에 들어가 우유커품이 풍성한 라떼를 한잔 주문했다. 출간 후 달라진 건 거의 없지만 한가지 변화가 있다면 한달에 1번 정도 카페에 앉아 <청담동 살아요, 돈은 없지만>의 블로그 리뷰를 읽는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냈을 때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두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는 이유는 내 책을 읽고 삶의 방향성을 다잡는 독자분들의 리뷰 덕이다.
수십개의 블로그 리뷰를 읽다보면 공통적으로 공감받는 글귀는 이 부분이다.
내가 살면서 만난 좀 괜찮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삶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일에 대해 타인에게 화살을 돌리기보다는 자신에게 더 집중한다. 누구나 인생에서 굴곡은 생긴다. 그럴 때도 그들은 평온하고 꾸준히 타인에게 관대하다. 타인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력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청담동 살아요, 돈은 없지만 ‘차이나는 인생’ 中>
사실상 이 부분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두꺼운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말은 찾아내고 싶어지는데 이 책에서는 저 부분이 핵심메시지다. 내 바깥의 것들은 여전히 오늘도 내일도 먼 미래도 별로 중요하지 않을 거다. 중요한 건 내 생각과 소신, 그리고 그로 인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평화다. 옷차림이 단촐하고 보기 조금 안타까우면 어쩔텐가. 내가 내 모습을 만족하고 사랑하는데. 내 식당이 겉보기에 조금 허름하면 어떤가. 안으로 들어온 손님들이 항상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데.
허름한 청담동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하루였다.
내년도 내후년도, 계속 이 모습을 닮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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