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곰발바닥을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손을 보면 마치 곰발바닥도 저렇게 생겼거니 한다. 그의 손은 웬만한 남자의 손가락에 두배는 거든이 되보이고 손바닥도 단단하다. 아버지는 160cm가 갓 넘은 작달막한 키에 일하면서 다져진 군살없는 몸, 갈색의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아버지는 곰보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얼굴이 다른 아저씨들과는 다르게 구멍이 송송 나 있는 것이 신기해 만져보면 아버진 항상 “전염병 때문에 그랴”한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왜 이토록 다른 아버지들과 다른가. 왜 나의 아버지의 모습은 이런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도 자랑스러운 , 많이 배우고 깨끗한 옷을 입고 일하는 직업의 가진 아버지가 갖고 싶었다. 이런 나에게 아버지는 내겐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 자체였다.
어린시절 나는 한번도 아버지를 존경해 본적이 없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였고 나의 학창시절 부모의 직업난에 쓸말을 찾아 고민하게 했던 분이다. “아버지 여기다 뭐라고 써요?” 물으면 “노동, 막노동이라고 써”한다. 어렸을 때는 시키는 대로 그렇게 썼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 들었을때 부터는 ‘운수업’(그때 아버지는 시장에서 물건을 나르는 일을 하셨다.)이라고 썼다.
중학교때 있었던 일이다. 무더운 여름날 햇볕에 얼굴이 찡그러지는 한낮이었다. 난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저만치서 머리와 어깨에 먼지가 소복히 쌓인 아버지가 자전거를 끌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난 아버지가 나를 못봤으면 했다. 그러나 어느새 내 앞을 지나는 아버지를 차마 못본 채 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향해 먼저 말을 걸었수 밖에 없었다. “일 다녀오셔요?” 힘없는 목소리로 아버진 “어. 그랴. 집에 잘 들어가”하면 난감해 하는 나의 표정을 읽으신 듯 서둘러 지나가셨다. 친구들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내가 얼마나 못된 딸인지 절실히 느껴야 했다.
학교 다니면서 난감할 때가 또 있다. 부모의 학력을 적는 것이 해마다 있었다. 고등학교, 중학교는 고사하고 ‘국졸’이라고 쓰는 것도 거북스러웠다. 나의 부모님은 사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학교 근처도 간 적이 없는 무학력자요. 아버지는 겨우 한글을 깨우쳤을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학창시절 내내 작성란에 “국졸”이라고 힘주어 썼다.
나의 아버지는 가난하다.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늘 가난했다. 가난해서 가방끈이 짧았고 가난해서 농사지을 땅도 한퇴기 밭뿐이었다. 가난해서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가난해서 돈 되는 일이라면 더럽고 위험한 일이라도 해야 했다. 가난해서 4남매를 데리고 단칸방 전세를 전전해야 했고 아이들이 소란스러워 주인집에 더 굽신거려야 했다. 가난해서 먹고 사는 것 외에 다른 꿈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 흔한 등산을 하거나, TV의 스포츠중계도 보지 않았다.
요즘 유행하는 말중에 “갑”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대로라면 아버지는 그의 생애에서 한번도 갑이 되어 본적이 없는 사람이다. 두 아이를 키우는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진정한 갑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 위을 군림하면서 상대적으로 많이 가진 것에 우쭐대 타인을 소외시키는 “갑”. 하지만 진정한 갑은 그 사람의 삶에서 얼마나 노력하며 살아왔는가가, 그의 삶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었는가가 기준이 될 수 있다면, 나의 아버지는 진정한 갑이다. 내가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노력의 몇 분의 일이라도 따라 살 수 없다는 것,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가족들을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내 삶에서, 나의 가족들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갑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