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할 수 있다면 그걸 진정성이라 할 수 있을까
며칠 전 대통령과 재벌 총수 몇 분이 부산의 한 시장을 방문해 떡볶이와 오뎅을 나눠먹는 정겨운 모습이 포착되어 세간의 관심을 얻고 있다. ‘엑스포 유치 실패해 놓고 굳이 바쁜 경제인들 데려다 웬 쌩쇼냐’, ‘인간적이다, 이런 게 진정한 서민들과의 소통이란 거다’ 등 인터넷상의 시민 반응은 그 호오(好惡)가 분명히 나뉘어 각자의 색깔에 맞는 가상공간을 열심히 메우는 중이다. 물론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채널성향에 따라 유명 경제/정치인들의 행보가 명백히 다르게 해석되기는 하나, 공통적으로 그 논점이 그들의 진정성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진정성에 대한 관심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듯 보인다. 진정성(authenticity)은 전 세계 온라인 검색에서도 그 사용 빈도의 급상승을 기록하며 미국 최고(最古)의 전통을 자랑하는 메리엄 웹스터(Marriam-Webster) 선정 2023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바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활용도에 비해 진정성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떨 때 상대가 진정성 있다고 말하는가. 일상에서 진정성이란 단어가 흔히 쓰이고는 있으나 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화자의 의도나 맥락에 따라 다를 때가 많다. ‘진정성 있다’는 상황에 따라 ‘인간적이다’, ‘간절하다’, ‘구체적이다’, ‘진심이다’ 등 서로 다른 의미를 담고 있어 그저 상대에게 ‘강한 호감이 있다’ 이외에 그 구체적인 뉘앙스를 꼭 집어내기 어렵다.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을 혈액형과 MBTI, 각종 심리 테스트를 동원해 해소하곤 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독일 프레드리히 쉴러 대학(Friedrich Schiller University)의 사이먼 룹케(Simon M. Luebke) 교수는 최근 그의 논문에서 정치인의 진정성을 평가할 수 있는 세 가지 척도(the Perceived Political Authenticity Scale)를 제시한 바 있다. 그의 논지를 요약해 보면 이렇다. 우선 일관성(consistency)이다. 정치인의 발언이나 투표행위가 그/녀가 옹호하는 가치와 이념에 부합하는지, 그/녀의 메시지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 변화나 정략적 유불리에 따라 혹은 발화상황의 공사(公私) 정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음은 평범함(ordinariness). 너무 완벽한 사람에게서 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인류 보편율일까. 업무수행이나 공개행보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실수나 아마추어리즘을 통해 비현실적일 만큼 완벽하던 대상이 나처럼 불완전한, 현실에서 얼마든지 마주칠 법한, 친근한 인물로 다가온다. 이 원리는 철이 되면 재래시장을 찾는 한국 정치인들에게서 논문의 저자가 더 배워 발전시킬 것을 권한다. 마지막은 즉시성(immediacy)이다. 이는 정치인 자신의 내면이 전략적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대중에게 전달될 때를 가리킨다. 표현의 적절성이나 예의, 정치적 올바름, 타인의 반응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믿는 바를 거침없이, 그리고 지체 없이 표현하는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성격적 특성이다. 대부분 특정 제도나 사상에 대한 굳은 신념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메시지 전달 과정에서 감정이 격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객관적 기록에 의지할 수 있는 일관성을 제외하면, 일반 대중의 주관적 평가 대상으로 남는 것은 평범함과 즉시성 두 가지다. 이 둘을 요새 쓰는 우리말로 다시 풀이하자면 ‘소탈함’과 ‘소신’ 정도가 될 게다. 물론 보는 사람의 정치 성향에 따라 ‘쇼’와 ‘불통(不通)’이 될 수 있겠지만. 뭐 레이블은 중요치 않다. 더 의미 있는 질문은 소탈함과 소신 중 연기하기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다. 상대방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그/녀가 제어하기 어려운 정보에 무게를 두어 평가하기 때문이다. 자기소개서 보다 담임 선생님이 작성한 생활기록부나 그 사람과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있는 동료의 진술이, 자사 상품에 대한 광고보다 써본 사람의 후기와 별점이 최종 결정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제삼자의 눈에 비친 ‘연출된’ 진정성이 아닌 진정성 자체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알고 나면 위의 질문에 대해 답하기가 조금 더 쉬워질 것 같다. 진정성을 정의한 여러 지성 중 필자는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를 꼽는데, 필자가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이상향과 궤가 같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진정성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고뇌를 이겨내며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철저히 외로우면서도 눈물겹게 가슴 벅찬 과정이다. ‘자유’와 ‘선택’이라는 단어는 언뜻 듣기에 쉽고 편안해 보이지만, 이를 옳곧이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 독자가 가지고 있는 옷과 신발, 자동차, 거주하고 있는 동네와 집, 즐겨보는 넷플릭스 프로그램, 출신학교, 자녀의 수, 자녀가 다니고 있는 학교, 직장, 배우자, 가치관 등 현재의 삶에서 당신을 지금 그 위치에 데려다 놓은 여러 요인 중 오롯이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얼마나 될까. 우리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모르는 상황은 항상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내 판단 때문에, 고로 내 자유의지의 발현으로, 나와 내 가족이 불행해지면 어쩌나. 그 책임은 내게 있을 터인데, 과연 내가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까. 깊은 고뇌를 덜기 위해 많은 이들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기꺼이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양도한다. 절대자, 파시즘, 독재자가 출현하게 되는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그들의 자유를 헌납했기 때문임은 이미 세기의 지성 프레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와 에릭 프롬(Erich Fromm)의 저서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과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에 친절히 안내되어 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진정성은 자신의 결정을 사회가 정한 룰에 맡김으로써 얻을 수 있는 편안함과 이별하고 기꺼이 자유의 무게를 견뎌내는 이들에게 깃든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와 시선, 사회의 통념이나 가치체계가 요구하는 역할규범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자유 의지와 판단에 따라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 결과에 대해 기꺼이 책임지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여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타인과는 극적으로 구별되는 한 존재로서의 독특한 의미와 가치가 바로 진정성인 것이다.
진정성 있는 사람은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물론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상식적인’, ‘편안한’, ‘말이 잘 통할 것 같은’ 보다는 ‘괴팍한’, ‘특이한’, ‘불편한’, ‘독불장군 같은’ 등의 형용사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정성을 추구하고 있거나 이미 찾아낸 이에게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타인의 시선 따위는 중요치 않기 때문이다. 1964년 사르트르가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절한 이유 역시 내적 동기에 충실했기에 축적된 자신의 업적이 타인의 평가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나 의아함에 기인했다는 해석이 있다.
자, 이제 위의 정의를 ‘연출된’ 진정성 척도와 비교해 보자. 진정성을 획득한 이의 말과 행동은 타인의 시선이나 외력에 휘둘리는 이의 그것에 비해 일관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사소한 실수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꾸밈없이 표출할 것이므로 ‘소탈하다’, ‘소신이 강하다’, 혹은 ‘불통이다’라는 말도 자주 들을 듯싶다. 이리 보면 진정성과 ‘연출된’ 진정성 사이에 일종의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은 출발점이 서로 다르다. 개인의 내면이 중추인 진정성과 달리, ‘연출된’ 진정성은 타인의 눈이 발현 동기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연출된’ 진정성은 무대에 올려진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타인의 인기를 먹고사는 대중 정치인들에게 진정성은 기대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가치이다. 그러나 진정성을 연기하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연출은 상대를 의식할 때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존재 의미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면 진정성의 가면도 자연스레 벗겨진다. 이번 부산 국제시장에서 목격된 지체 높으신 분들의 먹방쇼는 그곳 상인들의 유권자로서의 의미가 아직 유효함을 반증하기에 꼭 불쾌해할 일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진정성의 강요다. 엄밀히 말하면, ‘연출된’ 진정성의 강요가 맞다. 정의상 진정성은 개인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에 외력으로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셈에 밝은 정치인들은 이에 기꺼이 응한다. 심지어 잘한다. 여름내 옥탑방 살이 해보기, 뒷굽이 다 달아 빠진 구두 신고 다니기, 간헐적 단식하기, 시장에서 오뎅국물 부탁하기 등 진귀한 쇼가 연중 계속된다. 모두 비현실적이리만큼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평범함 이하의 현실로 억지 소환한 결과다. 유권자의 이름으로.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더 의미 있는 대중이 되었을까. 왠지 쇼가 끝난 무대 뒤에서 우리를 비웃고 있을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가. 물론 우리가 그들의 쇼를 바란 적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쇼가 계속되고 있는 데에는 한국 대중에 대한 나름의 분석이 있지 않을까.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은 이제 평범함 연기의 달인이 되었고, 그것만으로는 그들의 진정성을 판단하기 어려워졌다. 이제 난이도를 한 단계 높여보자. 소신이라 해도 좋고, 불통이라 해도 좋다. 일관되게, 가슴 벅차게, 누구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구줄창 했던 얘기 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여겨봐 두자. 뭐 사막에서 바늘 찾기이긴 하겠지만. 최소한 그/녀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실체가 당신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진짜 사람’일 확률이 아주, 아주, 아주 조금 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